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328)

아직도 머리 위에선 쿵쿵거리는 군홧발 소리와 비명인지 고함인지 모를 소리들이 간간이 꽂히고 있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그 모든 소리들이 이젠 저에게로 쏟아져 닥치는 듯했다. 그 모두가 저의 목숨을 노리는 창날이었다.

“가련한 내 딸. 아비를 잘못 만난 죄로 이리 고초를 겪는구나.”

레오폴트가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말거라. 내 어찌 너 혼자만 보내겠느냐.”

뭉뚝하게 동여맨 그의 손끝이 페기의 눈물 젖은 뺨을 스쳤다.

“먼저 가서 기다리려무나.”

“…….”

“내 곧 너의 뒤를 따를 터이니, 거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렴. 저세상에선 너를 외롭게 두지 않으마.”

절망으로 물든 페기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레오폴트는 괴롭게 고개를 돌렸다. 이 악물고 일어서는 그를 페기가 뜯어말렸다.

“레오, 안 돼요, 가지 마요.”

제발, 제발, 제발. 미친 듯이 입술이 달싹였다. 멀어지는 그를 잡으려 철창문을 밀고 나가려 했지만, 간수가 자물쇠를 채워 넣는 것이 더 빨랐다.

페기는 눈물을 흩뿌리며 철창문을 마구 흔들었다. 비틀비틀 어둠에 먹히는 레오폴트의 뒷모습을 향해 목놓아 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옥 밖에는 고드릭과 미란테가 긴장된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오폴트는 실핏줄이 죄 터져 붉어진 눈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가면 속 입술이 몇 차례 여닫혔으나 어떤 소리도 맺지 못했다. 대신 그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깊숙이 고개 숙인 고드릭이 그의 칙령을 알리기 위해 뛰어나갔다.

카니나의 페기를 화형에 처한다.

교황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내전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성직자들이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성문 앞에서 격렬하게 맞붙던 시민들과 근위대가 얼빠진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나 모두에게 희소식은 아니었다.

아뎃사의 차라는 그 소식을 듣기 무섭게 방을 뛰쳐나갔다. 하지만 미리 명령을 전해 받은 근위대가 그를 붙잡아 침실로 끌고 갔다. 그는 화형이 끝나기 전까지 침실에서 나올 수 없었다.

원탁에는 희비가 엇갈렸다.

만족하는 자는 처음부터 그녀의 화형을 줄기차게 주장하던 보나벤투라와 아나클레토였다. 솔란지아는 그보단 못해도 내심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아 다행으로 여겼고, 글리체리아는 괴로움에 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술병을 땄다. 오직 클레멘스만이 침묵을 견지했다.

소요가 잦아든 성도에는 다시금 사교 모임이 꽃을 피웠다. 성스러운 불의 사도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은 신성 모독이나, 타락하여 곧 죽게 될 사도는 도리어 욕보이는 것이 마땅하게 여겨졌다.

그간 입이 근질거렸던 호사가들이 분을 못 참고 온갖 상스러운 말을 터트려 댔다.

“지금껏 그따위 년이 사도랍시고 고개 빳빳이 세우고 다녔던 걸 생각하면 속이 거꾸로 뒤집힙니다. 그년의 어미라고 나오던 것들이 죄 천한 창녀였던 걸 떠올리면, 사실상 뻔한 결과 아닙니까?”

많은 귀족들이 그 말에 고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중에는 각국의 대사들도 있었다. 탐보프 대사인 퓌슬러 백작이 특히 카니나의 페기를 빙자하여 사도를 모욕하는 말들을 기껍게 들었다.

교황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화형 준비는 차질 없이 이루어졌다. 원탁 추기경 보나벤투라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화형은 성 밖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타락이 얼마나 무서운지, 하늘에 계신 천사의 뜻이 얼마나 엄중한지 본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사도의 타락이 정화될 것입니다.”

보나벤투라가 하늘을 우러르며 말했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소명의 천사 예리엘의 뜻에 따라 우리 원탁이 타락한 교회를 바로잡을 것입니다.”

극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만인이 반기는 결과였다. 만인이 옳다고 믿는 정의의 길이기도 했다.

그동안 페기는 차가운 돌바닥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이 수없이 지나간 뺨 위로 새로운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말라붙은 눈을 느리게 깜박이던 그녀는 이내 고단한 듯이 눈을 내리감았다.

누군가는 분루를 삼키기 바쁘고, 누군가는 기쁨에 몸을 던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암막 속에서 바삐 움직일 때.

마침내 뱀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

“니체타!”

초조하게 성당 앞을 서성이던 니체타는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빗속을 뚫고 달려온 클로디아가 후드를 벗으며 다가왔다.

“전하는?”

“아직. 자작은 뭐래?”

클로디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니체타는 앓는 소리를 내며 뒷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젠장, 왜 하필 전하께서 안 계실 때…. 성궁 상황은? 많이 심각하대?”

“원탁은 이미 화형을 결정했나 봐. 성하께선 침묵하고 계시다는데, 자작이 말하는 투로 봐선 길게 버티지 못하실 것 같아.”

“망할! 뱀은 여기 있는데 왜 거기서 난리…!”

느닷없는 큰 소리에 골목에서 그들을 엿보던 아이들이 흠칫했다.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시가지 주위로 모인 사람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클로디아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니체타를 끌고 성당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빗물에 젖은 적갈색 머리를 탈탈 털며 늙은 사제에게 다가갔다.

“사제님, 자작님도 폐쇄된 지하 수로로 들어가는 길은 또 없다고 하시네요. 혹시 성당의 설계 도면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런 건 보통 보좌 사제가 관리하는데, 지난달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추기경 임명식에 갔다가 아직 돌아오질 않고 있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클로디아와 니체타가 넌지시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무래도 이 늙은 사제는 성궁의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저, 그런데 정말 지하 수로에 뱀이 숨어 있는 겁니까?”

사제가 머뭇머뭇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니체타는 재빨리 쾌활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휴, 그거야 저희도 모르죠. 아까 보셨잖아요. 전하께서 그냥 다녀오겠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들어가신 거.”

“그렇지요? 하긴, 이 작은 도시에 무슨 볼일이 있으려고요. 걱정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얼른 알려 줘야겠습니다.”

사제는 금방 화색이 도는 얼굴로 성당을 나갔다. 니체타는 조금 양심에 찔린 표정으로 한숨을 삼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아래 뱀이 있는 게 분명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공작이 그렇게 홀연히 사라질 리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작이 들어간 뒤, 저 낡은 문은 꿈쩍도 안 하고 있고.

니체타는 소성당으로 들어가 공연히 문을 발로 툭툭 찼다. 길게 땋은 머리를 모아 물기를 짜던 클로디아가 그 모습을 보고 비웃음을 지었다.

“그런다고 그게 열리겠니?”

“걱정되는 걸 어떡하라고.”

“전하가 보통 사람이야? 전하께서 당하시면 우리도 가망 없는 거니까, 잔말 말고 기도나 해. 마침 저기 제단도 있….”

니체타의 귀를 잡고 질질 끌고 가던 클로디아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아야야 소리를 내던 니체타가 그녀의 시선이 못 박힌 제단 앞쪽을 보곤 조금 난처한 얼굴을 했다.

“맞다. 얘기하는 걸 깜빡 잊었네.”

어두침침한 성당 안에서 유일하게 촛불로 밝혀 놓은 제단 앞에 한 여자가 무릎 꿇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늘어트린 금발과 어지러이 수놓인 옷자락이 보기 드물게 화려했다.

“저 여자가 왜 여기 있어?”

“그게….”

“너 미쳤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여!”

“아, 그럼 갑자기 찾아왔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그냥 내쫓아? 나중에 전하랑 결혼할지도 모르는 아가씬데?”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던 니체타는 불현듯 느껴지는 시선에 뻑뻑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세도파가 조용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속으로 뇌까린 니체타가 애써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 아가씨.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시죠?”

“네.”

세도파가 치맛자락을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방금 하신 말씀 틀렸어요.”

“네?”

“나중에 전하랑 결혼할지도 모르는 아가씨가 아니라, 곧 전하와 결혼할 아가씨예요.”

니체타는 바보처럼 눈만 끔벅였다. 젖은 머리를 휙 어깨 뒤로 넘기며 클로디아가 걸어왔다.

“그거야 지금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요. 저희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게 지금 중요한 문제에요?”

“당연하죠. 저희는 지금 교국의 가장 중요한 군사 작전을 수행하고 있어요. 어디까지나 타국의 귀족이신 세도파 아가씨께서 어떻게 기밀 정보를 얻으셨는지, 낱낱이 밝혀낼 의무가 있습니다.”

클로디아의 매서운 반론에 니체타는 입 안에서만 옳소, 하고 웅얼거렸다. 세도파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막 떼려는 순간이었다.

끼이이익.

녹슨 경첩이 우는 소리에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소성당 안에 숨겨진 문이 뻑뻑하게 열리고 있었다. 세도파가 가장 먼저 튀어 나갔다.

“전하!”

문밖으로 나오던 예후르는 갑작스레 제 품으로 돌진하는 세도파를 잡으며 휘청거렸다. 니체타와 클로디아도 황급히 그에게 달려갔다.

“전하, 괜찮으세요?!”

“뱀은 어떻게 됐습니까!”

예후르는 그저 멍한 눈으로 그들을 보기만 했다. 늘 칼날처럼 세워져 있던 이성이 모조리 무너진 듯했다. 그토록 무력해 보이는 모습에 니체타와 클로디아는 순간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때, 세도파가 흐느낌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뺨을 잡아 내려 입술을 맞추었다.

경악은 시간차로 퍼졌다. 니체타와 클로디아가 얼어붙은 사이, 예후르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세도파를 밀어냈다. 호박색 눈 한가득 혼란이 가득했다.

“이게 무슨….”

깍! 까악!

추적추적 비 내리는 창밖에서 까마귀 떼가 퍼드덕 날아올랐다. 예후르는 번개처럼 창가를 돌아보았다.

빗줄기와 먹구름에 가려 노을조차 번지지 않는 어슴푸레한 늦저녁. 몰려오는 땅거미에 불길함이 섞여 들었다. 오금을 타고 오르는 액운이 뱀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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