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저 사람에게 극진한 건, 저 사람을 진짜 가족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니야. 너 자신과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진짜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이득이 되고자, 가죽만 남은 저 사람의 피를 죄 빨아먹으려는 거지.”
비올라는 순진함을 가장하듯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그게 잘못된 거야?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해야지. 안 그럼 내가 죽게 생겼는데.”
“…….”
“그리고 이 관계는 레오에게도 이득이야. 레오가 나한테서 누굴 보는진 너도 알고 있지?”
비올라의 흑단 같은 긴 머리칼, 밤하늘처럼 어두운 빛깔의 눈동자, 가느다란 뼈대와 사근사근한 말씨.
그녀는 놀랍게도 오래전에 죽은 교황 제네로사 5세를 닮아 있었다.
“게다가 그 여자도 있지. 왜 있잖니, 죽었을 때 나랑 나이가 비슷했다던 그 사람.”
카니나의 페기.
차라의 눈이 설핏 떨렸다. 그 모습에 비올라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술을 쭉 찢어 웃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대단했던 모양이네. 교황에 너에 나머지 둘까지, 이렇게나 홀려 버린 걸 보면.”
“…….”
“좌우간 레오한텐 나 말고 다른 대안이 없어. 라발과 탐보프의 갈등으로 허리가 터져 나가던 교국에 위스누아의 만포르차 가문이란 신진 세력을 데려왔지. 게다가 퀴테리아 추기경은 원탁의 썩은 물과 달리 정결하고 도덕적이며 개혁적이야. 지금껏 레오가 찾아 헤매던 젊은 피 아니니?”
“다른 대안이 없어야만 하는 네 바람이겠지.”
차라가 건조하게 대꾸했다. 깜박깜박 그를 응시하던 비올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 바람이라고? 그래, 내 바람이자 사실이지. 레오는 평생 라발을 용서할 수 없어. 그런데 탐보프와는 관계가 미묘해졌지. 넌 스무 살 되자마자 성궁을 나가려고 벼르고 있고, 이멘바흐의 누구는 이미 없는 사람이나 다름없어. 나 말고 도대체 누가 있는데?”
“…….”
“아, 혹시 엘피도 공작을 기대하는 거야?”
비올라가 넌더리 내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정말 왜 아직도 그 남자한테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 남자는 완전히 미쳤어. 너도 봤잖아.”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건 변명이 되지 못해. 누가 그런 상황을 참작해서 다음 교황으로 뽑아 준다니?”
“그럼에도 그를 믿는 사람들이 있단 거겠지.”
차라는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오히려 너야. 넌 그를 보고도 몰라?”
“뭘?”
“아무것도 느끼질 못했어?”
“…….”
“너도 사도잖아. 왜 모르지?”
진심으로 이상하다는 듯 차라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지그시 입술을 감쳐문 비올라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뺨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그 옆얼굴을 잠시 응시하던 차라가 몸을 돌렸다. 비올라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콱 틀어쥐며 식당으로 돌아갔다. 둘의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
“비올라 에우제니아 소피 만포르차. 위스누아를 지배하는 만포르차 가문의 차녀입니다.”
우아하게 차를 따라 낸 이시도르가 양손으로 공손히 찻잔을 내밀었다. 마샤가 대신 찻잔을 받아 페기의 앞에 놓아 주었다.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화목한 부모, 가문을 이을 오라비와 일찌감치 서원한 언니의 보살핌 아래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원래는 성인이 되자마자 피아마의 장자와 결혼할 예정이었는데, 열아홉 번째 생일 연회에서 갑자기 사도로 각성한 것이죠.”
대개 사도는 어린 나이에 각성한다. 열넷에 각성한 차라도 실은 꽤나 늦은 나이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제피린 2세가 열아홉 살 하고도 석 달, 카마두스 4세가 열아홉 살 하고도 넉 달이 되어 각성했다고 하죠. 그에 조금 미달하긴 해도 알비야 공작 역시 역사에 길이 남을 늦은 각성임엔 분명합니다. 당시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적잖았으나,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가 피어올랐기에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사도가 된 지 1년 반.
교국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우선 교국의 권력 구도가 재편되었습니다. 라발과 탐보프가 양분하던 기존의 구도에 위스누아라는 신진 세력이 대두한 것이지요. 그래 봤자 위스누아는 리누스 도시 연맹을 구성하는 하나의 도시 국가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그 필두에 선 자가 비범합니다.”
퀴테리아 로물라 데 만포르차.
“동생인 알비야 공작을 등에 업고 지난해 새로이 위스누아의 대주교이자 원탁 추기경으로 임명된 자입니다.”
“사도의 세속 가족이 추기경이라고요?”
페기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사도는 사도가 되기 이전의 연을 완전히 끊는다. 이는 천계율에 명시된 사항이었다.
“드문 일이긴 하죠. 당시에도 반발이 꽤 거셌는데, 만포르차 가문의 전폭적인 지지와 퀴테리아 추기경 본인의 인기 그리고 위스누아의 대주교 자리가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점을 감안하여 어렵게 통과되었습니다.”
“…….”
“그러나 제 개인적인 사견을 곁들이자면, 역시 알비야 공작의 존재가 컸지요.”
이시도르는 잠시 말을 멈추며 차향을 즐겼다. 무심코 오른손으로 찻잔을 들려던 페기가 멈칫하며 왼손을 들었다.
“알비야 공작은 처신이 능숙하고 사람을 다룰 줄 압니다. 사도가 되어 성궁에 들어온 뒤 가장 먼저 노린 이가 바로 교황 성하였지요.”
당시 레오폴트는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조각배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라발을 받아들이긴 했으나 여전히 심적으로 그들과 가까워지진 못했고, 가장 절실했을 때 그를 배반한 탐보프와는 이미 소원해진 사이였다.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슬하의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였다.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가장 약해지셨을 때, 알비야 공작이 성하의 빈틈을 파고들었죠.”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비올라는 온갖 간교하고 유치한 짓들을 획책했다. 우연히 제네로사 5세의 초상화를 본 뒤론, 심지어 그녀의 머리 모양과 옷, 장신구까지 따라 하기에 이르렀다.
“여러모로 대단하신 분입니다.”
짧게 웃음 지은 이시도르가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대단한 노력이 빛을 발해 성하께선 알비야 공작에게 모든 애정을 쏟아붓기 시작하셨습니다. 공작이 바라는 것은 전부 이루어 주셨지요. 퀴테리아 추기경이 원탁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성하께서 묵인하신 덕분입니다.”
“…천계율을 어겼네요.”
“네?”
페기는 가만히 찻물을 응시했다.
레오폴트는 쓰러져 가던 교국을 재건하고, 무너졌던 천계율의 질서를 회복한 자. 다른 건 몰라도 천계율만큼은 목숨보다 귀히 여기던 사람이 그리 간단히 신념을 저버릴 수 있었다.
침묵하는 그녀를 의아하게 지켜보던 이시도르가 곧 말을 이었다.
“좌우간 지금의 교국은 라발과 탐보프, 위스누아로 삼분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위스누아의 세력이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겠죠. 알비야 공작이 정식으로 작위를 받아 원탁에 입성한 뒤론, 모든 국정은 알비야 공작의 손을 타게 되었으니까요.”
“라발과 탐보프가 가만있을 리 없었을 텐데요.”
“물론이죠. 특히 탐보프의 저항이 거셉니다. 원탁회의가 열릴 때마다 아나클레토 추기경의 언성이 성벽을 넘는단 말이 있죠.”
“…….”
“반면에 라발은….”
이시도르가 조금 난처한 기색으로 눈썹을 긁었다.
“명색이 라발의 대사로서 이런 말씀 드리기 조금 면구스럽습니다만, 작금의 교국에서 저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라발입니다. 정확히는 클레멘스 추기경이죠.”
그는 찻잔 위에 티스푼 두 개를 엇갈려서 놓았다. 그리고 양쪽의 스푼 위로 각설탕을 하나씩 올렸다.
“아나클레토 추기경은 요 몇 년 사이 임명된 새로운 추기경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중앙 부처의 수도사들을 포섭한 솔란지아 추기경 역시 무시할 만한 세력이 못 되죠. 알비야 공작이 원탁의 의장 대리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치고, 의외로 탐보프와 위스누아의 세력이 비등합니다.”
“…….”
“덕분에 라발이 승부처의 핵심이 된 거죠.”
탐욕적으로 원탁 추기경들을 매수해 나가는 아나클레토, 중앙 부처의 실무진들과 은밀하게 연을 맺어 놓은 솔란지아,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며 젊은 수도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퀴테리아.
그들에 비하면 클레멘스는 지나치게 조용하고 보수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자신의 교구보다 성도에서 지내는 날이 곱절은 많던 이가 이제는 원탁회의가 아니면 성궁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사실 라발로선 얻어걸린 격이긴 합니다. 탐보프와 위스누아에 비해 세력이 위축되나 싶더니, 원탁의 결정을 좌우하는 열쇠가 된 것이니까요.”
그리고 클레멘스는 그 역할을 아주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그는 늘 객관적으로 합당해 보이는 쪽의 손을 들어 주었으며, 그 결정에는 어떠한 사익에 대한 고려도 들어 있지 않았다.
덕분에 라발의 대사로서 국익을 우선해야 하는 이시도르의 입장에선 종종 난감할 때가 있었다. 클레멘스의 돌발 행동 때문에 황제의 꾸짖음이 담긴 편지를 받은 것만도 벌써 수차례였다. 클레멘스는 속을 알 수 없는 자이니 늘 경계하라던 이모님의 충고가 이토록 뼈에 사무칠 수가 없었다.
페기가 조용히 물었다.
“다른 사도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교황 성하께선 건강이 많이 쇠하셨습니다. 지난 3년, 몇 번의 고비를 겪으셨는데 고비가 지나가면 이상할 정도로 건강을 회복하셨다가 다시 쇠하길 반복하셨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알비야 공작이 작위를 받은 뒤론 일선에서 물러나 외부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계십니다.”
“…….”
“차라 도련님께선 미성년이기에 여전히 성궁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러고 보니 도련님도 자주 뵙진 못했군요. 무도회나 사교 모임은커녕 공식 석상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들려오는 풍문으론 성궁 밖 외진 별장으로 종종 아유를 나가신다고 합니다. …마가 공작 전하야 여전하시고요.”
이시도르는 넌지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마지막으로 엘피도 공작 전하는….”
페기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시도르가 끝내 한숨을 삼키듯 말했다.
“그분은 완전히 미치셨습니다. 전하의 죽음을 기점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