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세 사람이 멈칫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시도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설마 엘피도 공작 전하를 의심하고 계십니까?”
“네.”
어리둥절 이시도르와 시선을 주고받은 차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안 돼! 어디서 그런 농담이야!”
하지만 창밖을 응시하는 페기의 옆얼굴은 변함없이 싸늘했다. 차라의 웃음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그는 얼이 빠진 얼굴로 멍하니 페기를 응시했다.
“진짜?”
“…….”
“농담이 아니라 진짜? 예후르가 널 죽였다고?”
페기는 부정하지 않았다. 말문이 막힌 차라는 그저 망연자실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간 예후르에 대한 정보를 집착적으로 긁어모았던 이시도르마저 지금 이 상황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느릿느릿 눈두덩을 문지르던 안드레아가 말을 꺼냈다.
“네가 예후르 그 새끼를 의심할 정도면 꽤 그럴듯한 증거가 있겠지.”
“…….”
“하지만 걘 아니야.”
안드레아는 왈칵 미간을 찌푸렸다. 그를 입에 담는 것조차 내키지 않는다는 듯.
“네가 무슨 이유로 걔를 의심하는 건진 모르겠다만, 지금 그 새끼가 어떻게 변해 있는지 안다면 너도 의심을 접게 될 거다. 그 새낀 미쳤어. 너… 그렇게 된 이후로 사람이 완전히 돌아 버렸다고.”
“아, 안드레아도 이렇게 말하잖아. 둘이 얼마나 사이 나쁜지는 기억하지? 그런 안드레아도 이렇게 말할 정도라니까?”
차라도 용기 내어 말을 보탰지만 페기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시도르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차라리 전하를 살해한 칼잡이에게서 자백을 받아 내는 건 어떻습니까? 뒷조사를 해서 배후의 범위를 좁힐 수도 있고요. 칼잡이는 누군지 안다고 하셨잖습니까.”
“맞아! 그러면 되겠네! 누구야? 우리도 아는 사람이야?”
차라가 채근했다. 창밖에서 시선을 떼어 내며 페기가 속삭이듯 말했다.
“마르코스 본시오.”
“…근위대의 그 마르코스 본시오?”
“그럼 근위대 부단장….”
멍하니 중얼거리던 이시도르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차라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졌기 때문이다.
“그 말라깽이가!”
“그만.”
벌떡 일어서는 차라를 페기가 엄중한 눈빛으로 말렸다. 차라가 노여움을 꾹 눌러 참으며 앉자, 이시도르가 한층 심각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마르코스 본시오라면 일이 좀 어렵게 됐습니다. 워낙 줄 대 놓은 곳이 많아 누가 전하의 죽음을 의뢰했는지 구분하긴 힘들 겁니다.”
“그럼 잡아 와서 자백을 받아 내요!”
“도련님…. 일단 근위대 부단장을 잡아 오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고, 무엇보다 그자의 자백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수없이 주인을 갈아 치운 사냥갭니다. 아시잖아요, 지금은 그가 누굴 따르고 있는지.”
차라가 갑갑한 얼굴로 입술만 깨물었다. 마르코스 본시오는 현재 비올라의 충실한 개로, 단장인 왈테르보다도 더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거짓말에 능하고 양심의 가책 따위 느끼지 않는 잡니다. 아마도 전하의 죽음뿐만 아니라 많은 추잡스러운 일들에 관여했겠지요. 섣불리 건드렸다간 도리어 이쪽이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럼 다른 수가 없는 거네요.”
차라가 불안한 기색으로 페기를 힐끗거렸다. 그는 여전히 예후르가 페기를 죽인 배후란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페기의 죽음으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페기가 담담히 말했다.
“나도 확신하는 건 아니야.”
그녀에게 주어진 단서는 고작해야 반지 하나.
그녀가 기억하는 예후르라면 소중히 여겼으리라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었다. 잃어버렸을 수도 있고, 도둑질을 당했을 수도 있었다. 경우의 수는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내게 남은 게 그것밖에 없어.”
마르코스 본시오는 지독한 고문 속에서도 능히 거짓을 말할 위인이다. 결국 그녀는 반지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예후르가 그녀를 죽인 배후인지, 아닌지. 잃어버렸다면 어디서 잃어버렸고, 도둑질을 당했다면 누가 도둑인지.
“확인은 해 봐야 하잖아.”
페기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차라는 마치 낯선 사람을 보듯 먼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페기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죽음은 그녀에게서 믿음을 앗아 갔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도 믿지 못했다.
“…좋아. 네 마음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폭포수 같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안드레아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는 왜 찾아온 건데. 난 그 새끼한테 관심 없어. 마지막으로 얼굴 본 것도 언젠지 까마득하고.”
“모습을 바꾸고 싶어. 날 죽인 게 예후르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기 전까진 내가 나라는 걸 들키면 안 되니까.”
“잠깐. 너 예후르한테 가겠다는 거야, 지금?”
차라의 물음에 페기는 그저 빤한 눈길만 보냈다. 상상도 못 했다는 듯 이시도르가 고개를 내둘렀다.
“전하. 혹시나 해서 여쭤봅니다만,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지금 어디 계신지는 기억하시지요?”
“내가 살아났다는 게 알려지면 안 되고, 그를 확인은 해 봐야 하는데 그럼 내가 가야죠.”
페기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헛웃음을 머금은 안드레아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탐보프에 가시겠다고…. 그래, 그것도 일단 그렇다 치자. 근데 나한테 변장이라도 시켜 달라는 거야, 뭐야. 분장술을 배우고 싶으면 다른 데 알아봐.”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전혀 모르겠는데.”
“내 입으로 말할까?”
실실 웃던 안드레아의 입꼬리가 굳었다. 페기는 평온한 얼굴로 송곳 같은 그녀의 시선을 받아 냈다.
“차라, 이시도르. 잠깐 자리 좀 비켜 줘요.”
“아니, 그냥 말해.”
“후회하지 않겠어?”
“씨발, 그냥 말하라고! 네가 뭘 알고 있는지!”
벼락같은 노성에 문밖에서 개가 컹컹 짖었다. 안드레아는 살벌하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서 어쩐지 초조한 기색이 묻어났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인 페기가 선선히 말했다.
“너 사술을 부리잖아.”
사술.
차라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시도르는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오직 안드레아만이 틀어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당혹과 분노가 뒤섞여 본인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했다.
페기는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안드레아와 예후르가 처음부터 앙숙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분명 좋은 시절이 있었다. 둘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안드레아가 이상한 술법에 탐닉하면서부터였다.
“사술이 뭐야?”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걸로 모습을 바꿀 수 있다는 것만 알지.”
“모습을 바꿔? 어떻게?”
페기는 그저 주먹만 파들파들 떠는 안드레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단순한 어린 시절의 불장난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갑갑한 성궁의 탈출구라 여겼을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든 그 당시의 안드레아에겐 큰 고민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예후르의 반응에 더 놀라고, 더 엇나가기 시작한 것이리라.
“질서를 거스르는 사도는 더 이상 사도가 아니다.”
“…….”
“그것은 버러지다.”
페기가 살짝 웃었다.
“그때 예후르가 그랬지, 아마?”
안드레아가 까득, 이를 갈며 고개를 들었다. 커튼처럼 드리워진 붉은 머리칼 사이로 시퍼런 안광이 형형했다.
“그딴 말이나 하려고 온 거냐?”
“말했잖아. 내 모습을 바꿔 달라고. 난 네가 사술을 쓰든 다른 이상한 술법을 쓰든 신경 안 써. 만약 그랬으면 널 진작 종교 재판에 회부했겠지.”
기실 페기는 예후르가 말하는 질서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나름대로 사도에 관한 옛 문헌들을 뒤져 보았지만, 30년 전 오스피나 참극으로 유실된 자료가 너무 많았다. 실상 현시대의 사도들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안드레아는 한동안 침묵했다. 긴 머리칼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얼굴을 쓸고 문지르기만 했다. 노여움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얼굴은 여든 먹은 노인처럼 고단해 보였다.
“나도 그 새끼가 말하는 질서가 뭔지는 몰라. 뭔진 몰라도 개 같은 거겠지.”
그녀는 다시 입을 닫아걸며 한참을 망설였다. 저토록 주저하는 안드레아는 페기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난 괜찮았어. 난 나를 망치고 싶었던 거니까. 그 새끼가 지적하던 무질서와 반란 속에서 비로소 내가 살아 있음을 느꼈으니까.”
“…….”
“그런데 넌 아니잖아.”
안드레아는 착잡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 죽어도 하기 싫었는데, 보통은 그 새끼 말이 맞아. 일반적인 시선을 봤을 때 내가 뭔가 무진장 잘못했겠지. 솔직히 나도 살자고 하는 짓이지만 가끔은 좀 아니다 싶기도 해. 씨발, 나도 그 새끼가 내 뒤에 사람 붙이지만 않았어도 이러고 다니진 않았을 거야.”
“…….”
“그러니까 너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 머리 좀 굴려 보면 다른 수가 나오겠지. 나야 이미 이 모양 이 꼴이라지만, 넌 겨우 되살아난 거잖아. 괜히 잘못되면 어떡하냐. 애당초 탐보프…. 거기가 어디라고 간다는 거야.”
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안드레아는 울렁거리는 목구멍을 애써 짓누르며 어떻게든 담담히 말하려고 애썼다.
“그냥 영감님한테 가. 설마 무덤에서 돌아온 딸을 내쫓기라도 할까. 영감님 그런 사람 아니란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때 그건, 내가 한 거야. 폭도들이 날뛰다가 영감님까지 다칠까 봐, 그게 무서워서 내가 윽박질렀다고. 그러니까 차라리 날 원망해. 씨발, 그 먼 데까지 가서, 눈 돌아가 버린 새끼랑 뭘 어떻게 한다는 건데.”
안드레아는 후들거리는 양손을 꽉 모아 쥐며 이마 아래 받쳤다.
차라리 저 얼굴 그대로 간다면 안심이라도 됐을 것이다. 애당초 속일 수도 없는 눈을 속이려 들었을 때, 그 미친놈이 어떻게 반응할진 그녀도 예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페기는 어둑해진 눈으로 속삭일 뿐이었다.
“이해를 못 하는구나.”
“아니,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이해해. 너 그렇게 될 때 우리를 얼마나 원망했겠냐. 무슨 말을 해도 네게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거 잘 알아. 그런데 너 스스로를 생각해서라도 마음을 바꿔야 해. 우리 그냥 쉬운 길로 가자. 영감님께 가서 예후르를 부르자. 만에 하나 그 새끼가 진짜 널 죽인 범인이라 해도, 설마 우리가 시퍼렇게 보고 있는 와중에 일을 저지를까.”
“이해를 못 하네.”
페기가 지겹다는 듯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드레아. 나는 너와 레오를 이해해.”
“…뭐?”
“어째서 나를 버릴 수밖에 없었는지, 무슨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을지 이해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