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328)

자다가 깨어난 상태임에도 그는 드물게 활기가 넘쳐 보였다. 반짝이는 눈엔 총기가 넘치고, 만면에 의지가 엿보였다.

그래서 더더욱 고드릭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성하….”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고드릭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레오폴트가 깜짝 놀라 다가왔다.

“고드릭, 대체 무슨 일이냐.”

“성하, 그것이….”

고드릭이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레오폴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창백하게 질린 고드릭의 낯빛 위로 불빛이 불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고드릭이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레오폴트는 멍하니 눈을 떴다.

고드릭의 울음소리가 치솟았다. 멀리서 근위대가 급보를 들고 달려왔다. 휘청거리며 레오폴트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부축하려는 손길들이 사방에서 뻗쳐 왔다. 그 손길들에 매달려 레오폴트는 종잇장처럼 맥없이 흔들렸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것처럼.

***

여명이 밝았다.

어둠에 잠겨 있던 순백의 성벽 위로 붉은 서광이 드리워지고, 시푸른 새벽빛이 곳곳으로 번졌다. 밤의 장막이 걷히며 하늘은 점점 먼바다의 푸른 빛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즈음 새벽과 함께 깨어나는 다섯 명의 수도사들은 아직 어둠이 도사린 복도를 밟아 나왔다. 그림자 한 줌 없이 훤한 광장의 중앙에서 짧은 기도를 마치고 제각기 흩어졌다.

지상으로 사도를 내려보낸 천사 미할리나, 발레론, 마그누스, 이슬라의 이름을 내건 대성당들의 문이 열렸다. 어두침침한 성당 안에서 성스러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수도사는 성당의 문을 열지 못했다. 그는 우울한 얼굴로 닫힌 문 위에 빗장을 걸었다. 새로운 사도가 강림할 때까지 이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니.

쿵.

성 예리엘 대성당의 문이 잠겼다.

***

근위대의 부단장 왈테르는 성난 물소처럼 복도를 내달렸다. 여러 수도사와 기사들을 맨몸으로 튕겨 낸 그가 어느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단장님!”

우레 같은 목소리에 미란테가 얌전히 고개를 들었다. 시뻘게진 얼굴로 씩씩거리는 왈테르와 부서질 듯 흔들거리는 문고리를 차례로 본 그녀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또 하나 박살 냈군.”

“제가 방금 들은 게 사실이 아니라고 해 주십시오!”

“자네가 방금 무얼 들었는지 내 어찌 알겠나.”

미란테는 덤덤히 대꾸하며 마저 짐을 챙겼다. 멀거니 그녀의 모습을 응시하던 왈테르가 입매를 씰룩거리더니 쿵! 탁자를 내리쳤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건 단장님 요통 약이잖습니까! 하루도 이게 없으면 못 사시는 분이 이건 대체 왜 챙기고 계시냔 말입니다!”

미란테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금방이라도 터트릴 것처럼 약병을 움켜쥐고 있던 왈테르가 움찔하며 공손히 약병을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빨리 대답을 좀 해 주시면….”

“대답할 게 무어 있어. 이미 자네도 다 알고 왔는데.”

“그럼 제가 들은 게 진짜란 말입니까? 이대로 떠나신다고요?!”

우렁찬 외침에 미란테가 설핏 미간을 찡그렸다.

“그 목소리 좀 죽이게. 그리고 이만 떠나야지. 내 나이가 몇인데 언제까지 여기서 자네 뒤치다꺼리나 해야겠나.”

“안 됩니다! 절대 아니 됩니다! 이대로는 가실 수 없습니다!”

“…이상한 일이군. 자네는 늘 내 자리를 탐내지 않았나.”

미란테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왈테르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북받치는 감정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벌써 눈에 이슬이 맺혔다.

“저, 전 단장님의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겁니다. 이렇게 떠나시는 건 한 번도 바란 적이 없습니다. 평생을 근위대에 헌신하셨으면서 이렇게 불명예스럽게 퇴직하신다니요!”

“불명예스러운 일이 벌어졌지 않나.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지.”

“그러니까 그걸 왜 단장님 혼자 짊어지시느냔 말입니다!”

카니나의 페기가 죽었다.

화형이 언도되어 죽음이 예정되어 있었다곤 하나, 그런 참혹한 죽음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도 된 몸으로 죄를 범한 자. 성스러운 불꽃으로 그녀가 범한 죄를 씻어야 마땅했다.

“이대로 떠나시는 건 적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도 함께 책임을 지겠습니다. 저도 명색이 장미 기사단의 부단장이 아닙니까!”

“마음은 고맙네만, 거기까지만 하시게.”

“단장님!”

낡은 가방에 옷가지를 집어넣던 미란테가 재차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도 함께 책임을 지면, 근위대는 어쩌겠단 말이야.”

“그야….”

“믿을 만한 사람에게 잠시 맡기겠다고? 누구에게?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죄인이 아무도 모르게 죽었는데, 대관절 누굴 믿을 수 있겠나.”

왈테르는 망연자실 고개를 떨구었다. 지하 감옥은 근위대의 소관이었다. 범인을 특정할 순 없으나 근위대에 소속된 자가 분명했다.

미란테가 씁쓸한 얼굴로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차피 올해 안으로 은퇴할 생각이었어. 자네도 알지 않는가. 내 몸이 더 이상 기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

“자네는 잘할 거야. 자신을 믿게.”

그리고.

미란테가 문득 그의 고개를 끌어당겼다. 왈테르가 순순히 허리를 숙이자, 미란테는 숨겨 왔던 날카로운 눈빛을 드러내며 속삭였다.

“본시오를 조심하게.”

“본시오요? 마르코스 본시오?”

“그래, 그 괴짜 말이야.”

왈테르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본시오는 그 출신 말고는 흠잡을 데가 없는 기사였다. 평소엔 나사 하나 빠진 듯 굴어도 일 처리만큼은 말끔했기 때문이다.

“그놈이 차기 부단장이다.”

“네에?!”

“목소리 죽여. 원탁에서 그리 결정이 났어. 근위대원 상당수와 몇몇 추기경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더군.”

“근위대원 상당수요? 몇몇 추기경?”

왈테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본시오는 근위대에서 유명한 괴짜 기사였다.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만, 역으로 누구와도 친밀하지 않은 자였다.

“이제 좀 상황이 파악되나. 우린 그놈에게 단단히 놀아난 게야. 원탁에까지 연이 닿을 정도니, 아주 오랫동안 그 속에 검은 꿍꿍이를 품고 있었던 게지.”

미란테의 속삭임에는 언뜻 살기가 비쳤다. 왈테르는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전 그런 정치와는 거리가 멀고….”

“내가 자네를 모르겠나. 의심스럽다고 괜히 잔머리 굴리지 말게. 본시오처럼 약은 놈팡이한텐 단번에 속이 읽힐 테니.”

미란테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영 느낌이 안 좋아. 웬만하면 기밀은 자네가 직접 관리하게. 이미 자기편을 배신한 전적이 있는 놈이 우리 근위대라고 달리 여기겠나?”

왈테르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얼어붙은 표정을 본 미란테가 작게 웃으며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쳤다.

“내 종종 편지를 보낼 테니, 도저히 모르겠는 일이 있거든 연락하게. 뒷방 늙은이가 그 정도도 못 해 주겠나.”

“어, 어디로 가십니까?”

단출한 가방을 메며 미란테가 그를 돌아봤다.

“어디긴, 수도원으로 가지. 거기서 아이들이나 가르칠 생각이야. 어때,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지?”

“크흠….”

“기대하게. 자네 같은 인재가 있으면 꼭 자네처럼 가르쳐 보낼 테니. 그럼 자네도 내 심정을 이해하지 않겠나.”

그녀는 붙잡을 새도 없이 방문을 열고 나갔다. 문틈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왈테르가 허겁지겁 복도로 달려 나갔다.

“다시 뵙는 그 날까지 건강하십시오!”

왈테르가 눈물을 삼키며 마지막 경례를 했다. 미란테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 손만 흔들었다.

***

원탁회의는 조촐하게 끝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합시다.”

대리 의장 역할을 맡은 클레멘스는 말을 끝마치자마자 휑하니 나가 버렸다. 보나벤투라는 서류를 정리한 뒤 특유의 꼿꼿한 자세로 사라졌고, 아나클레토는 하품을 쩍쩍 날리며 어기적어기적 회의장을 나갔다.

솔란지아는 침울한 얼굴로 한참을 원탁에 앉아 있었다. 힘없이 돌아가려던 글리체리아가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빈자리가 많지요?”

솔란지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글리체리아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성하께선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시답니다. 당분간은 뵙기 어려울 거예요.”

그들의 시선이 가장 상석에 꽂혔다. 그러나 시계 방향으로 연이은 세 자리 역시 모두 공석이었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선….”

“감감무소식이라네요. 이 지경이 된 걸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한숨처럼 토로하던 글리체리아가 문득 작게 웃었다.

“사실 난 클레멘스가 오늘 네 번째 자리에 앉을 줄 알았습니다. 이젠 그가 원탁의 네 번째 서열이니까요. 그런데 당연하다는 듯이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자리를 비워 두더군요.”

“부질없는 짓입니다. 죄인의 죽음을 기려서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솔란지아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던 글리체리아가 툭툭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잠깐 걸읍시다.”

두 사람은 회의장을 나와 인적 드문 후원으로 향했다. 요사이 연이은 변고에도 정원수는 무성하게 녹음을 부풀리고 있었다. 바람결에 하늘거리는 나뭇잎을 올려다보며 글리체리아가 담담히 운을 뗐다.

“성하께서 돌아오시면 은퇴할 생각입니다.”

“네?!”

솔란지아가 경악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봤다.

“진심이에요. 주변에서 아무리 말려도 마음이 바뀔 일은 없을 겁니다.”

“글리체리아!”

“조카가 곧 라발의 대사로 옵니다.”

그 말에 솔란지아의 입술이 덜컥 다물렸다.

글리체리아는 라발의 명문인 피아제 백작가의 사람이었다. 다섯 손가락을 넘는 자매의 수만큼 조카도 많았으나, 라발의 대사로 올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한 달 전, 큰언니의 지병이 다시 도져 조카가 작위를 계승했다고 하더군요. 영민한 아이니 일국의 대사로도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겠지만, 라발쯤 되는 대국의 대사와 가까운 혈족이 원탁에 뻔히 앉아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전례가 없던 일도 아닙니다. 굳이 그대가 물러날 이유는….”

“아니요, 물러나야 합니다.”

글리체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엄중한 그녀의 눈빛을 보고 솔란지아는 우물쭈물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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