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거 뭐요. 어떻게 되살아났는지? 백작은 알아요?”
“당연히 저도 모르죠. 그저 막연하게 천사께서 내리신 기적이리라 생각할 뿐.”
이시도르는 꿈에서 천사의 전언을 들은 것과, 후미진 곳에서 페기를 발견했던 것을 간추려 설명했다. 차라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에겐 되살아난 페기가 중요하지, 페기가 되살아난 이유 같은 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하께서 꼭 도련님을 가장 먼저 만나야겠다고 하시더군요. 기뻐하셔도 좋습니다.”
“나를?”
차라가 당황한 듯이 눈을 깜박였다. 이시도르는 의아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전하를 버리지 않은 유일한 분이시라던데요?”
“내가?”
“아닙니까?”
“아니, 내가 끝까지 페기를 포기하지 않은 것은 맞는데…. 난 네가 되살아나면 당연히 예후르를 먼저 찾아갈 줄 알았어.”
차라의 얼굴엔 혼란이 가득했다. 페기와 빠르게 가까워졌다곤 하나, 그녀가 다른 가족들과 오래도록 쌓았던 유대감엔 비할 바가 못 된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녀에게 예후르는 특별한 존재였다.
“지금은 멀리 있긴 하지만 네가 살아 있단 소식을 들으면 당장에 용을 끌고 돌아올 텐데 왜….”
기실 예후르뿐만이 아니었다. 레오폴트도, 안드레아도. 한때나마 그녀를 버리려 했던 스스로를 오랫동안 자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차라는 깨달았다. 페기는 이미 한 번 죽었던 사람이다. 그조차 그녀를 버리려 했던 둘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녀라고 용서가 쉬울 리 없었다.
“난 내가 되살아났단 사실을 당분간 비밀로 하고 싶어. 다시 그렇게 죽을 순 없으니까.”
페기는 서늘하게 눈을 내리떴다.
그러기 위해선 누가 날 죽이려 들었는지, 반드시 알아내야만 한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만나 도움을 받는다면, 너여야만 했어. 넌 마지막까지 날 버리지 않은 사람이니까.”
그 말에 차라는 더 이상 예후르에 대해 묻지 못했다. 가만히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좀 부끄럽지만 난 딱히 연줄도 없고 믿고 부릴 만한 사람도 없어.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열심히 사는 거였는데….”
“괜찮아. 내가 바라는 건 너밖에 해 주지 못하는 거니까.”
“나밖에?”
“안드레아.”
“…….”
“지금 어디 있어?”
차라의 입이 덜컥 다물렸다. 암녹색 눈을 불안하게 깜박이던 그가 어렵사리 물었다.
“안드레아는 이미 널 한 번 버렸잖아. 괜찮겠어?”
“괜찮지 않아. 하지만 그녀가 필요해.”
“…….”
“그리고 안드레아라면 살아 돌아온 나를 외면하지 못할 거야.”
페기가 가만가만 읊조리듯 말했다. 그녀의 생각을 알 순 없지만 차라는 처음부터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시도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모조로 가요. 안드레아는 거기 있으니까.”
3년 전, 페기가 죽은 뒤로 안드레아는 성궁을 찾지 않았다. 대신 발신인 불명의 편지가 종종 그의 앞으로 도착했는데, 필체나 내용이 누가 보더라도 안드레아였다. 차라는 답장하지 않았으나 편지는 끊길 듯 끊이지 않았다.
“지난주에 왔던 편지가 모조에서 보낸 것이더라고. 도시를 옮길 때마다 편지를 보내는 것 같으니, 아마 아직도 거기 있을 거야.”
차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안드레아는 몇 번 보지도 못한 저를 걱정해서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왔다. 그녀가 제게 누굴 투영하는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어떻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다들 널 보면 좋아할 거야.”
페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 돌려 창밖을 응시하는 그녀의 서늘한 옆모습을 훔쳐보며 차라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꿀꺽 집어삼켰다.
***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납치?”
비올라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왈테르가 얼어붙은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차, 차라 도련님의 호위대가 부상 입은 상태로 귀환했습니다. 헤르타 숲의 별궁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정체 모를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다고….”
“그래서 차라 걔는 지금 어디 있는지 몰라요?”
“수색대를 급히 파견했습니다. 일단 연락을 기다려 보시지요.”
“허.”
비올라가 의자를 거칠게 밀며 일어섰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어디 먼 데 가던 것도 아니고, 고작 반나절 걸리는 시골길에서 납치? 근위대 실력이 고작 그것밖에 안 돼요?”
“죄, 죄송합니다.”
“이보세요, 근위 대장. 맨날 하는 그 죄송하다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다시는 안 일어나도록 그 멍청한 기사들 단속 좀 잘하라고요! 이게 도대체 몇 번째야!”
검지로 쿵쿵 책상을 찧던 비올라가 끝내 언성을 높였다. 왈테르는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더욱 속이 갑갑해진 비올라가 손부채질하며 열을 식혔다.
그러자 뒤에서 넌지시 상황을 지켜보던 본시오가 나섰다.
“전하. 이번 일은 단순한 도적단의 소행은 아닐 겁니다.”
계속 말해 보라는 듯 비올라가 눈길을 주었다. 본시오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만일 인신매매단이었다면 시종들을 버려둔 채 도련님만 납치했을 리 없고, 몸값을 노리는 강도였다면 원하는 값을 호위대 편에 남겨 두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호위대는 전부 살려 보내기까지 했죠.”
“차라가 누군지 아는 자의 소행이란 건가요?”
“네.”
차라의 정체를 모르는 평범한 도적단이었다면, 최대한 추적을 늦추기 위해 모든 호위대를 죽였을 것이다. 굳이 신경 써서 살려 보낸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십중팔구 이는 차라 도련님의 정체를 알면서, 최대한 교국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일당의 소행입니다. 모종의 이유로 도련님이 필요는 하지만, 가능한 한 일을 크게 비화시키지 않은 채 적당히 무마하려는 심산이겠지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본시오가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빙글 뒤돌아선 비올라가 화창한 창밖을 노려보며 말했다.
“수색은 조용히 진행해요. 괜한 분란 일으키고 싶지 않으면.”
“알겠습니다.”
“나가 봐요.”
본시오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를 따라 힘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왈테르는 문 앞에서 별안간 모드벤나와 부딪힐 뻔했다. 모드벤나는 경황없이 고개만 숙여 보이곤, 비올라의 집무실로 쏙 들어갔다.
“전하!”
비올라가 눈썹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모드벤나가 경황없이 외쳤다.
“전하, 트리니테의 공동묘지가 모두 불탔다고 합니다!”
“…공동묘지?”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묻히신 곳 말입니다!”
의아하게 모드벤나를 돌아보았던 왈테르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비올라는 한숨을 내쉬며 짜증스럽게 하녀에게 손짓했다. 하녀는 곧바로 문을 닫았다.
“카타리나 공작… 공동묘지….”
나지막이 중얼거린 비올라가 고상하게 책상에 앉았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에요?”
“…네?”
“난 또, 모드벤나 수도사가 하도 바쁘게 달려오길래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줄 알았잖아요. 공동묘지가 불탔으면 수습을 하면 될 일이지,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고 나한테까지 보고를 해요?”
모드벤나의 표정이 망연자실하게 물들었다.
“하지만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선….”
“일단은 그 호칭부터 어떻게 좀 하죠. 죄인이잖아요, 그 여자. 화형이 언도되었던 죄인을 어째서 아직도 카타리나 공작이라 부르는 거죠?”
“공식적으로 그분의 작위가 거두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그럼 관련 서류 가져와요. 내가 처리할 테니까.”
“전하.”
모드벤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교황 성하께… 알리셔야 합니다.”
비올라가 찬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내가 알아서 해요.”
“행여 성하께서 나중에 아시기라도 하면, 그 진노를 어찌 감당하려 하십니까.”
“그 진노가 설마 나를 향하겠어요?”
모드벤나는 그만 말문이 턱 막혔다. 비올라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비죽 웃었다.
“성하께선 늘 작은 일에 슬퍼하고 분노하시죠. 하지만 괜찮아요. 내가 그분의 슬픔을 어루만지고 분노를 잠재우면 되니까.”
“…….”
“그러니 당신도 눈치껏 모르는 척해요. 좋은 일이잖아요. 타락한 죄인의 몸이 불타 뼛가루만 남았으니, 거름이 되어 땅을 비옥하게 만들겠죠. 사실상 그 여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 행한 유일하게 좋은 일 아닌가?”
모드벤나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비웃듯 그녀를 쏘아본 비올라가 싸늘하게 말했다.
“더 할 말 없으면 그만 나가요. 이런 쓸데없는 일까지 보고하지 말고.”
남은 말을 꾸역꾸역 목구멍 너머로 삼킨 모드벤나가 천천히 인사하고 나갔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비올라가 꽃병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유리가 사방으로 튀었다. 핏발 선 눈으로 깨진 조각을 노려보던 비올라가 느리게 숨을 몰아쉬며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카니나의 페기.
비올라는 그 여자가 싫었다. 밖에선 모두가 저를 두고 타락했던 사도의 자리를 정화하는 하늘의 선물이라 일컫지만, 실상은 달랐다. 사도가 된 지 벌써 1년이 넘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그 여자의 대체품에 불과했다.
도대체 내가 뭐가 부족하다고.
고작해야 카니나에서 난 부모도 모르는 계집애. 일평생 내전에서 호의호식하다가 천사의 미움을 받아 개죽음당한 게 전부인데, 아직도 그 여자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물며 사도의 으뜸이라는 자마저 그러했다.
“네게 알비야 공작의 작위를 주마.”
그녀에게 카타리나 공작이 아닌 알비야 공작의 작위가 내려졌을 때, 사람들은 교황이 귀한 딸에게 죄인의 허물이 묻지 않도록 배려함이라 생각했다. 진심으로 비올라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란 것을 알아 더욱 비참해질 뿐이었다.
“…난 누구를 대신하기 위해 온 게 아니야.”
비올라는 기도하듯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부질없는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아니었다.
멀리 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했다. 늘 믿고 따르는 언니를 생각했다. 입궁하며 새긴 야망을 생각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유리 조각과 축 늘어진 꽃들을 무참히 짓밟고 나갔다.
언제까지고 누군가의 대체품으로 남을 생각은 없었다. 결국 역사 속에 남을 이름은 저일지니, 죽은 자의 이름은 영영 교회의 치욕 속에 묻힐 것이었다.
***
심연의 천사 이슬라가 입김을 불어 별빛을 꺼트린 밤이었다.
별 뜨지 않은 하늘만큼이나 어두운 망토를 쓴 무리가 모조의 밤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이시도르의 호위 기사가 횃불을 들고 앞서 가는 가운데, 차라는 페기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빤한 시선에 페기가 지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앞 보고 걸어. 넘어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