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같은 정적 뒤로 누군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레오폴트는 돌아보지 않았다. 채광창에서 쏟아지는 눈부신 볕이 문가에 엉거주춤 서 있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그려 나가고 있었다.
레오폴트가 입술을 달싹였다.
“나가 보게, 왈테르 경.”
“하, 하지만 성하…!”
예후르를 따라 들어오려던 왈테르가 안절부절못하며 호소했다. 그러나 레오폴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부하 기사들이 만류하듯 옷깃을 잡아당기자, 결국 왈테르는 발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문이 닫히며 사위는 다시 적요해졌다.
우두커니 서 있던 예후르가 다시 저벅저벅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량하게 주저앉아 있는 레오폴트의 둥근 그림자 위로 예후르의 그림자가 삐죽 솟아올랐다.
레오폴트는 멍하니 관을 보았다. 관 아래까지 치민 아들의 그림자를 보았다.
스르릉.
그림자가 검을 빼 들었다. 길고 예리한 날이 둥근 반원을 그리며 머리 위로 솟구쳤다. 기이하게도 그림자에서 그의 눈빛이 보이는 듯했다.
가면 너머, 말라붙은 레오폴트의 입술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 숨을 거두러 왔느냐.”
사선으로 내리꽂히려던 검이 우뚝 멈추었다. 레오폴트는 허공에서 멈춘 검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죽음이 이토록 가까웠다.
“그것도 좋겠지. 페기와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는 진심으로 기껍다는 듯이 웃었다. 다 피지도 못하고 져 버린 내 가련한 딸. 저세상으로 가는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지만 고대했던 칼날은 내려오지 않았다. 그는 목을 빼어 죽음을 기다렸지만, 그림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을 수없이 짓씹으며 검을 내동댕이칠 뿐이었다.
예후르는 싸늘하게 돌아섰다.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러 문을 열자, 기사들에게 붙들려 악다구니를 쓰던 안드레아와 눈이 마주쳤다.
휘둥그레 뜨인 안드레아의 눈이 예후르를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요 며칠 그러했듯 넋 나간 것처럼 앉아 있는 레오폴트의 뒷모습. 그리고 구석에 버려진 검 한 자루.
순식간에 그녀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기사들을 밀쳐 낸 안드레아가 살벌하게 예후르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이 미친 새끼, 너 영감님한테 무슨 짓 했어!”
그저 가만히 붙잡혀 주는 듯하던 예후르가 슬그머니 고개를 기울였다. 느른하게 뜨인 금안이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재단하는 눈이 아니었다. 이미 재단을 마치고, 땅바닥 기는 개미 새끼를 보듯 냉엄하게 경멸하는 눈이었다.
안드레아가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그 눈깔 당장 안 치워…?”
살기 어린 벽안에 핏발이 섰다. 삭은 노여움이 끓어 넘쳤다.
“네가 뭐가 그렇게 잘났길래….”
“…….”
“뭐가 그렇게 잘나서 날 그딴 식으로 봐.”
늘 그랬다.
늘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보았다. 이 세상 가장 천박한 버러지란 것처럼. 이유 모를 경멸에 오랜 세월 증오와 분노만 켜켜이 쌓였다. 미움이 너무 오래되어 당장 저 눈알을 파 버리고 싶었다.
“씨발, 넌 뭐가 그렇게 잘났냐고!”
안드레아는 예후르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몰아붙였다. 몸은 순순히 휘둘리면서도 저 찢어발기고픈 눈빛만은 변함없었다. 그래서 더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잘난 새끼가 왜 이제야 온 건데! 그래서 뱀은 잘 죽이셨나? 아, 그래! 잘 죽였겠지, 근데 그동안 페기가 죽었어! 그렇게 품에 싸고돌던 애가 죽었는데, 넌 왜 이제야 나타난 거냐고!”
안드레아가 붉은 입술을 찢으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너, 진심으로 페기를 아끼긴 했냐?”
“…….”
“그냥 가지고 논 건 아니고? 예쁘고 말 잘 듣는 애가 졸졸 네 뒤만 따라다니는 게 기껍디? 걔가 평생 너만 보며 살 것 같았어? 이렇게 갈 줄은 꿈에도 몰라서, 그래서 이제야 오신 거야? 그리고 영감님한테 패악을 부려? 너 미쳤냐? 어?!”
멱살을 잡은 안드레아의 손 위로 예후르의 손이 올라왔다. 그 접촉마저 징그럽다는 듯 안드레아는 인상을 마구 구겼다.
“새끼야, 넌 이래서 안 되는 거야. 네가 지금 이런다고 페기가 고마워하기라도 할 것 같아? 씨발, 걔한테 제일 상처 준 게 누군데! 너잖아! 네가 그 앨 버렸잖아! 버려도 네 주위만 빙빙 맴돌 걸 알아서….”
커다란 손아귀에 안드레아의 얼굴이 잡혔다.
순식간에 둘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눈 깜짝할 새 벽에 처박힌 안드레아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의 손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외려 점점 강해지는 아귀힘에 머릿골이 빠개질 것만 같았다.
“…분수를 알아야지.”
고저 없는 목소리가 느리게 흘러나왔다.
“내가 지금껏 너를 못 잡아서 놔둔 것 같아?”
“시발, 잡을 수… 있었으면 왜….”
“내가 뭐 하러.”
“…….”
“네가 뭐라고.”
너 같은 버러지를.
예후르가 낮게 읊조렸다.
“어디 한번 또 해 봐. 네 사특한 재주로 어디까지 달아날 수 있는지 보자고.”
“…….”
“고작 네깟 게 내 눈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안드레아는 손톱을 세워 그의 손을 긁으며 몸부림쳤다. 거미처럼 벌어진 그의 손가락 사이로 증오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저 얼굴에 가면처럼 덧씌워진 차분함을 찢어,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을 만인에게 내보이고 싶었다.
그때, 차라가 달려와 그의 팔에 매달렸다. 울면서 악다구니를 썼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놔줘! 빨리 놓으라고!”
예후르는 가만히 고개를 기울여 차라를 보았다. 바짝 굳은 차라가 본능적으로 할딱할딱 숨을 들이켰다. 처음 보는 그의 눈빛에 절로 손이 떨렸다.
“제발.”
“…….”
“제발 놔줘, 예후르.”
예후르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안드레아는 머리를 감싸 쥐며 비틀비틀 주저앉았다. 차라가 황급히 그녀를 부축하는 사이, 예후르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골이 아픈지 한참이나 얼굴을 부여잡고 있던 안드레아가 살기등등하게 고개를 들었다. 시뻘게진 눈으로 예후르가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자, 덜컥 겁이 난 차라가 울먹이며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안드레아가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씨발, 꺼져!”
벌떡 일어난 안드레아가 반대편으로 가 버렸다. 그녀에게 밀쳐져 엉덩방아를 찧은 차라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멍하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곤 레오폴트가 있는 방 앞으로 갔다.
“…도련님.”
그러나 방문 앞을 지키고 선 왈테르는 침중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던 차라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곤 걸음을 옮겼다.
정처 없이 헤매던 발길은 내전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인적 없이 적요한 복도, 싸늘한 정원을 거쳐 문득 발이 멈춘 곳은 익숙한 방문 앞이었다. 차라는 살며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테라스로 이어지는 창문이 아주 큰 방이었다. 덕분에 눈부신 햇살이 방 깊숙한 곳까지 닿고, 싱그러운 꽃과 묘목이 화사하게 싹을 틔웠다. 고즈넉한 방 안에는 따스하고 정겨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 방의 주인도 꼭 그런 사람이었다.
초대받지 못한 사람처럼 어색하게 문가에 서 있던 차라가 천천히 발을 뗐다. 먼지 한 톨 없이 잘 관리된 피아노, 우아한 화장대, 기다란 거울. 하나씩 스쳐본 차라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햇빛에 바싹 마른 이불에서 그 애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미동 않던 차라가 돌연히 팔을 뻗어 베개를 끌어안았다. 그런데 베개의 감촉이 이상했다. 그는 엉거주춤 일어나 앉아, 베갯잇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웬 빳빳한 종이가 나왔다.
페기의 초상화였다.
꽃밭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은발의 소녀. 작고 여윈 듯하면서도 상냥한 분위기가 맴도는 자태.
그림 위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차라는 더듬더듬 얼굴을 감싸 쥐었다.
“바보….”
누가 봐도 조악한 솜씨. 그저 손 가는 대로 그린 것이었다. 누구에게 보이기도 민망한 그림을 천금 보물처럼 소중히 숨겨 놓은 꼴이 기가 막혔다.
이런 그림, 몇 번이고 더 그려 줄 수 있는데.
“보고 싶어….”
차라는 무릎을 감싸 안으며 엉엉 울었다. 이제는 이렇게 울어도 달래 줄 사람이 없다는 게 너무 서글퍼서. 고작 이만큼 살다 간 누이가 너무 안타까워서.
서러운 울음소리 가득한 방 안으로 파도처럼 햇살이 밀려들었다.
“여기서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근위 기사가 굳어 버린 진창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시 지하 감옥을 순찰하던 경비들은 모두 목이 졸려 사망했습니다. 하필 밤새 비가 내린 터라 감옥을 급습한 자들이 누구인지, 몇 명인지조차 불분명한 상황입니다.”
“…….”
“다만 이상한 점은 지하 감옥에 공작 전하께서 저항하신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전하를 밖으로 빼돌린 사람은 본디 전하와 안면이 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혹은 공작 전하께서 믿음을 가지실 만한 증표를 지니고 있었던가요.”
“사인은?”
“심장 관통입니다. 검처럼 날카로운 무기에 꿰뚫리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인과는 무관하지만 오른손이 완전히 부스러진 상태셨습니다.”
죽음과는 관계없이 신체를 그 지경으로 훼손하는 이유는 보통 두 가지로 압축된다.
본인을 향한 복수, 혹은 주변인들에게 고하는 경고.
“…시신을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기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끄러미 진창을 내려다보던 예후르가 말없이 등을 돌렸다.
멀리서 헉헉거리며 달려온 니체타가 경례를 하는 둥 마는 둥 겨우 멈춰 섰다.
“전하! 여기 계셨군요!”
무릎을 짚으며 거친 숨을 토한 니체타가 턱 아래 맺힌 땀을 닦으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저, 일단 용들은 든든히 먹이고 쉬게 했습니다. 몇 날 며칠 쉼 없이 날아서 그런가, 용이고 사람이고 죄다 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도 혹시 모르니 의사에게 상태를 보이시는 것이….”
“출발한다.”
“네?”
예후르는 싸늘하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니체타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출발한다고요? 어디로요?”
“동쪽으로.”
“네에? 지금 동쪽에서 날아온 거잖습니까! 전하? 전하!”
니체타가 황급히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위로 머잖아 순백의 용이 힘겹게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