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에 단추가 걸리자, 파초가 홧김에 옷깃을 확 잡아당겼다. 실밥이 뜯어지며 어깨 아래로 옷이 쑥 내려갔다. 아슬아슬하게 걸친 옷 사이로 움푹 팬 쇄골이 드러났다.
파초가 실실 웃었다.
“나중에 나한테 감사하게 될 거다. 저런 분을 손님으로 모시는 게 어디 흔한 일인 줄 알아?”
“하지 마.”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넌 딱 봐도 처녀니까.”
“하지 마.”
“내가 처음 교육 못 시킨 게 좀 아쉽긴 한데….”
“하지 마.”
“나중에 나랑도 재미 좀 볼까?”
“내가.”
페기의 손이 물갈퀴처럼 파초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하지 말랬잖아.”
보랏빛 눈이 고삐 풀린 듯 확장되었다. 파초는 쩡하니 얼어붙었다. 곧이어 눈멀듯 찬란한 빛이 일며, 참을 수 없는 격통이 밀려들었다.
“끄아아아악!”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새하얀 불꽃이 순식간에 그의 얼굴로 번졌다. 파초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미친 듯이 날뛰며 거친 벽에 얼굴을 찧고 비볐다.
“악! 아악!”
하지만 단죄의 불꽃은 멈추지 않았다. 검게 타들어 간 눈엔 구멍만 휑하니 남고, 목 아래로 불이 퍼지기 시작했다. 역치를 넘어선 고통에 흰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사, 끄윽, 살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문가로 기어가던 그가 털썩 주저앉았다. 온힘을 다해 바짝 내뻗은 손끝마저 불길에 먹혔다. 그의 전신을 감싼 순백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피부는 녹아내리고, 뼛가루만 소복하게 쌓였다. 하지만 그마저 바람 한 줄기에 흔적 없이 날리고 말았다.
페기는 벽에 늘어져 맥없이 눈을 내리감았다. 말라비틀어진 목구멍이 찌를 듯 아팠다. 끔찍한 비명이 가신 낡은 집은 소름 끼치도록 적요했고, 더는 손끝 미동할 힘도 남아 있질 않았다.
그때, 우두커니 앉아 있던 남자가 부스스 일어섰다. 그는 넋 놓은 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가 맞았어….”
광기 어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꿈이 맞았다고! 오, 맙소사! 하늘의 천사이시여!”
황급히 달려오던 남자가 망토를 밟고 엎어졌다. 그 상태로 엉금엉금 페기의 발치로 기어 왔다. 그는 만면 한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먼지투성이 그녀의 맨발에 입을 맞추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돌아오신 사도시여!”
페기는 제 발치에 엎드려 미친 듯이 발에 입 맞추는 남자를 건조하게 응시했다. 그러곤 고개를 틀어 문가를 보았다.
“마샤.”
어둠 속에 숨어서 지켜보던 마샤가 움찔했다. 페기는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이리 오렴, 마샤.”
한참을 망설이던 마샤가 머뭇머뭇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페기의 옆에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실 마샤는 지금 이 상황이 잘 이해되질 않았다. 그 눈부신 불꽃은 무엇인지, 파초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페기가 범상치 않은 사람임은 진작 알아챘지만, 이렇게 비현실적인 상황을 상상한 적은 없었다.
눈물이 울컥 치밀어 오르자 마샤는 황급히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무서웠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무섭고, 제 이해를 벗어난 눈앞의 존재가 두려웠다. 세상 가장 낮은 곳을 기어 다니는 한낱 쥐 새끼에겐 너무나도 벅찬 순간이었다.
그런데 문득 페기가 손끝으로 마샤의 턱을 들어 올렸다. 마샤는 황망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나랑 같이 가겠니?”
그 말이 곧 구원이었다.
마샤의 울음소리는 높아져만 가고, 하늘의 천사와 지상의 사도를 칭송하는 남자의 목소리도 그치질 않았다. 어지러운 소리의 향연 속에 페기는 지친 듯이 벽에 고개를 기대었다.
그녀는 살아 돌아왔다.
비참한 귀환이었다.
***
카타리나 지방에는 피아제 백작의 별장이 있었다. 백작이 라발의 대사로 성도 오스피나에 머물게 되면서 구입한 저택인데, 라발과 성도를 오갈 때마다 중간 휴식처로 이용하곤 했다. 그게 아니면 간혹 그를 찾아오는 약혼녀가 머물다 가는 곳이었다.
목적은 확실하나 그 빈도수는 낮았다. 일국의 대사이자 손꼽히는 문예가로서 피아제 백작은 늘 분주했고, 그의 약혼녀는 고향과 성도를 오가는 긴 여행길을 꺼려 했다. 하녀들은 1년 중 몇 안 되는 날들을 위해 매일같이 별장을 쓸고 닦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쩐 일로 기별도 없이 나타난 백작은 단출하게 호위 기사만을 데리고 밤 나들이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녀들도 별스럽지 않게 여겼으나, 아닌 밤중에 백작이 여자를 데리고 오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작님이 늦바람이라도 드신 겐가?”
하녀들은 숨어서 저들끼리 떠들어 댔다.
화려한 외모와 유려한 화법을 자랑하는 피아제 백작은 의외로 여자관계는 깔끔한 편이었다. 태중 약혼한 몬테베르디 가문의 아가씨와는 사생아 없이 아들 하나, 딸 하나만을 낳기로 공증된 계약서까지 작성한 상태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여자를 데리고 온 것으로도 모자라, 하녀들의 출입까지 엄금하며 직접 수발을 들기에 이르렀다. 선대 피아제 백작이 안다면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나고도 남을 상황이었으나, 백작은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저택 안을 바삐 돌아다닐 뿐이었다.
백작도 저택 내 흉흉한 인심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작 정부 하나 들였다는 것으로 무너지기에 그의 평판은 지나치게 완벽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녀는 그의 정부가 아니었다.
억울하게 죽었다가 되살아난 사도.
세상의 가장 더럽고 비천한 곳에서 그녀를 찾아냈으니, 이보다 더 떳떳할 수가 있을까.
백작은 저도 모르게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기를 갈무리하며 똑똑 문을 두드렸다. 곧 작달막한 소녀가 문을 열어 주었다.
전통적인 라발 남부식으로 화사하게 꾸민 방 안에는 화초와 풀잎의 싱그러운 향이 은은하게 맴돌았다. 초겨울 외풍을 대비해 벽면에는 두꺼운 태피스트리를 걸어 두었으며, 침상에는 연노란색 비단 천개가 호화롭게 늘어져 있었다.
백작은 침상으로 다가가 보드라운 융단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반투명한 천개 너머로 어른어른 보이는 인영을 경애하듯 올려다보았다.
“깨어나셨습니까.”
침상은 고요했다. 백작은 개의치 않으며 유창하게 말을 이었다.
“어젯밤 혼절하시는 바람에 제 소개를 미처 드리지 못했군요. 저는 현재 라발의 대사직을 맡고 있는 피아제 백작입니다. 부디 이시도르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는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외람되오나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3년 전 돌아가신 카타리나 공작 전하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제 생각이 틀렸다면, 청컨대 올바른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어투는 공손하며 억양은 우미했다. 얇은 비단 너머로 그를 응시하던 페기가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오른손이 아파요.”
순간 이시도르의 미간에 주름이 새겨졌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며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혼절하신 동안 의사를 불러왔는데 다행히 다른 곳은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문제는 오른손인데….”
“…….”
“뼈가 완전히 부서진 상태에서 잘못 붙었다고 합니다. 오래 사용하면 열이 오르며 고통을 느끼실 테니, 주기적으로 찜질을 해 주셔야 합니다. 섬세한 작업 역시 힘드실 테니, 수를 놓거나 글씨를 쓰실 때는 왼손을 사용하시는 편이 좋을 테고요.”
페기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이시도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누가 그런 대역무도한 죄를 범했는지 비밀리에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군지 알아요.”
“네?”
페기는 천개를 거두었다. 부지불식간에 그녀의 민낯을 마주한 이시도르가 멈칫 굳었다.
“내가 카니나의 페기예요. 아직도 카타리나 공작일진 모르겠지만.”
비웃듯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묘한 날이 서 있었다. 이시도르는 애써 미소를 지어 올렸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셨습니다.”
“내가 거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꿈을 꾸었습니다.”
열흘 전이었다.
그는 꿈속에서 하얀 비둘기를 따라 걷고 있었다. 비둘기는 쉼 없이 날았고, 산과 들과 다리를 건너 낯선 빈민가에 도달했다.
“조잡한 다리 밑에 빈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더군요.”
비둘기는 미로처럼 얽힌 골목들을 익숙하게 날아 어느 지저분한 집에 이르렀다. 지붕에 파인 곳이 많아 비 오는 날이면 바닥이 흥건하게 젖고, 바람은커녕 속삭임도 막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비둘기는 수많은 창녀들을 스쳐 보내곤,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어느 여인의 머리맡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뒤따라온 그를 직시하며 말하길.
“죄인을 벌하여 올바른 사도를 구하라.”
마치 천둥이 내리치듯 장엄한 음성이었다. 벼락같이 깨어난 그는 그길로 당장 짐을 꾸려 꿈에서 보았던 길을 그대로 따라 내려왔다. 그렇게 밤마다 헤매고 다닌 끝에 겨우 파초의 집을 발견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은발에 보랏빛 눈.
그러한 특성을 지닌 사도는 3년 전 죽은 카니나의 페기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직접 본 적이 없었고, 성궁에는 그녀의 초상화 한 점 남아 있질 않았다. 그에겐 그녀를 구해야 하는 절대적 확신이 필요했다.
누가 죄인이고, 누가 올바른 사도인지.
“그때, 전하께서 스스로 죄인을 벌하셨지요.”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고결한 불꽃.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증거였다.
페기는 경애를 담아 절 올려다보는 이시도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죽은 게 3년 전이라고요.”
“네.”
“그땐 불꽃을 피우지 못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피우십니다.”
“난 내가 어떻게 되살아났는지도 몰라요.”
“그건 중하지 않습니다.”
이시도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올바른 사도께서 돌아오셨단 것이지요. 제가 돕겠습니다. 하늘의 천사께 받은 신성한 권능으로 부디 죄인을 벌하여 주십시오.”
“누구를.”
“뻔하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올바른 사도이시라면, 알비야 공작이 죄인이겠지요.”
“…알비야 공작?”
페기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알비야는 카타리나 다음가는 서열의 영지. 그녀의 뒤를 이어 알비야 공작이 될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만일 차라를 말하는 거라면….”
“오, 그분은 아니십니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아 작위를 받지 못하셨지요. 만일 공작 위를 받게 되더라도, 알비야가 아닌 페란의 작위를 받으실 겁니다.”
이시도르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비야 공작, 즉 위스누아의 비올라.”
“…….”
“지난해 소명의 천사 예리엘의 계시를 받은 사도이자, 거짓된 위명으로 전하의 자리를 꿰찬 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