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뱀을 추적하다 급보를 듣고 성궁으로 돌아왔던 예후르는 그녀의 시신을 확인하지도 않고 곧장 동쪽으로 날아갔다. 거듭된 비행에 지칠 대로 지친 용 기병대는 국경을 넘기도 전에 그를 놓쳤고, 예후르는 그렇게 오래간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가 성궁에 다시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1년 뒤였다. 돌아온 그는 넋이 나간 듯, 혹은 정신이 다른 데 팔린 듯했다. 예리하고 치밀하게 정제된 이성의 화신 같던 본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돌아온 뒤로도 성궁을 자주 비우셨습니다. 워낙 신출귀몰하셔서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시는지도 파악이 잘 안 됐죠. 들리는 소문으론 교황 성하와도 마찰이 잦으셨다고 합니다. 성하께서 본디 엘피도 공작 전하께 거는 기대가 크셨으니, 갑자기 변하신 모습에 실망이 크시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엘피도 공작이 차기 교황이라는 데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여론이 바뀐 것은 지난해 성촉절부터였다.
“아시다시피 성촉절은 교회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삼대 축일 중 하나입니다. 천 년 전 마귀를 봉인한 야누비타 1세를 기리는 의미로 매년 성 미할리나 대성당에서 촛불을 밝혀 왔지요. 그리고 지금처럼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의 현신이 강림해 있는 때라면, 행사의 규모는 더더욱 커집니다.”
전통에 따라 성촉절을 집전하는 자는 천사 미할리나의 현신인 예후르였다. 각국의 대사와 귀족들, 그날만을 기다려 온 각지의 성직자들과 순례자들이 나르세스 광장과 성 미할리나 대성당을 가득 메웠다.
“저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먼저 도착한 교황 레오폴트와 알비야 공작이 상석을 지키고 있었다. 원탁 추기경들은 서열에 따라 그 아래 단에 앉았고, 그 모든 이를 밝히듯 성화가 눈부시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예측하지 못한 때, 그가 등장했다.
장중한 오르간 연주가 뚝 끊기고, 적막한 사위엔 그의 발자국 소리만이 울렸다. 그의 등 뒤론 자색 추기경 의복이 아닌 짐승의 검은 털가죽이 휘날렸다. 휑하니 빈 중앙 통로를 가로질러 단 앞에 도달한 그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사방에서 비명이 울렸다. 몇몇 추기경들은 기함하며 단에서 굴러떨어졌고, 뒤늦게 그를 쫓아 성당 안으로 난입한 근위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의 검이 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검이었죠.”
그는 거침없이 천사 미할리나의 석상을 베어 넘겼다. 단 위로 걸어 올라가 성화대까지 베려 하자, 레오폴트가 온몸으로 그를 막아섰다.
“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레오폴트는 그의 뺨을 때리며 절규했다.
“두 분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 났습니다.”
예후르는 그날로 용 기병대를 이끌고 자신의 영지로 떠났다. 혹자는 레오폴트가 길길이 날뛰며 그를 내쫓았다고 하고, 혹자는 엘피도 공작이 제 발로 나갔다고 했다. 이시도르는 둘 다 맞다고 생각했다.
“엘피도 공작 전하에 대한 여론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차기 교황에 대한 논의에도 불이 붙었죠. 교황 성하께선 나날이 기력이 쇠하시는데, 정작 그분의 후계 자리가 불확실해졌으니까요.”
그때, 알비야 공작이 신성처럼 나타났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성도를 떠나신 뒤, 알비야 공작이 본격적으로 국정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반년, 지금의 성궁은 완전히 알비야 공작의 세상이에요. 교황 성하께선 두문불출하시고 차라 도련님은 아직 어리시니, 알비야 공작을 막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
“하지만 그녀에게도 불안감은 남아 있죠. 아직은 정식으로 교황이 된 것이 아니니까요.”
이시도르가 싱긋 웃었다.
“엘피도 공작 전하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알비야 공작을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동층이 대폭 늘어난 것뿐이죠. 위스누아라는 출신지의 한계상 라발과 탐보프의 표를 온전히 끌어올 수 없는 알비야 공작과 달리, 엘피도 공작 전하는 그 어디와도 연고가 없으시니까요.”
보통의 경우, 연고가 없다는 것은 강력한 지지층이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엘피도 공작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어느 나라를 가든, 거리를 뛰노는 아이들을 붙잡고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엘피도 공작 전하를 말할 겁니다. 당연합니다. 그분은 뱀을 죽인 영웅이시니까.”
탁상에 올려져 있던 페기의 손끝이 움찔했다. 이시도르가 우러르듯 말했다.
“예.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뱀을 죽이셨습니다. 그분께서 직접 그 일을 거론하며 위세를 부리신 적은 없으나 분명합니다. 공작 전하께서 돌아오신 뒤로 마귀가 자취를 감추었고, 무엇보다 마귀에게 빼앗겼던 모게리니 산의 성유물을 되찾으셨으니까요.”
오래전 야누비타 1세가 마귀를 봉인했던 성검.
그는 그 검으로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의 석상을 베었다.
“그분은 교회의 구원자이시며, 이 땅에 사는 수천만 신민들의 어버이십니다. 성촉절에서 부리셨던 만행조차 그분께 달리 이유가 있겠거니 여기는 이들이 많지요. 그들에게 엘피도 공작 전하가 아닌 다른 사도가 교황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결단코 용납하지 못할 일일 겁니다.”
이시도르가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 본인의 의사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죠.”
지난해 성촉절 이후로 그는 성도를 찾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넉 달 전엔 영지마저 박차고 나갔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탐보프에 계십니다.”
“…….”
“정확히는 오스터캄프에.”
생각지도 못한 지명에 페기의 낯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시도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거기 누가 있는지 아실 겁니다.”
“페임하른 공작.”
“네. 황위 쟁탈전에서 빌헬미나 3세에게 패한 뒤, 아들까지 빼앗긴 이리니 페임하른이 그곳에 있지요.”
이시도르는 식은 찻물을 버리고 새로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3년 전에 페임하른 공작이 교황 성하께 탄원서를 제출한 적이 있습니다. 후계자가 없는 빌헬미나 3세가 자신의 아들을 앗아 가려 하니, 부디 성하께서 이를 막아 달라는 것이었죠. 성하께선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만, 일각에선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당시 페임하른 공작에게 호의적이셨다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3년 전에 끝난 일이었다. 더구나 십수 년 전 황위 쟁탈전에서 패배한 이리니 페임하른은 허울뿐인 이름만 남은 공작이었다. 엘피도 공작의 저의가 무엇이든 간에 이제 와 그녀에게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없었다.
“이를 두고 많은 이들이 토론을 벌였으나, 엘피도 공작 전하의 심중은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듣기론 용 기병대와 함께 페임하른 공작저에 객으로 머물고 계신다는데, 페임하른 공작에게 그 많은 용들을 먹일 재산이나 남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시도르가 웃음을 터트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기실 이 건은 페임하른 공작과 황위를 두고 다투었던 빌헬미나 3세와 그 수족들에게나 떨떠름한 일이었다. 다른 이들에겐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렇게 전하께서 살아 계신다는 걸 아신다면, 그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도 당장 용들을 이끌고 교국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어쩌면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실지도 모르죠.”
세간에는 엘피도 공작이 불미스러운 일로 죽은 카니나의 페기를 마음 깊이 아꼈다는 말이 돌았다. 누가 봐도 그녀의 죽음 때문에 저 지경으로 미쳐 버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도파 바도비체를 저토록 오래 버려두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지.’
이시도르는 속으로 즐겁게 생각을 이어 갔다. 착하게 살면 하늘의 천사께서 선물을 내려 주신다고 했던가. 그는 카니나의 페기가 불러올 반향을 상상하자, 오싹 소름이 돋을 만큼 행복해졌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 보낼 서신은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만약 따로 편지를 동봉하고 싶으시다면….”
“그만.”
딱 잘라 말한 페기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듯 눈가를 감싸 쥐었다. 멈칫한 이시도르가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싱글싱글 웃었다.
“말이 너무 길어졌군요. 이만 쉬십시오. 나가 보겠습니다.”
이시도르는 정중하게 인사한 뒤 방을 나갔다. 벽에 장식처럼 붙어 있던 마샤가 그제야 슬금슬금 다가와 찻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페기는 고단한 얼굴로 가만히 눈을 감고 벽에 고개를 기대었다. 너무 많은 것을 들었다.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이 얹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예리엘의 이름을 받은 새로운 사도가 등장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동시에 같은 천사의 이름을 받은 사도가 공존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는 지난해부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그녀는 고작 며칠 전에 되살아났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손끝에서 불씨를 피웠고, 이는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권능의 상징.
불씨는 왜 이제야 피어난 걸까.
나는 왜 되살아난 건가.
그는 왜….
페기가 눈을 떴다.
“마샤. 거울을 주렴.”
마샤가 거울을 갖고 왔다. 페기는 거울에 비친 삭막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핏기없이 창백한 피부도, 얇은 실처럼 날리는 짧은 머리칼도, 기억 속 자신의 모습과 한 점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저는 이렇게나 똑같은데 눈 떠 보니 3년이 지났단다. 제 자리는 다른 이로 메워졌고, 저 없이도 다른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기억에 몸서리치는데.
“개죽음에 이유가 있겠습니까.”
치가 떨렸다.
몸을 때리던 빗방울, 얼굴이 처박히던 진창, 꾸역꾸역 삼켜야 했던 비린 흙탕물, 눈 돌아가던 격통, 눈앞으로 내딛던 군홧발, 그 아래서 산산조각 부서졌던 나의 반지.
순간순간의 모든 기억이 뼈에 새겨진 듯 선연했다. 그 쓰디쓴 기억들을 씹어 삼키며 빗물에 쓸려 내려가던 흙을 쥐고 무덤에서 간신히 기어 올라왔다. 내 이름조차 쓰여 있지 않던 묘비에 몸을 기대며 수없이 너의 이름을 뇌까렸다.
왜 나를 배신했어?
“저, 전하.”
마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선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거잖아요. 되살아나는 기분은 어떤가요?”
페기는 물끄러미 거울을 응시했다. 거울을 쥔, 기이하게 비틀어진 오른 손가락을 응시했다.
“화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