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으응.”
조금 당황한 듯이 고개를 돌린 차라가 다시 슬금슬금 그녀를 훔쳐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이시도르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오랜만에 만난 누이가 그리도 예쁘십니까?”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니에요!”
“…….”
“아, 안 예쁘단 건 아니고….”
차라가 웅얼거리며 괜스레 페기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긴 한 건지, 페기는 여전히 무심한 낯이었다.
“그냥, 옛날엔 내가 올려다봤으니까….”
차라는 성장이 늦었다. 열여덟 살이 된 지금도 기사들 사이에선 여전히 꼬맹이였지만, 페기를 슬쩍 내려다볼 정도는 되었다. 이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 없는 페기를 그리 내려다보자니 기분이 영 이상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페기는 차라가 자신을 내려다보건 말건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차라는 왠지 서운해졌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꼭 어제도 봤던 사람처럼 굴잖아.”
페기는 그제야 힐끗 눈길을 주었다.
“너 옛날이랑 똑같아.”
확실히 키가 크고 얼굴선이 또렷해졌지만, 어릴 적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페기는 차라가 크면 저런 얼굴이 되겠거니 늘 생각해 왔다.
차라가 눈만 끔벅이는 사이, 페기는 무심히 앞서 나갔다. 귀엽다는 듯 이시도르도 픽 웃으며 뒷짐을 지고 걸었다. 차라는 후드를 깊숙이 내려 붉어진 뺨을 감추었다.
그들은 곧 허름한 술집에 이르렀다. 낡아 빠진 나무 바닥은 쉼 없이 삐걱거리고, 촛대엔 다 녹아 가는 앉은뱅이 양초만 남아 불을 밝히는 곳이었다.
그들은 테이블 사이를 뛰어다니며 춤추고 노래 부르는 주정뱅이들을 피해 겨우 구석 자리를 차지했다. 넌지시 주위를 둘러본 이시도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말씀하신 대로 여기가 제일 이른 시간에 여는 술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곳을 찾으셨는지요?”
“안드레아가 있을 만한 곳이 달리 없으니까요.”
“하긴.”
차라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안드레아는 대낮부터 새벽까지 술 퍼마시는 게 유일한 일과인 사람이었다.
이시도르가 고개를 숙여 더욱 나직이 속삭였다.
“호위대가 술집 밖에도 잠복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얼굴은 최대한 감추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대답할 틈도 없이 종업원이 끼어들었다. 이시도르가 종업원과 유쾌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주문을 하는 동안, 페기는 뻐근한 눈을 문질렀다. 주정뱅이들의 노랫소리로 술집은 아주 시끄러웠다.
그때, 어디선가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페기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벌겋게 달아올라 술을 퍼마시는 장정들 사이로, 처음 보는 검은 머리의 남자가 유령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그와 시선을 마주하던 페기가 문득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곤 피식, 소리 없이 웃으며 다시 눈을 들었다.
남자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기, 페기.”
불현듯 차라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페기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왜?”
“아니, 뭐 먹고 싶은 거 있냐고.”
페기는 고개를 저으며 슬쩍 눈을 굴려 남자가 있던 곳을 보았다.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럼 그냥 내가 먹고 싶은 거로… 페기!”
누군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벌떡 일어난 차라가 사색이 된 얼굴로 무어라 외쳤지만, 주정뱅이들의 노랫소리에 가려 들리지 않았다. 페기는 질질 끌려가면서도, 눈앞에서 출렁이는 붉은 머리칼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안드레아는 그녀를 끌고 술집을 빠져나왔다. 순식간에 노랫소리가 멀어지고 야밤의 적막함이 밀려들었다. 페기의 팔을 아프게 틀어쥔 안드레아는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가 곧장 그녀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담벼락에 등을 박은 페기가 인상을 썼다. 억센 손이 쥐어짤 듯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너 뭐야.”
“…….”
“뭔데 그 낯짝을 하고 있어.”
별 뜨지 않은 밤하늘 아래, 시퍼런 안광이 형형했다. 페기가 막 입술을 떼려 하자, 안드레아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아냐, 아니야. 그냥 입 닥치고 있어. 네 정체가 뭐든, 죽으면 다 고깃덩이잖아. 안 그래?”
스르릉, 그녀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혔다. 무어라 대꾸할 틈도 없이 페기의 목 앞으로 칼날이 드리워졌다. 동시에 사방에서 호위대가 튀어나와 안드레아에게 검을 겨누었다.
눈만 굴려 상황을 파악한 안드레아가 실실 비소를 흘렸다.
“이건 또 뭐야. 너네 다 뒈지고 싶어서 지랄 났냐?”
“안드레아.”
“씨발, 닥치라고!”
안드레아의 노성이 터졌다. 페기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안드레아는 잔뜩 약이 오른 맹수처럼 위험해 보였다.
헐레벌떡 달려온 차라가 기겁하며 안드레아의 팔에 매달렸다.
“너 뭐야! 미쳤어?! 지금 누구한테 검을 겨누는 거야!”
“…차라? 네가 왜 여기에….”
아연한 얼굴로 그와 페기를 번갈아 본 안드레아가 인상을 구겼다.
“하다 하다 이젠 저딴 거에 홀려?! 이럴 거면 그냥 성궁에 처박혀 있던가!”
“홀리긴 누가 홀렸다고 그래! 너나 눈 똑바로 떠! 페기잖아!”
“너 돌았냐? 걔 땅에 묻던 거 기억 안 나? 죽은 애가 어떻게 저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다녀!”
안드레아가 악을 쓰듯 외쳤다. 지그시 눈을 감고 찌푸린 미간을 매만지던 페기가 제 앞을 가로막은 차라를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 제 발로 안드레아의 검 앞에 섰다.
“죽여.”
검 끝이 움찔 떨렸다.
“이 미친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죽여 보라고. 한 번도 죽어 봤는데 두 번이 어려울까.”
페기가 사납게 눈을 치떴다. 주저 없이 한 발짝 앞으로 나오자, 검 끝에 여린 피부가 베이며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안드레아가 시퍼레진 얼굴로 물러섰다. 페기가 이죽거렸다.
“왜, 못 하겠어? 그땐 잘만 말했잖아. 죽으라고. 죽어 버리라고.”
불에 덴 듯 놀란 안드레아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경악과 혼란으로 가득한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때, 이시도르가 느긋하게 뒷짐 지고 나타났다.
“마가 공작 전하. 혼란스러우실 줄은 압니다만, 그분은 3년 전 돌아가셨던 카타리나 공작 전하가 맞습니다.”
그의 눈짓에 안드레아를 경계하던 호위대가 페기를 보호하듯 둥글게 에워쌌다.
“며칠 전 천사께서 제 꿈에 나타나 이르시길, 죄인을 벌하여 올바른 사도를 구하라.”
“…….”
“그리고 되살아나신 카타리나 공작 전하와 운명적으로 조우했지요.”
이시도르는 마치 무대에 선 연극 배우처럼 과장된 손짓을 했다. 그러자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안드레아가 그의 말을 곱씹듯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곤 문득 고개를 들어 페기를 보았다.
“그래, 죄인.”
“…….”
“저기 있네.”
차라의 낯이 얼어붙었다. 안드레아는 지팡이처럼 짚고 있던 검을 들어 페기를 가리켰다.
“죄인이잖아, 저게. 다들 잊었어? 성화가 꺼졌어. 저건 성화를 다시 피우지도 못했고. 올바른 사도를 지키려면 성궁으로 가야지, 왜 애먼 년을 감싸고돌아.”
“안드레아!”
비명처럼 치솟는 차라의 목소리를 헤치며 페기가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누구도 말릴 틈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하얀 불씨가 튀어 올랐다.
안드레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페기는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제 만족해?”
안드레아의 손에서 스르르 검이 흘러내렸다. 날붙이가 땅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휘청거리다 간신히 벽을 짚은 안드레아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난….”
페기를 응시하던 벽안이 곧 초점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한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들어와.”
안드레아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던 차라가 움찔하며 코를 틀어막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냄새야?”
안드레아는 대꾸 없이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신선한 밤공기가 들어왔지만 방 안에 밴 잡내는 가시질 않았다.
이시도르 역시 과히 좋지 않은 표정으로 호위 기사를 시켜 초에 불을 붙였다. 동그란 불빛 아래 드러난 방 안의 광경은 빈말로도 좋지 못했다.
차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맙소사….”
방 안에는 동물 여러 마리가 철창에 갇혀 있었다. 대부분이 닭이고, 고양이나 개도 있었다.
“그것들 깨면 시끄러우니까 이리로 들어와.”
안드레아가 문을 열며 고갯짓했다. 차라와 이시도르는 불편한 표정을 갈무리하며 그녀를 따라갔다. 마지막으로 페기는 괴이한 방 안의 광경을 다시 한번 눈에 담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도 옆방에는 침대와 탁자가 하나씩 평범하게 놓여 있었다. 안드레아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자, 이시도르가 얼른 먼지투성이 의자에 손수건을 펴고 페기와 차라를 앉혔다. 그 수선에 안드레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근데 넌 뭐냐?”
“아, 인사를 못 드렸군요. 결례했습니다. 저는 라발의 대사직을 맡고 있는 피아제 백작, 이시도르입니다.”
우아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이시도르가 안드레아의 손등을 잡고 살짝 입술을 맞추었다. 어린애 재롱 보듯 하던 안드레아가 불현듯 손을 뒤집어 그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고운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피아제 백작이면 글리체리아 할망구랑 친척이겠네?”
“저희 셋째 이모님이십니다.”
“하나도 안 닮았는데?”
“제가 아버지를 닮았다 보니.”
이시도르는 턱이 잡힌 채로도 잘만 웃었다. 안드레아는 흥미가 가신 얼굴로 그의 턱을 놓았다. 제자리로 돌아간 이시도르는 겉옷을 의자에 깔고 앉았다.
대화가 끊긴 사위는 고요했다. 안드레아와 페기는 마치 서로의 존재를 무시하듯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공연히 차라만 슬금슬금 둘의 눈치를 보았다.
오래지 않아 안드레아가 말문을 열었다.
“난 왜 보러 왔냐.”
그녀는 발치를 내려다보며 신발 뒷굽으로 툭, 낡은 침대 기둥을 두드렸다.
“되살아났으면 성도로 갔어야지, 여길 오긴 왜 와.”
페기는 대답이 없었다. 차라가 눈치껏 입을 열었다.
“3년 전 페기를 죽인 자들의 배후를 찾고 있어. 아무것도 밝히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간, 똑같은 일을 다시 겪을지도 모르니까.”
“난 아니다.”
“누가 너래?”
울컥한 차라가 씩씩거리며 화를 가라앉혔다. 어두운 창밖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페기가 불현듯 입술을 열었다.
“예후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