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초는 마샤에게 페기의 간호를 일임했다. 어느 정도 기력이 회복되거든 곧바로 ‘교육’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일단 살부터 좀 찌워. 너무 말랐으니까.”
그러곤 특별히 고기 한 덩이를 내주었다. 마샤는 약불로 오랜 시간 졸여 맛있는 고기 스튜를 만들었는데, 불행히 페기는 한 입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먹는 족족 토하길 며칠 내내 반복하자, 그러잖아도 말랐던 페기는 피골이 상접할 지경에 이르렀다. 마샤의 사정 끝에 엘리자가 대강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았는데, 아무래도 의사를 부르는 편이 좋으리라 했다.
“파초가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그럼 몰래 불러와야지.”
하지만 마샤에겐 돈이 없었다. 굳게 마음먹고 파초에게 말을 꺼내 보았지만, 공연히 뺨이나 얻어맞을 뿐이었다. 결국 마샤는 울상이 된 얼굴로 밤새 오한에 떠는 페기의 식은땀을 닦아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마샤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페기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여긴 어디인지, 너희는 누구인지, 나를 데리고 무엇을 할 작정인지. 말은 못 해도 글을 쓸 수는 있으니 소통에는 문제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만사 초탈한 것처럼 종일 멍하니 누워 있기만 했다.
한번 이상함을 자각하자, 다른 이상한 점들도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둠이 내리고 장사가 시작되면, 파초의 집은 적나라한 신음 소리로 아주 시끄러워진다. 얇은 벽 너머에선 간간이 술주정뱅이의 고성과 여자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마샤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그래서 지긋지긋한 듯이 눈을 감아 버리는 페기의 모습을 보곤, 머리를 맞은 듯이 멍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종종 파초가 나타나 그녀의 몸뚱이를 훑고 갈 때면, 그녀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숨죽이고 있었다.
숨죽이던 것이 아니었다. 숨 쉬지 못하는 것이었다.
페기는 여기가 어딘지, 우리가 누구인지, 자신을 데리고 무엇을 할 작정인지 모두 알고 있었다.
“야! 다들 일어나! 오늘 아주 귀한 손님이 오실 거야!”
느닷없이 파초가 들이닥쳤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여자들이 아직 해도 안 졌는데 왜 벌써부터 요란이냐며 신경질을 부렸다.
“이년들아, 게으름 피우려거든 내일 피워! 오늘은 딱 한 손님만을 모실 거니까!”
“겨우 하나? 도대체 누구길래?”
“그거야 너희가 알 필요 없고.”
“자기도 모르는 거 아니야?”
여자들이 깔깔거리자, 파초가 벌게진 얼굴로 악다구니를 썼다. 그리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페기는 조용히 벽만 응시할 뿐이었다.
“하여간에 깨끗하게들 씻고 단장하고 있어! 거 오랜만에 머리에 이도 좀 뽑고!”
파초가 문을 쾅 닫으며 나갔다. 코웃음 친 여자들이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쭉 켜며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어젯밤 지우지 않은 화장이 허옇게 번져 있었다.
여자들이 치장하는 동안, 마샤는 식은땀에 푹 젖은 페기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 주었다. 그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힌 뒤, 우물에서 낑낑거리며 물을 떠 와 밀린 빨래를 마쳤다. 젖은 빨랫감의 물기를 꼭 짜서 빨랫줄에 걸어 두자, 벌써 잿빛 땅거미가 몰려드는 늦저녁이었다.
마샤는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살짝 열린 파초의 방문 틈새로 생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누군진 알 필요 없고.”
마샤는 주춤거리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주 귀한 손님이라던 파초의 말이 떠올랐다. 파초의 집에는 귀족 나리들 밑에서 일하는 관리들도 종종 나타났으나, 단 한 번도 파초가 그런 식으로 손님을 설명한 적은 없었다.
하물며 오늘 하룻밤은 온전히 손님 한 명에게 달렸다니.
마샤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살금살금 파초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틈으로 눈을 갖다 대자,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파초와 웬 낯선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꿀을 부은 듯 진한 금발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얼굴은 희고 고왔으며, 심드렁하게 뜨인 하늘색 눈이 고압적으로 파초를 응시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검은 망토 사이로 얼핏 드러난 허리띠마저 순금으로 장식된 것처럼 번쩍번쩍 빛났다.
마샤는 그토록 아름다운 남자를 생전 처음 보았다. 하지만 그를 감싸는 묘한 분위기에선 기시감을 느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귀함.
아, 저이는 페기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구나.
“그나저나 많이 불결하네. 이런 덴 청소를 모르나?”
먼지 쌓인 탁상과 거미줄 쳐진 천장 따위를 훑으며 남자가 지나가듯 말했다. 파초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겨우 대꾸했다.
“죄, 죄송합니다. 일단 아, 앉으시죠.”
“…앉으라고? 여길?”
파초는 후닥닥 의자 위에 손수건을 깔아 주었다. 그마저 마뜩잖다는 듯 망설이던 남자가 망토로 휙 몸을 감싸며 엉덩이 끝만 걸치듯 앉았다.
“찾는 여자가 있다.”
“말씀만 하십시오.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짧은 은발에 보라색 눈. 여기 있지?”
“그걸 어떻게….”
파초는 어안이 벙벙했다. 페기는 아직 밖으로 내보인 적 없는 여자였다.
남자가 빙긋 웃었다.
“그 또한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다.”
파초는 황급히 고개를 수그렸다. 그가 손님 앞에서 저토록 쩔쩔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쩐지 보면 안 되는 것을 본 것 같아 마샤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
침실에선 여자들이 한창 화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마샤는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곁방으로 들어갔다. 언제 깨어났는지, 페기가 벽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슥한 밤이 내려앉은 때였다. 가느다란 촛불이 외풍에 흔들리며 그녀의 뺨 위로 너울거리는 그림자를 그렸다. 어둠에 잠긴 무상한 시선은 곧 꺼질 듯 위태로웠다.
마샤는 그 고요한 광경에서 불현듯 먼 옛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무덥던 한여름. 찜통이었던 방. 코를 찌르던 썩은 내. 천장에 매달려 흔들거리던 엄마의 야윈 두 다리.
죽은 사람은 그런 얼굴을 하는구나, 깨달았던 그 순간.
마샤는 본능적으로 튀어 나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도망가요.”
창밖에 꽂혀 있던 시선이 느릿하게 방 안으로 돌아왔다. 마샤는 치받는 울음기를 참으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창문 열어 줄게요. 제발 도망가요.”
엄마가 스스로 목매단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알았다.
이대로 두면 눈앞의 이 사람도 엄마처럼 죽겠구나.
“손님이 당신을 찾고 있어요. 곧 파초가 당신을 데리러 올 거예요. 시간이 얼마 없어요.”
마샤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기며 잠긴 창문을 열었다. 초겨울 찬 바람이 밀려와 머리칼을 흩날렸다.
“여기, 내 망토도 둘러 줄게요. 나가서 돌아오지 마요. 어쩌다 떨어진 거잖아요.”
“…….”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요.”
페기는 그저 가만히 마샤의 얼굴을 응시했다. 조급해진 마샤가 미동 없는 페기의 몸을 창밖으로 밀었다. 야밤의 어둠이 그녀를 가려 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샤의 뒷머리가 억세게 잡혔다.
“쥐 새끼!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둔탁한 고함 소리와 함께 마샤가 먼지투성이 바닥을 뒹굴었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파초가 그녀의 복부를 세게 걷어찼다. 명치가 콱 막히는 느낌에 마샤는 멀건 위액을 울컥 토해 냈다.
“이게 어디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있어! 너 돌았냐? 어?!”
파초가 그녀의 작은 몸뚱이를 마구 짓밟았다. 마샤는 허겁지겁 등을 둥글게 말았다. 구두 밑창이 뼈를 부수고 내장을 터트릴 것처럼 내리꽂혔다.
그러자 페기가 달려 나와 마샤의 몸을 감쌌다. 파초가 움찔하며 발길질을 멈추었다. 페기는 새파랗게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허, 짧게 웃은 파초가 그녀의 팔뚝을 잡고 끌어당겼다. 몸부림도 소용없었다. 문가에 모여 곁방 안을 훔쳐보던 여자들이 황급히 흩어졌다. 파초는 반항하는 페기를 질질 끌고 어두운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겨우 몸을 추슬러 엉금엉금 기어 나온 마샤가 그녀들을 간절히 올려다보았다.
“도, 도와주세요.”
“…….”
“저대론 죽을 거예요. 제발 살려 주세요.”
여자들이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시선을 피했다. 마샤는 절망적인 얼굴로 엘리자에게 호소했다.
“엘리자, 제발….”
동정하듯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던 엘리자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러자 멍하니 그녀를 응시하던 마샤가 단념한 듯 휘청휘청 벽을 짚고 일어섰다. 그러곤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고 어두운 복도로 들어갔다.
페기는 계속 저항했다. 팔뚝을 잡은 그의 손을 할퀴고, 그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홧김에 손찌검을 하려던 파초가 이를 득득 갈며 몇 번이고 분노를 짓눌렀다. 그러곤 더욱 억세게 팔뚝을 비틀며 어느 방 안으로 그녀를 홱 내던졌다.
초라하게 바닥을 뒹군 페기가 벅찬 숨을 삼키며 간신히 윗몸을 일으켰다. 풀썩거리며 일어나는 먼지 사이로 어둠에 잠긴 방 안의 윤곽이 얼핏 보였다. 바닥을 뒤덮은 찌든 때, 코를 찌르는 퀴퀴한 냄새. 그녀는 흐린 시야를 닦듯 힘겹게 눈을 깜박였다.
그때,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드러나며 방 안이 훤해졌다. 페기는 그제야 저 앞에 고요히 앉아 있는 남자의 존재를 알아챘다. 그리고 오만하게 절 내려다보는 벽안과 마주친 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밀기 시작했다.
“이게 또 어딜 도망가려고.”
문을 닫고 나가려던 파초가 황급히 달려와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 감았다. 머리 가죽이 뜯겨 나갈 것 같은 고통에 페기가 이를 악물었다. 벌게진 눈으로 그녀를 노려본 파초가 남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아직 교육이 안 된 년이라… 젠장, 가만히 좀 있어!”
페기가 그의 팔을 물어뜯자, 눈 뒤집힌 파초가 그녀의 뺨을 세게 갈겼다. 페기의 고개가 힘없이 고꾸라졌다. 파초는 씩씩거리며 두꺼운 손으로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끝나고 보자. 네년은 오늘 뒈졌어.”
마샤의 망토가 구석으로 날아갔다. 페기는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마.”
“다 죽어 가던 년 데려다 살려 놨으면 은혜를 갚아야 할 것 아니야. 이게 어디서 내 돈을 떼어먹으려고 해?”
“…지 마.”
“뭐?”
움찔 손을 멈추었던 파초가 선득한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너 말할 줄 알아? 잘됐네. 목석같은 년은 인기가 없어. 신음을 잘 질러야지.”
등 뒤의 단추가 하나씩 풀려 나갔다. 페기는 그의 손을 막으려 했지만 힘없이 미끄러질 뿐이었다.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