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328)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교황 코른헤르트는 죽기 직전에 이렇게 한탄했다.

“지상의 모든 것을 발아래 두었건만, 죽음만은 무릎 꿇리지 못했구나.”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변치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었다. 인간을 초월한 사도도, 수백만 신민을 거느린 황제도 죽음을 피하진 못했다. 죽음이 예정된 존재는 되살아날 수 없으며, 되살릴 수 없음은 유일하게 불변하는 법칙이었다.

그렇기에 세상은 죽은 이를 버려둔 채 끊임없이 흘러간다.

사자(死者)의 자리는 비워지고, 사자에 대한 기억은 갈수록 흐릿해졌다. 죽은 이에 대해 떠들던 이들은 곧 새로운 화젯거리를 찾아 이동하며, 죽은 이가 그리워 무덤을 찾던 발걸음들도 점차 뜸해졌다. 흐려지고 잊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카니나의 페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의문사를 둘러싼 소문이 흉흉하던 성궁은 곧 새로운 파란을 맞이했다. 비워진 자리에는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했으며, 봉합되지 않은 갈등 위로 새로운 갈등이 얽혔다. 사람들은 더 이상 카니나의 페기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그녀가 없는 세상에 익숙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사도를 잃은 뒤로 굳게 닫혀 있던 성 예리엘 대성당에 어린 수도사들이 들었다. 고귀한 대성당의 먼지를 쓸어 내고 녹을 닦아 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수도사들은 그러지 못했다.

황망히 제단을 응시하던 이들이 저도 모르게 청소 도구를 떨구었다. 누구는 휘청거리며 주저앉고, 누구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버티어 선 하나만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어 성당의 꼭대기로 달리기 시작했다. 넘어질 듯 계단을 올라 종탑에 오르니, 곧 맑은 종소리가 온 성도로 퍼져 나갔다.

바야흐로 성화대에 불이 피어오른 날.

천사 예리엘의 현신이 재림했다.

2부. 어둠 속의 등불

마샤는 다리 아래에서 태어났다. 그 다리는 조금 특이했는데, 다리가 잇는 땅과 땅 사이에는 강물이 아닌 또 다른 땅이 흐르고 있었다.

아래의 땅이 너무 깊어서 다리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아니었다. 고작 사람 키만 한 깊이. 그러나 위에 사는 사람들은 벌건 대낮에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끔찍하게 여겼고,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다리를 짓기에 이르렀다.

다리의 이름은 도밍고였다. 이름 붙이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아래 사는 사람들을 ‘도밍고의 짐승들’이라 불렀다.

다리 아래서 태어나 평생을 다리 아래서 살았던 마샤는 그 이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다리 아래는 질서가 없는 무법 지대였다. 이곳을 바꿔 보겠다며 의욕적으로 부임했던 젊은 사제조차 어느 밤 비명에 갔다.

그래서 마샤는 항상 의아했다.

왜 위에 사는 사람들은 밤이 되거든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오는 걸까?

언젠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을 때, 엘리자는 웃음을 터트리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귀여운 쥐 새끼. 별걸 다 궁금해하는구나. 그 사람들도 가끔은 이 다리 아래가 그리운가 보지.”

엘리자는 치마를 걷으며 시퍼렇게 멍든 허벅지를 훤히 내보였다. 그러자 마샤는 울상으로 그녀의 허벅지에 고약을 발라 주었다.

엘리자는 파초의 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여기 오는 손님들치고 엘리자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왜 다들 이렇게 그녀를 막 다루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파초의 집에는 엘리자만큼 아름다운 여자들이 열댓 명은 더 있었다. 오래전에 죽은 그녀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릴 적 어머니를 잃은 마샤를 제법 귀여워했는데, 태어나지 못한, 혹은 태어나자마자 빼앗긴 제 자식이 떠오른다고 했다.

“불쌍한 쥐 새끼. 너도 인생 참 기구하다. 어쩌다 이런 데 혼자 남겨진 것으로도 모자라 얼굴까지 그 지경이 되었니.”

얼마 전 수두를 심하게 앓았던 마샤의 얼굴에는 곰보 자국이 넓게 퍼져 있었다. 여자들은 그런 마샤를 딱하게 여겼지만, 마샤는 못난 제 얼굴을 원망하지 않았다. 흉 없이 아름다운 여자들도 딱히 행복해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의 얼굴에 흉이 진 것을 가장 안타까워하던 사람은 파초였다. 마샤의 얼굴이 죽은 어미를 꼭 빼닮아 자라면 제법 미인이 되겠거니 여겼던 모양이다. 그런 마샤가 더 이상 아름다움을 팔 수 없는 얼굴이 되자, 파초는 진지하게 그녀를 노예상에게 팔아넘길 생각을 했고 이는 거의 성사될 뻔했다.

계획이 갑자기 무산된 것은 성도에서 내려온 집행관 때문이었다. 마샤는 분노한 파초의 고함 소리에서 불법 행위, 처벌 강화 같은 토막을 주워들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당분간 노예상들이 몸을 사려야 한다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마샤는 얼렁뚱땅 파초의 집에 기생하는 잡역부가 되었다. 그녀는 팔려 나가지 않기 위해 아주 열심히 일했다. 마샤를 돈 먹는 버러지 보듯 하던 파초도 그녀의 꼼꼼한 일솜씨에는 무어라 타박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값을 지불하지 않고 도망간 손님을 잡으러 나갔던 파초가 웬 사람 하나를 이고 돌아왔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의 흙투성이의 여자였는데, 먼지를 닦아 내고 보니 대단한 미인이었다. 파초는 황금이 제 발로 들어 왔다며 아주 좋아했다.

“야, 쥐 새끼. 잘 씻겨서 안쪽에 들여놔라.”

정신 잃은 여자를 씻겨 침대에 눕히자, 다른 여자들도 호기심을 비추며 모여들었다. 그들은 낯선 이의 빼어난 외모에 고까운 기색을 보이며 하나씩 품평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다리 아래 사람은 아닌데. 파초는 이런 걸 어디서 주워 왔다니?”

“글쎄요, 저도 잘….”

“어머, 이 손 좀 봐. 궂은일 한 번 안 해 봤나 봐. 어쩜 이리 보드라워?”

“아뇨. 여기 오른손 중지 첫째 마디에는 굳은살이 박였어요.”

“…중지 첫째 마디? 그럼 글 쓰던 사람이란 거잖아.”

여자들이 떨떠름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혹시 위험한 일에 얽힌 거 아니야?”

“아우, 싫다. 난 모르는 척할래.”

“나도….”

여자들은 곧 뿔뿔이 흩어졌다. 마샤만 멀뚱히 남아 정신 잃은 여자의 곁을 지켰다.

그녀는 꼭 동화 속 공주님처럼 아름다웠다. 살결은 눈처럼 희고, 보기 드문 은빛 머리칼은 매끄러웠다. 파초의 집에서 일하는 여자들과는 종류가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이 사람은 짙은 화장과 향수가 없더라도 홀로 고고한 별처럼 빛날 것 같았다.

위에서 온 사람일까.

하지만 밤마다 부끄러움 가득한 얼굴로 내려오는 위의 사람들은 아래 사람들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차림이 조금 더 멀끔하고 몸에서 찌든 내가 덜 날 뿐이었다.

그렇다면 더 위에서 온 사람일지도 몰랐다. 다리 위의 사람들도 내려다보는, 어쩌면 저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

그런 사람이 어쩌다 이런 곳까지 떨어졌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밤새 그녀를 간호하던 마샤는 새벽녘에야 겨우 꾸벅거리며 잠들었다.

여자가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후였다.

밤 장사를 마치고 잠들 준비를 하던 여자들이 두 눈을 껌벅거리는 그녀를 보고 놀라 까무러쳤다. 비명 소리에 화들짝 깨어난 마샤는 그녀의 눈이 보라색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저기, 괜찮으세요?”

“…….”

“어디 아픈 데라도….”

“…….”

“이분, 말을 못 하시나 봐요.”

여자들은 벙어리라며 수군거렸고, 파초는 나쁘지 않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함부로 나불대는 입이 만악의 근원이라 여기던 그였다.

“쥐 새끼, 쟤 기력 차릴 때까지 네가 잘 돌봐. 분명 아주 좋은 물건이 될 거다. 내 눈이 또 기가 막히지.”

파초는 싱글벙글하며 돌아갔다. 여자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엘리자가 살짝 마샤를 불렀다.

“생쥐야, 잠깐 나 좀 볼래?”

엘리자가 자신을 생쥐라 불러 주는 것이 참 좋았던 마샤는 쪼르르 그녀에게 달려갔다. 엘리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침상에 누워 있는 여자를 눈짓했다.

“저 애, 잘 지켜봐.”

“네?”

“눈이 죽어 있잖아. 저런 애들이 어느 날 갑자기 무서운 짓을 저지른다니까?”

저의를 알아듣지 못한 마샤가 멀뚱히 눈만 끔벅이자, 엘리자가 찡그리듯 웃었다.

“네 엄마처럼 목매달아 죽을지도 모른다고.”

“아….”

마샤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침상으로 돌아오자, 여자는 변함없이 천장만 응시하고 있었다. 가끔씩 깜박이는 눈이 아니라면 눈 뜬 채 죽었다고 착각할 법도 했다.

그 얼굴을 보자 왜 엘리자가 그런 말을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눈을 뜬 여자의 모습은 이전과는 판이했다. 눈을 감고 있을 때는 한없이 고고해 보였다면, 눈을 뜬 지금은 금방이라도 깨질 듯 연약해 보였다.

마치 죽음에 한 발 걸친 것처럼.

마샤는 불쑥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을 삼키며 앞치마를 꾹 움켜쥐었다. 멀어지는 그녀를 붙잡기 위해 두서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제 이름은 마샤예요. 엄마가 할머니 이름을 따서 지어 주셨대요. 실은 언니 이름도 마샤였다는데, 언니가 금방 죽어서 내 이름이 됐대요.”

“…….”

“기억하기 싫으시면 그냥 쥐 새끼라고 부르셔도 돼요. 여기선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하염없이 천장에 꽂혀 있던 눈길이 마샤에게로 떨어졌다. 마샤는 문득 저 아름다운 눈이 닿는 제 곰보 자국이 걷잡을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사, 상냥하신 분들은 쥐 새끼란 말이 너무 거칠다며 생쥐라고 불러 주세요. 사실 저도 그 편이 좋아요. 쥐 새끼는 너무 보잘것없이 들리니까.”

“…….”

“당신은 이름이 뭐예요?”

알려 주리란 기대는 없었다. 가만히 절 응시하는 보랏빛 눈이 너무나도 지쳐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제 손바닥에 대고 아주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샤는 더듬거리며 그녀의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페기?”

별안간 좌중이 싸늘하게 식었다. 마샤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침대를 정리하며 잘 준비를 하던 여자들이 마치 괴물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디서 재수 없는 이름을 말하고 있어.”

“네?”

여자들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신경질적으로 베개를 던졌다. 날아오는 베개를 맞고 어깨를 움츠린 마샤가 주춤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베개들을 그들에게 가져다주었다. 타박 몇 마디 더 듣고 오자, 페기는 전부 포기한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마샤는 속이 상해 두 손으로 그녀의 귀를 막아 주었다. 아직도 들려오는 저 욕지거리들을 그녀는 들으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투명한 보랏빛 눈이 다시 스르르 뜨였다. 마샤는 늘 그렇듯 그저 속없이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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