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벽면이 트여 고요한 겨울 햇살이 내리쬐는 회랑에 무리 지은 여자들이 조신하게 걷고 있었다. 나란히 고개를 숙인 채 뒤따르는 이들은 하녀였고, 맨 앞에서 도톰한 망토를 펄럭이며 나아가는 이는 그들의 주인이었다.
갓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아가씨였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흑발은 매끄럽고, 암청색 눈동자는 당차게 빛났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 흰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전에 없던 사랑스러운 느낌마저 주었다.
그녀가 바로 성도 오스피나에 새 바람을 몰고 온 자.
위스누아의 비올라였다.
“알비야 공작 전하.”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리던 비올라가 순식간에 화색을 띠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휘어잡고 후다닥 달려갔다.
“퀴테리아 추기경!”
자색 추기경 의복을 차려입은 퀴테리아가 손을 가슴 위로 올리며 공손히 인사했다. 비올라는 들뜬 얼굴로 그녀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는 거죠? 내가 추기경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보는 눈이 많습니다. 먼저 체통을 지키시지요.”
움찔한 비올라가 공연히 헛기침하며 백조처럼 우아하게 허리를 폈다.
“내 그동안 추기경의 서신만을 기다렸습니다. 어찌 무사하다는 편지 한 통 없을 수가 있습니까? 설마 이 나를 무시한 처사는 아니겠지요.”
눈빛은 한층 도도해지고, 말씨는 고상해졌다. 퀴테리아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선선히 웃어 주었다.
“한 장의 서신보단 무사한 제 모습을 직접 보시는 걸 더욱 기뻐하시리라 여겼습니다.”
“어머나, 짓궂기도 하시지.”
“전하께선 짓궂은 걸 좋아하시니까요.”
“틀렸어요. 난 퀴테리아 추기경의 짓궂은 면모를 좋아하는 거지, 다른 이들의 짓궂음은 방만함으로 보아 넘기니까.”
비올라가 새침하게 망토를 여몄다.
“좌우간 내 서신에 답장하지 않은 건 용서하겠어요. 하지만 내게 보고도 없이 그런 험지에 다녀온 건 도무지 용서할 수 없군요.”
“성하의 명이셨습니다.”
“하지만 나랑 상의는 했어야죠!”
팔짱을 낀 비올라가 뚜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날 능멸한 죄는 아주 커요.”
“압니다.”
“압니다아? 날 능멸해 놓고 그런 말이 나와요?”
“제가 무사히 돌아온 시점에서 이미 절반의 죄는 감경되었을 테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고 되묻듯 퀴테리아가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다. 비올라는 입술을 비쭉거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도저히 추기경은 당해 낼 수가 없군요. 됐어요. 지금은 바쁘니 이따 오후에 내 집무실로 오도록 해요.”
“성하를 뵈러 가십니까?”
그 말에 비올라의 뺨 한가득 올라 있던 화색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진저리 난다는 듯 눈을 위로 굴리며 한숨처럼 말했다.
“네, 가야죠.”
“알비야 공작 전하 드십니다!”
시종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문이 열렸다. 각오를 다지듯 발치를 무섭게 쏘아보던 비올라가 한 박자 늦게 식당으로 들었다. 눈부신 샹들리에 불빛 아래 그녀의 낯은 희도록 밝았다.
“레오.”
비올라는 만면에 어찌할 수 없는 반가움을 담고 급하게 식탁으로 걸어갔다. 시무룩하게 앉아 있던 레오폴트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뒤늦게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오, 비올라.”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죠?”
시종이 빼 준 의자에 앉으며 비올라는 넌지시 맞은편을 보았다.
“안녕, 차라.”
누가 봐도 입맛 떨어지게 샐러드를 뒤적거리던 차라가 흘끗 그녀를 보곤 말없이 눈을 깔았다. 비올라는 속으로 코웃음 쳤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실은 오는 길에 퀴테리아 추기경을 만났어요.”
“퀴테리아…. 역병이 도는 마을에 간다고 했었지.”
“역병이 도는 마을에 간 게 아니라, 역병이 도는 마을로 보내신 거죠.”
“…….”
“성하께서, 직접.”
비올라가 맑게 웃었다. 느릿느릿 눈을 껌벅이던 레오폴트가 더디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보냈었지.”
“이제야 말씀드리지만 그때 제가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 몰라요. 역병으로 농민 수십 명이 죽어 나간 곳에 추기경을 보낸다니요. 적어도 제게 미리 언질을 주셨어야죠.”
“아니야…. 그게 아니다. 내 기억으론 분명 역병으로 살 곳을 잃은 화전민들을 돌보아 주라고…. 고드릭, 역병 환자들은 이미 다 죽어서 시신을 불태웠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 예. 성하.”
“그래도요.”
챙! 부러 소리 내어 고기를 자른 비올라가 무심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제게 말씀하셔야 했다고요.”
“…….”
레오폴트가 흐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표정 없이 고기를 썰어 나가던 비올라가 빤한 시선을 느끼곤 재빨리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그게, 혼자서는 국정을 돌보기 조금 버거워서요. 아시잖아요. 퀴테리아 추기경이 절 많이 도와주고 계신다는 걸. 또 퀴테리아 추기경이야말로 앞장서서 교국의 개혁을 주장하시는 분인데, 그런 분이 행여 역병에 걸려 큰일이라도 나면 어떡하나 싶고.”
“…….”
“그냥… 당신이 계속 아파서 내가 어쩔 수 없이 국정을 맡고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난 아직도 서툴고, 옆에서 사심 없이 조언해 줄 사람도 퀴테리아 추기경 말고는 없고…. 당장 눈앞이 캄캄해서 그랬어요.”
비올라가 애처롭게 눈을 떴다.
“내 마음 알죠, 레오?”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던 레오폴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겐 늘 미안하구나. 너무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한 것은 아닌지, 늘 걱정스럽다.”
“그런 말 하지 마요. 가족이잖아요. 딸이 아픈 아버지를 돕는 게 어디 이상한 일인가요?”
비올라가 능청스럽게 눈썹을 들썩였다. 레오폴트가 흐리게 웃으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 말해 주니 참으로 고맙구나.”
둥글게 싸맨 손이 식탁에 놓인 비올라의 손을 감싸려던 순간이었다. 비올라는 아주 교묘하게 손을 틀어 포크를 쥐었다. 레오폴트는 멈칫 허공에 정지한 손을 아주 느리게 거두어 들였다.
드르륵!
갑자기 차라가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그러곤 인사 한마디 없이 뚜벅뚜벅 식당을 빠져나갔다.
슬픈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레오폴트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고기를 꼭꼭 씹으며 그들을 번갈아 훔쳐본 비올라가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냅킨으로 입술을 닦은 비올라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오. 잠시 자리 좀 비울게요.”
비올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나갔다. 차라는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그를 따라가려 몇 걸음 내디딘 비올라가 한숨을 푹 내쉬며 하녀에게 손짓했다. 하녀가 눈치껏 복도를 달려 차라의 앞을 막아섰다. 둘이서 몇 마디 주고받는 듯하더니, 차라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비올라가 시큰둥한 얼굴로 이리 오라는 듯 검지를 까딱였다. 그러자 차라는 네가 오라는 듯 고갯짓했다. 짧은 대치 끝에 비올라가 입술을 깨물며 성큼성큼 중간 지점으로 갔다.
“이제 네가 와.”
“그냥 거기서 말해.”
차라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짜증스럽게 그를 쏘아본 비올라가 팔짱을 끼며 도도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넌 애가 왜 그리 비딱하니? 내가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레오 앞에서까지 그렇게 퉁명스러울 필요는 없잖아.”
“뭐라는 거야. 난 너도 싫고 저 사람도 싫어.”
비올라는 눈을 굴리며 혀로 볼을 둥글게 내밀었다.
“좋아. 네 의견을 수렴해서 다시 말해 줄게. 아무리 나랑 레오가 싫어도 그렇지,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퉁명스럽게 굴 거니? 너 때문에 내가 매일 레오를 위로해 줘야 하잖아.”
“딸이 아픈 아버지 위로하는 게 어디 이상한 일인가?”
차라가 비웃듯 뇌까렸다. 비올라의 눈이 매서워졌다.
“얘. 네가 레오를 싫어하든 말든 난 신경 안 써. 그런데 네가 자꾸 나한테까지 피해를 주잖아. 내가 어디 너처럼 종일 책이나 들여다보는 한량인 줄 아니? 안 그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왜 자꾸 내 일을 늘리냔 말이야.”
“너야말로 왜 자꾸 내 탓이야. 어차피 내가 아니더라도 저 사람은 매일이 우울한 사람인데. 저 사람을 못 놓는 건, 저 사람한테 바라는 게 있는 너잖아.”
한마디 하려던 비올라가 불편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차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꼴 보기 싫어도 1년 반만 참아. 스무 살만 되면 당장 떠나 줄 테니까.”
“꼴 보기 싫은 건 너겠지.”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차라가 지나가듯 말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비올라가 슬며시 그에게 다가갔다.
“너 말이 이상하다. 처음부터 날 싫어하던 건 너잖아. 나는 네가 날 싫어하니까 널 싫어하는 거야. 왜 자꾸 나한테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처럼 들리지?”
“네 양심에 찔리나 보지.”
“내가 양심에 찔릴 일이 뭐가 있어?”
“거짓말쟁이잖아, 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비올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헛웃음을 머금은 차라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널 처음부터 싫어했던 이유는, 네가 진짜와 가짜를 나누려 했기 때문이야. 나와 저 사람은 가짜, 퀴테리아 추기경은 진짜.”
“…….”
“가짜로 정했으면 가짜처럼 대해야지, 왜 자꾸 진짜처럼 속이려 들어?”
가만히 있던 비올라가 흘끗 눈을 치떴다. 암청색 눈이 싸늘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나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
“내가 요 며칠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 봤거든.”
빙글 뒤돌아선 비올라가 낭랑하게 읊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뎃사의 차라. 열다섯 살을 앞두고 사도로 각성. 그러나 원래의 가족들을 잊지 못하고 반년이나 번민하다가, 이듬해 벨렘 성으로 은밀히 가족들을 초청. 그리고 끝.”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간 비올라가 휙 그를 돌아보았다.
“친부가 아뎃사의 작은 상단에서 일한댔나? 네 부모의 배포가 작아 연이 끊긴 건 안타까운 일이다만, 내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배포 큰 부모님을 둔 것과는 관계가 없지. 네 가족들이 널 거부한 게 내 탓은 아니잖아?”
“그게 네 탓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그럼 적어도 넌 날 비난하지 마.”
성큼 다가온 비올라가 그의 눈앞으로 손가락을 들이밀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열아홉 해나 사랑했던 가족들이야. 갑자기 교황이 찾아왔다고 교황이 내 아버지가 되고, 네가 내 아우가 될 것 같아? 너는 이런 내 마음을 알잖아.”
“몰라. 적어도 난 너처럼 속이려 들진 않았으니까.”
차라가 경멸하듯 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