“얼마나 지속되는진 나도 정확히 몰라.”
안드레아가 말했다.
“나도 한 반년 같은 얼굴로 지내 봤는데, 그 이상은 해 본 적 없어. 영원히 지속되는 술법은 아니니 너무 오래 두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그러니 길어도 반년 내론 돌아와.”
“…….”
“왜 대답 안 해?”
“장담할 수 없으니까.”
페기의 태연한 대답에 안드레아는 욕지거리를 뇌까렸다. 페기는 아직 익숙지 않은 적갈색 머리칼을 가만히 매만졌다.
“걱정하지 마. 술법이 풀려도 다시 걸면 되니까.”
“뭐?”
“네가 했던 그대로 똑같이 따라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안드레아의 표정이 굳었다.
“잊으라고 했잖아.”
“그걸 어떻게 잊어.”
“잊어 보려고 노력을…!”
울컥한 안드레아가 눈가를 감싸며 간신히 화를 가라앉혔다. 그러곤 한층 고단해진 얼굴로 말했다.
“내가 갈게. 정히 반년 내로 못 돌아오겠다 싶으면 내가 갈 테니까, 네 손으로 그 짓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자, 이것도 가져가고.”
안드레아는 구석에서 새장을 가져왔다.
“내가 길들인 새니까 어디서 보내든 날 찾아올 거야.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
“어디 전쟁터 나가는 것도 아닌데….”
“지금 제일 위험한 놈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 거잖아, 너.”
갑갑하다는 듯 안드레아가 언성을 높였다.
“지금까지 네가 알던 그놈은 생각하지 마. 그 새끼, 완전히 돌아 버려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몰라. 갑자기 탐보프로 날아간 것만 해도 그래. 그 새끼가 어느 날 갑자기 머리가 꽃밭이 되어선 빌헬미나 3세와 페임하른 공작을 화해라도 시킬 요량이겠어?”
“…….”
“그러니까 제발 좀 조심하라고. 너 보자마자 내가 보낸 세작이라고 오해할 텐데, 그 패악질은 어떻게 견디려고 그러냐.”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던 페기가 새장을 들고 일어섰다.
“갈게.”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안드레아는 결국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이며 한숨만 연거푸 쏟아 낼 뿐이었다.
밖에선 차라와 이시도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도련님을 모시고 성궁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듣자 하니 근위대가 아주 정신없이 도련님을 찾아 헤맨다고 하더군요. 더 늦었다간 사달이 나게 생겼습니다.”
정작 그리 말하는 이시도르는 작금의 상황이 꽤나 흡족한 기색이었다.
“전하께선 이 마차를 타고 가십시오. 일단 말씀하신 마샤 그 아이에게 준비하라 일러두긴 했습니다만… 정말 그 아이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더 좋은 하녀를 붙여 드릴 수 있는데요.”
“내게 필요한 건 좋은 하녀가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배신하지 않을 수족이에요.”
페기의 싸늘한 목소리에 이시도르는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을 더하지 않았다.
“마샤는 중간에 합류할 겁니다. 그 아이와 함께 북쪽 엘피도 지방으로 가십시오. 거기서 엘피도 공작 전하의 상단과 합류하여 오스터캄프로 가시면 됩니다.”
“상단?”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요 몇 년 동안 상단에 투자를 많이 하셨습니다. 라발와 탐보프 사이의 중개 무역에 손을 대시면서 상단의 몸집도 대폭 불어났지요. 합류하실 상단의 관리자는 막시모란 자인데, 성격이 좀 모나고 깐깐해서 그렇지 귀족 아가씨에게 함부로 할 위인은 아닙니다.”
“…….”
“다만, 되도록 그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마십시오.”
페기가 가만히 눈길을 주자, 이시도르가 빙긋 웃었다.
“엘피도 공작 전하의 측근입니다. 친분을 다져서 나쁠 일은 없으실 겁니다.”
“…고작 반나절 만에 거기까지 조사했을 리는 없을 테고.”
“하하. 제가 아무리 유능해도 반나절 만에 이 모든 계획을 세웠을 린 없겠죠.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계획입니다. 누굴 보내느냐가 문제였지요.”
이시도르는 품에서 비단으로 감싼 서신을 꺼냈다.
“저희 라발은 엘피도 공작 전하를 통해 탐보프의 페임하른 공작과 접촉할 계획이었습니다. 이미 엘피도 공작 전하와도 얘기가 다 끝난 상황이었지요. 그러니 전하, 부디 황제 폐하의 친서를 페임하른 공작에게 전해 주십시오.”
“이상하네요. 감히 황제의 친서를 맡길 만큼 날 신뢰할 리는 없을 텐데.”
페기는 무미건조하게 읊조리며 서신을 받아 들었다.
피아제 백작쯤 되는 권력가에게 믿고 부릴 만한 사람이 없을 리가 있나. 아무리 중하지 않은 내용이더라도 무려 황제의 친서였다. 하물며 타국의 고위 귀족에게 비밀스럽게 보내는 것인데,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하께 어찌 믿음을 논하겠습니까.”
“말장난은 그만해요. 정말 이걸 내가 가져가도 되는 건가요? 내가 읽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데.”
“그러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만, 설사 읽어 보신대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오스터캄프에 가시면 다 아시게 될 테니까요.”
이시도르는 노란 수선화가 새겨진 펜던트를 내밀었다.
“저희 가문의 상징입니다. 제 사촌들도 모두… 아마도 모두 갖고 있을 겁니다. 행여 위험에 빠지시거든 이것을 보이고 제 이름을 대십시오. 타국의 귀족을 건들면 골치 아파지니 당장의 위협에선 안전하실 수 있을 겁니다.”
“…….”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은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이시도르가 화사하게 웃었다.
“사도를 모시는 신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럼에도 저 역시 전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리면 너를 잊지 않겠노라.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페기가 조용히 물었다.
“…하나만 물을게요. 피아제 백작, 그대가 먼저 예후르에게 접촉한 건가요?”
“아닙니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먼저 제게 황제 폐하의 의향을 여쭈어보셨지요.”
페기는 더 이상 아무런 말 없이 서신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차라를 보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외면하고 있을 거야?”
괜히 먼 산을 보며 딴청을 피우던 차라가 움찔했다.
“아, 아냐….”
“이 얼굴이 그렇게 이상해?”
“이상하진 않은데… 네가 아닌 것 같아.”
차라는 그 와중에도 그녀와 제대로 눈을 마주치질 못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응시하던 페기가 옅게 웃었다.
“어떤 모습이든 나야. 그렇지?”
“으응….”
페기는 이리저리 뻗친 차라의 잿빛 머리칼을 매만지곤 마차에 올라탔다. 이시도르가 차라를 부추겨 손을 흔들게 했다. 페기는 엷게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곧 이랴! 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순식간에 멀어지고, 싸늘한 황야가 창밖을 메웠다. 페기는 창문 위로 비치는 낯선 얼굴의 여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래, 어떤 모습이든 나다.
얼굴이 달라지고 머리색이 달라지고, 하물며 그 속마저 완전히 뒤집히더라도. 머잖아 밟게 될 이국의 땅보다 더 낯설게 느껴지는 스스로를 그렇게라도 받아들여야 했다.
마차는 북쪽으로 뻗은 길을 따라 쉼 없이 달렸다. 머나먼 북방의 하늘은 한없이 흐리고 울적했다.
***
깊어진 겨울에 이제는 아침이면 마차의 창문마다 고드름이 내렸다. 상단의 하인들이 일어나 오줌을 누고 하는 일이 바로 창문의 고드름을 깨부수는 것이었다. 일찌감치 제거하지 않으면 지나다니는 사람의 발등 위로 떨어져 부상을 입히기 십상이었다.
인색하기가 여느 고리대금업자에 비할 법한 막시모가 두고 볼 일이 아니었다. 그는 창문에 고드름이 내릴 낌새라도 보이면 하인들을 불러 책망했다. 하인들은 늘어난 할 일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였으나, 갈수록 정도를 더해 가는 그의 예민함에는 혀를 내두르곤 했다.
원래도 병적으로 까다롭던 막시모가 요 근래 날 선 바늘처럼 굴기 시작한 것은 상단 일행에 느닷없이 웬 귀족 아가씨가 합류했을 때부터다.
라발의 대사가 사람을 보낼 것이란 소식을 듣긴 했으나, 당연히 머리 회전 빠른 실무진이나 수더분한 기사를 생각하던 터였다. 고작 어린 하녀 하나만을 대동한 귀족 아가씨가 나타날 줄은 그도 상상 못 했다.
“아델라이데 피아제예요.”
자신을 피아제 백작의 사촌이라 소개하던 아가씨를 떠올릴 때면 아직도 막시모는 뒷골이 빳빳하게 당기곤 했다. 그는 어린 사촌을 탐보프로 보낸 피아제 백작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탐보프의 겨울은 혹독하다. 따사로운 볕에 익숙할 남부인에겐 더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긴 여정이 익숙지 않다면 건장한 장정조차 힘에 부칠 길을 별다른 이유도 없이 연약한 귀족 아가씨에게 맡길 리 없었다.
혹 엘피도 공작에게 신붓감이라도 보내는 것인가.
생각을 거듭할수록 차라리 그쪽이 이치에 맞는 추측이었다. 그러자 막시모는 자연히 저 귀족 아가씨가 안쓰러워졌다.
엘피도 공작은 빈말로도 좋은 남편감이 아니었다. 그에게 그토록 목매던 바도비체의 아가씨가 과년한 채로 쓸쓸히 늙어 가는 것만 보아도 그러했다.
“크흠. 아가씨. 막시모입니다.”
그는 식사가 담긴 쟁반을 들고 마차 앞에서 인기척을 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귀족 아가씨의 식사를 손수 챙겼는데, 행여 모자란 하인들이 실례를 범해 윗전의 노여움을 살까 저어했기 때문이다.
고요하던 마차의 문이 곧 열렸다. 얼어붙은 땅 위로 깡충 뛰어내린 것은 얼굴에 곰보 자국이 퍼진 어린 하녀였다.
무료한 표정으로 말린 갈대를 질겅거리던 막시모가 왈칵 인상을 썼다.
“너 내 말 귓등으로도 안 듣지? 언 땅에서 그렇게 뛰다간 다리몽둥이 부러진다고 몇 번이나 말해?”
“맞다.”
배시시 웃은 마샤가 넌지시 쟁반을 살펴보았다.
“우와, 맛있겠다. 감사합니다.”
“아가씨는? 안에 안 계셔?”
“지금 탈의 중이셔요.”
“아, 탈의….”
여상하게 중얼거리던 막시모가 곧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인마, 그걸 또 그렇게 곧이곧대로 말하냐.”
“왜요?”
“됐고, 오늘 내로 오스터캄프에 도착할 거라고 전해.”
“으음, 알겠어요. 잘 먹겠습니다.”
마샤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쟁반을 들고 마차 안으로 쏙 들어갔다. 허, 하고 짧은 헛숨을 내뱉은 막시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발길을 돌렸다.
마차 안에는 추위 잘 타는 남부 아가씨를 위해 막시모가 하나둘 던져 주었던 양털 담요가 한가득 깔려 있었다. 그새 코끝이 빨갛게 언 마샤가 부산스럽게 접시를 펼치며 작게 웃었다.
“좋은 분이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