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제가 따르겠습니다.”
왈테르의 굳건한 말에 차라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봐요, 왈테르 경. 근위대장인 경이 성궁을 비우면 어쩌잔 거예요?”
“예? 하지만 어차피 전 여기 있어 봤자 별 도움도 안 되고….”
“하….”
차라가 이마를 감싸 쥐었다.
“됐으니까 성하나 잘 지켜요. 보아하니 저 말라깽이는 비올라를 교황처럼 모시는 듯하니까.”
“하하, 농담도 과하십니다.”
“말이나 못하면.”
차라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왈테르가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도련님. 내일 떠나시는 건 안 되겠습니까? 내일이라면 제가 반드시! 근위대에서 손꼽히는 기사들로 호위대를 꾸려 드리겠습니다!”
“그럴 여력 있으면 가서 교황 성하나 지키라니까요.”
차라는 피곤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아까 내가 한 말, 진심이에요. 끈 떨어진 진짜 교황 성하, 경이라도 잘 지켜 드려요.”
“도련님….”
왈테르의 눈이 글썽글썽해졌다. 차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장식 없는 소박한 마차에 올라탔다. 곧 이랴! 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티끌 한 점 묻지 않은 순백의 성벽과 활기찬 도시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반반한 대로를 달려 나가던 마차는 어느덧 먼지 흩날리는 흙길로 접어들었다. 차라는 그제야 어깨에서 힘을 풀 수 있었다.
“지겹다, 정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오랜 피로가 얼룩덜룩 묻은 얼굴을 문질렀다. 정말이지 이 모든 것들이 지겨웠다. 성직자의 탈을 쓰고 누구보다 세속적인 자들도, 상대를 무너트리기 위해 안달이 난 모습들도,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저 자신조차.
우울하게 발치를 내려다보던 차라가 문득 외투 안주머니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종이를 펼치자, 꽃밭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어느 여인의 초상화가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 씁쓸한 그리움이 걸렸다.
“넌 어떻게 여기서 10년을 살았냐.”
고작 4년 째인데도 벌써부터 숨이 막혔다. 해방의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질릴 정도로 하얀 성벽 아래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한때는 그곳이 집이었던 적도 있었는데. 가족이라 여겼던 이들과 더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 새로운 집을 꾸리려는 희망에 가득 찬 날들도 있었는데.
그는 맥없이 웃으며 그림을 도로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무의미한 미련이다. 이제 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모두 버려두고 훌훌 떠나는 것뿐이니.
갑자기 쿵! 하는 진동에 마차가 뒤흔들렸다.
깜짝 놀라 좌석에 엎어졌던 차라가 더듬거리며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무, 무슨 일이에요?”
“창문 열지 마십시오! 화살이 날아왔습니다!”
호위 기사가 다급히 외쳤다. 차라는 얼른 창문을 닫고 불안한 눈으로 창밖을 살펴보았다. 초겨울에도 녹음이 무성한 침엽수림. 화살을 날린 사수는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별안간 누군가 악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동시에 양측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젠장! 방패! 방패 어디 있어!”
“마차, 출발해!”
“도련님, 마차 안에 숨어 계십시오!”
마부가 황급히 채찍을 휘둘렀다. 말이 길게 울며 달리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차라는 난데없이 창문을 깨트리고 날아와 벽에 꽂힌 화살을 보고 비명을 삼켰다.
도대체 왜 나를?
그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눈을 콱 감았다. 조용히 살아가던 저를 누가 노리는지 짐작도 안 됐다. 그저 덜컹거리는 마차와 하나씩 멀어지는 호위 기사들의 목소리가 죽도록 무서울 뿐이었다.
그때, 화살을 맞은 말이 날카롭게 울며 쓰러졌다. 마부가 어찌할 겨를도 없이 다른 말도 다리가 꼬여 넘어졌다. 마차가 옆으로 기울어지며, 차라는 영문도 모르고 마차 안을 아프게 굴렀다.
쿵!
마차가 길가에 쓰러지자 흙먼지가 무수히 피어올랐다. 튕겨 나간 마부는 그대로 정신을 놓았는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피를 흘리며 경련하는 말, 깨진 유리 조각. 차라는 가쁜 숨을 삼키며 불안한 눈으로 좌우를 돌아보았다. 이상하게 시야가 흐릿했다.
끼이익….
불현듯 그의 눈가로 날 선 햇빛이 드리워졌다. 차라는 인상을 구기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제 머리 위에서 마차 문이 열리고 있었다. 이윽고 검은 복면을 쓴 사내들이 역광을 등에 이고 나타났다.
“미치겠네….”
차라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반파된 마차 안으로 훌쩍 뛰어내린 사내가 차라의 얼굴에 검은 천을 뒤집어씌웠다. 곧이어 정신이 까맣게 암전되었다.
훅! 숨을 들이켜며 눈앞이 밝아졌다.
멀뚱히 눈을 껌벅이던 차라가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뾰족한 전나무가 하늘께까지 치솟은 숲속. 별궁으로 가던 중 갑자기 공격을 받아 납치당했다는 것이 그제야 떠올랐다.
불쑥, 낙엽이 깔린 흙바닥 위로 값비싼 구두가 내려앉았다.
“이런. 귀하신 얼굴에 상처 내지 말라 내 분명히 일렀을 텐데.”
익숙한 목소리. 퍼뜩 고개를 든 차라의 얼굴이 황망함으로 물들었다.
“피아제 백작?”
“…절 기억하십니까?”
얼굴을 찡그리며 구두에 묻은 흙을 털어 내던 이시도르의 눈에 문득 이채가 돌았다. 차라는 대놓고 싫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내 눈이 단춧구멍으로 보여요? 보고도 못 알아보게?”
“인사 한 번 드렸을 뿐이니까요. 그것도 1년 전에.”
지난해 성촉절이 떠오르자 자연스레 차라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이시도르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일단 거칠게 모신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원래는 도련님만 조용히 모시려고 했는데, 호위대가 생각보다 끈질겨서 말이죠.”
“…이래 봬도 나 사도인데. 이래도 되는 거예요?”
“물론이죠.”
대낮에 납치 행각을 벌인 것치고 그는 지나치게 여유로워 보였다. 차라는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혼자서 이런 해괴망측한 일을 꾸몄을 린 없고…. 누구예요? 클레멘스 추기경?”
“교회에 한평생을 바치신 분께서 어찌 이런 일에 가담하셨겠습니까?”
“그럼 누군데요. 라발의 황제예요? 도대체 내가 뭐라고 이딴 짓을 벌여요?”
“잘 아시는군요. 황제 폐하께는 도련님이 큰 의미가 없으시죠.”
이시도르가 미소 띤 얼굴 그대로 허리를 숙여 차라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
“도련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보다 더 센 놈을 데려왔죠.”
“그게 무슨 헛소리예요?”
“이런, 도련님께선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는데요?”
이시도르가 대답을 구하듯 허리를 펴며 뒤를 돌아보았다. 차라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의 등 뒤를 향했다. 긴 망토를 쓴 누군가 그늘진 나무 사이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정적 사이로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늘 속에서 벗어나 둥글게 햇빛 쏟아지는 반원으로 들어온 이가 천천히 망토를 벗어 내렸다. 빛 받아 반짝이는 은발 아래, 홀로 생기 돋은 보랏빛 눈동자가 천천히 뜨였다.
“안녕, 차라.”
어색한 듯, 쑥스러운 듯 페기가 엷은 미소를 그렸다.
“…잘 지냈니?”
숲속은 고요했다.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고, 가라앉은 침묵은 오래갔다.
차라의 시선은 햇빛 속에 곧게 선 그녀에게 못 박혀 있었다. 크게 확장된 눈이 경직되어 단단히 굳어 버린 듯했다.
문득, 그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달싹거리는 입술 사이론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못했고, 흔들리는 손끝은 아무것도 쥐지 못했다. 그저 온몸으로 오열하듯 떨었다. 페기가 서둘러 다가와 흙바닥에 무릎 꿇었다.
“차라.”
“거짓, 거짓말이지. 내가 미친 거지.”
“눈 들어서 다시 날 봐.”
“하지만 넌 죽었잖아. 내가 봤어. 관 속에 누워서 시체처럼 눈만 감고 있었잖아. 내가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지 않았으면서….”
관 뚜껑에 못을 박을 때도 있었다.
허름한 공동묘지에 관을 묻을 때도 있었다.
적적한 날이면 늘 그녀의 묘지에 있었다.
행여나 아직 살아 있는데 못질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행여 산 채로 묻는 건 아닌가 싶어서. 행여, 기적처럼 살아 돌아올지도 모른다 싶어서.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응답한 적 없었다. 그제야 그녀의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내가 너무 늦었지…?”
페기는 그의 뺨을 들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슬픈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많이 컸구나.”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차라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떨어졌다. 그는 울음 섞인 신음을 흘리며 간신히 그녀의 옷자락을 틀어쥐었다. 힘없이 기우는 고개가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흐윽….”
차라는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겨우 흉터로 남은 상처가 다시 터지고 있었다. 아팠다. 너무 아프면서도 영문을 몰랐다. 하지만 괜찮다. 아무래도 좋았다. 이유따위 상관없었다.
페기는 천천히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저를 보자마자 터트리는 울음에서 지난 그의 삶이 짐작되었기에. 가슴이 쓰라렸다.
“다신 그렇게 사라지지 않을게. 약속해.”
그를 위로하려 속삭이던 페기 마저 끝내 목맨 듯 고개를 숙였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차라의 손이 간절하게 그녀의 옷자락을 쥐고 또 쥐었다. 잘게 주름지는 그녀의 옷자락처럼 구겨진 마음은 펴질 줄 몰랐다.
그들은 곧 숲을 벗어나 외진 시골길로 들어섰다. 페기와 차라, 이시도르가 미리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차라는 울음을 그치고 나자 공연히 창피해졌는지 꼭 나무토막처럼 쭈뼛거렸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기가 툭 내뱉듯 말했다.
“부끄러움 많은 건 여전하구나.”
“내가 언제!”
울컥했던 차라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페기는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벌써 이렇게 나보다 키도 크고.”
그녀의 손끝이 삐죽삐죽 자라난 잿빛 머리칼을 스쳤다.
“눈도 이렇게 깊어지고, 젖살도 빠지고.”
손끝이 뺨을 스치자 차라가 움찔 어깨를 튕겼다. 페기가 설핏 웃었다.
“어색해야 하는 건 난데, 왜 네가 내외를 해.”
“내, 내가 언제 내외를 했다고….”
“내가 그렇게 이상하니? 거울로 보기엔 별로 달라진 점이 없던데.”
“…똑같아. 하나도 안 달라졌어.”
“…….”
“그래서 그래. 난 너무 달라졌으니까.”
차라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렸다. 지난 3년, 그는 꿈을 잃고 활기를 잃었다. 이 지긋지긋한 삶에 바라는 것이 하나 남았다면, 그저 조용히 살다 조용히 떠나는 것뿐이었다.
“언제나 똑같은 사람이 어디 있어. 달라지는 건 당연한 거야.”
“하지만 넌 아니잖아.”
“…나도 달라졌을지 누가 아니.”
페기가 가만히 웃었다. 흘끗 그 얼굴을 훔쳐본 차라가 슬금슬금 시선을 내렸다.
남매간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멀뚱멀뚱 숨죽이고 있던 이시도르가 그제야 슬며시 끼어들었다.
“도련님. 전하와 오랜만에 만나셨는데 달리 궁금하신 점은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