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페기가 침대 앞에 무릎 꿇고 안드레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화가 나.”
차라리 화형이라도 당했으면 이토록 화가 나진 않았을 것이다. 불을 피우지 못한 죄로 죽었으면, 내 탓으로 묻고 지나갈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내가 왜 그렇게 죽었어야 해?”
부서지고 꿰뚫리면서도 궁금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렇게 죽어야 하는지.
“그래, 살고 싶었어. 살아도 사람으로 살고, 죽어도 사람으로 죽고 싶었어. 그런데 난 뭐야? 뒷골목 쥐 새끼도 그렇게는 안 죽어. 차라리 형장에 묶여 돌팔매질 당하라면 당하지, 그렇게 죽기는 싫었단 말이야. 대체 왜.”
왜 나의 소명은 무너졌는가.
나의 꿈은, 왜.
“그거 알아? 난 이제 피아노도 못 쳐.”
“…….”
“내 인생의 절반이 그거였는데, 손이 이 지경이 되어 버렸어. 그냥 한적한 곳에서 피아노나 연주하며 살고 싶었는데 이제 못 해. 살아는 났는데 바라던 대로 살 수도 없어.”
기이하게 비틀린 오른손이 안드레아의 무릎을 기어올랐다. 그리고 잘게 떨리는 안드레아의 손등 위로 올라가 갈퀴처럼 긁기 시작했다.
“그래서 화가 나. 너무 화가 나.”
안드레아의 눈이 쩡하게 굳었다. 멀거니 그녀를 올려다보던 페기가 문득 입술을 길게 찢으며 웃었다. 때아닌 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봐. 네가 봐도 흉물스럽지? 이 상태로 어떻게 레오한테 가. 얼마나 충격받겠어.”
“…영감님이라면 다 이해할 거야.”
“아니야. 거긴 나 말고 또 있잖아.”
같은 천사의 이름을 받은 사도가 동시에 하나 이상 존재할 수는 없다.
그녀가 돌아가면 또다시 사도의 진위 논쟁이 일어나리라. 레오폴트는 또다시 선택의 순간에 놓일 것이었다.
그녀는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고 싶었다. 이미 조각난 꿈과 소명 대신, 다시 주워 모을 수 있는 것만이라도 아득바득 모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다시는 레오폴트에게서 버려질 수 없었다. 낮은 가능성일지라도 위험 요소는 모두 배제하고 싶었다.
“난 예후르를 찾아갈 거야. 가서, 날 죽이라 명한 게 누군지 실마리라도 찾아올 거야. 그리고 내가 당했던 걸 똑같이 갚아 줄 거야.”
소중한 것을 부수고 또 부수어서 짐승처럼 죽여 줄 것이다. 똑같은 고통을 맛보고, 똑같은 절망 속에 죽게 할 것이었다.
그러면 이 갈 곳 없는 분노도 조금은 풀리겠지. 지금은 모두가 밉고 내가 밉지만, 그때는 모두를 용서하고 나를 용서할 수 있겠지.
“레오는 그때 만날게. 이 분노가 사라지고 내가 원래대로 돌아오면, 그때.”
페기가 조르듯이 웃었다.
“그러니까 내 모습을 바꿔 줘.”
“…….”
“응? 나한테 미안하잖아.”
정처 없이 흔들리던 안드레아의 벽안이 끝내 도망치듯 꾹 감겼다. 깜박깜박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페기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가셨다.
비틀린 오른손이 안드레아의 손등을 세게 긁어내렸다. 다섯 가닥의 핏물이 손등 위로 점점이 번졌다.
방문이 열렸다.
푸르게 밝아 오는 새벽녘에 몇몇 동물들은 일찍 깨어나 있었다. 철창생활에 익숙한 것인지, 아니면 안드레아가 따로 경고를 해 둔 것인지 동물들은 낯선 사람들의 모습에도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침실에서 걸어 나오던 이시도르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전하, 원하는 모습이 따로 있으십니까? 만약 그런 게 아니시라면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만.”
“왠지 불길한데….”
“지나친 의심은 좋지 않습니다, 도련님.”
이시도르의 상냥한 지적에 차라는 괜히 입술만 내밀었다. 이시도르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마침 저도 페임하른 공작 측에 용건이 있습니다. 비밀리에 사람을 보낼 계획이었는데 영 마땅찮은 인물이 없더군요.”
“나를 대신 보내고 싶단 건가요?”
“전하께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겁니다. 라발의 귀족 자격으로 탐보프를 방문하실 수 있는 데다, 오스터캄프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방편을 얻으실 테니까요.”
“…….”
“전하께선 그저 가끔씩 그쪽의 동태가 어떤지 귀띔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안드레아가 그럼 그렇지, 중얼거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페기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이시도르가 흡족한 기색으로 복도로 나가 호위 기사에게 두꺼운 명부를 받아 왔다. 안에는 간단한 초상화와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다.
“저희 가문의 증표를 드릴 테니 제 사촌으로 위장하십시오. 그럼 행여 중간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목숨을 구명하실 수 있을 겁니다.”
“피아제 백작가면 라발의 명문가인데, 없던 사촌이 불쑥 솟아났다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어요?”
“아니요, 도련님. 저희 가문이라면 가능합니다.”
이시도르가 명부를 뒤적여 계보를 펼쳤다.
“이모님만 아홉 분에 사촌만 총 마흔아홉 명입니다. 저도 종종 헷갈려서 명부를 늘 지니고 다니지요.”
“맙소사….”
차라가 경악한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시도르는 어쩐지 뿌듯해하는 기색으로 종이를 넘겼다.
“전하께선 일곱째 이모님의 따님으로 위장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싯적 호위 기사와 눈이 맞아 사랑의 도피를 하신 분이지요. 남편이 죽고 생계가 막막해지자 여섯 아이들을 데리고 가문으로 돌아오셨는데, 저희 어머니께서 화가 많이 나셨는지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 버리고 이모님은 수도원에 가둬 버리셨습니다. 잘 살고 계실지 모르겠네요….”
“…….”
“아, 이분이십니다.”
이시도르가 명부에 그려진 초상화를 내밀었다. 적갈색 머리칼과 푸른 눈을 가진, 활발한 인상의 아가씨였다.
명부를 받아 든 안드레아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그럼 이대로 하면 되는 거지?”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자, 안드레아는 돼지를 몰듯 차라와 이시도르를 문밖으로 훠이훠이 내쫓았다. 두 사람이 얼결에 복도로 나가자 그녀는 곧장 문을 닫아걸었다. 차라와 이시도르가 당혹하여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 안드레아?”
“전하!”
쿵!
안드레아가 문을 세게 걷어차자 단박에 조용해졌다.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곤 저벅저벅 방 안쪽으로 들어와 철창에 갇힌 수탉을 꺼냈다. 목이 잡히기 무섭게 꽥꽥 울던 닭은 그녀의 속삭임 한마디에 얌전해졌다.
“비켜.”
짧게 명령한 안드레아가 바닥에 깔려 있던 카펫을 발로 둘둘 말기 시작했다. 구석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기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드러나는 바닥에는 피로 그린 기하학적 그림이 가득했다.
그러나 캐물을 틈도 없이, 안드레아가 단검을 꺼내 닭의 목을 그었다. 그녀는 우수수 떨어지는 핏물을 손에 받아 바닥에 이상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덟 개의 직선이 만나 완성되는 것.
팔각성이었다.
그림을 완성한 안드레아가 무릎 위에 피 묻은 손을 올려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짐작하겠지만, 이걸론 그 새끼 눈 못 속여. 알잖냐. 그 새끼 눈 하난 귀신같은 거.”
피 묻지 않은 손으로 고단하게 얼굴을 쓸어내린 안드레아가 주저하듯 페기를 돌아보았다.
“보자마자 내 솜씨란 걸 알 거야. 그래도 괜찮아?”
“상관없어. 그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무미건조한 페기의 말에 안드레아도 더는 말리지 못했다. 안드레아는 주저앉은 몸을 일으키며 팔각성의 중앙을 손짓했다.
“저기 가서 앉아.”
페기가 착석하자 안드레아는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몹시 진지했다.
“이게 사술인 이유는 단순히 동물을 제물로 바치기 때문이 아니야.”
“…….”
“가능하다면 지금부터 보는 건 깨끗이 잊어.”
조용히 속삭인 안드레아가 벌떡 일어나 팔각성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바닥에서 잘게 경련하는 수탉을 들어 단번에 목을 비틀었다. 비명도 없이 축 늘어진 수탉의 깃털 사이로 그녀의 흰 손이 움푹 들어갔다.
기괴한 장면이었다. 고작해야 호박만 한 수탉의 안으로 그녀의 손이 끊임없이 기어들어 갔다. 손등, 손목, 심지어는 팔꿈치까지. 무언가를 찾듯 수탉의 안을 마구잡이로 헤집으며 깊숙이,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그리고 서서히 그녀의 팔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핏물은커녕 하얗고 깨끗한 그녀의 손끝에는 순백의 불꽃이 오롯하게 피어올라 있었다.
“불은 생명을 창조했지.”
“…….”
“불이 곧 생명이고.”
안드레아가 피식 웃으며 손을 내뻗었다.
“삼켜.”
페기는 얌전히 불을 받아먹었다. 아무런 맛도,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드레아는 피 묻은 손으로 페기의 얼굴에 피 칠갑을 했다.
“고대어 기억하지?”
페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레아가 팔각성을 짚으며 속삭였다. 따라 해.
[나는 거역한다.]
[나는 거역한다.]
사위는 고요했다. 바람은 저물었고,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바닥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마치 발아래 무저갱의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무서운 추락이었다. 사방에서 돌풍이 몰아치고 찬 공기가 솟구쳤다. 정신없이 휘날리는 짧은 머리칼 사이로, 페기는 무겁게 떠오르는 팔각성을 보았다.
검붉은 핏물이 춤추듯 느리게 허공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직선이 교차하는 부분마다 마치 사슬처럼 쇳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하나로 이어진 여덟 개의 직선이 아래위로 퍼지며 그녀의 몸을 칭칭 휘감았다.
추락이 멈췄다.
암흑의 세계. 느껴지는 것은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뿐.
[…줘.]
[…려 줘.]
[살려 줘.]
스산한 숨결이 뺨에 와 닿았다.
[날 살려 줘.]
페기는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의 추락은 꿈이었단 것처럼 모든 것이 원래 그대로였다. 페기는 멍하니 안드레아의 바짓단을 잡았다.
“방금 그거, 뭐야?”
“…….”
“아니지?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그런 뼛골 시린 냉기를 그녀는 느껴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마귀의 숨결이었다.
“말했잖아. 괜히 사술이겠냐고.”
안드레아는 신발을 털며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잊어.”
그녀의 발걸음이 멀어졌다. 페기는 쓰러지듯 간신히 바닥을 짚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 와중에 얼굴 양옆으로 긴 머리칼이 쏟아졌다. 적갈색이었다.
문이 열리며 차라와 이시도르가 들어왔다.
페기는 멀거니 그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경악이 제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여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