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별안간 멀리서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오폴트는 황망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붉은 화염이 넘실거리며 밤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그 머나먼 광경 위로 새카맣게 불타오르던 수십 년 전 성도의 시가지가 겹쳐졌다.
“영감님….”
재촉하듯 안드레아가 그의 손을 붙들었다. 레오폴트는 붉은 빛이 일렁이는 그녀의 얼굴을 멀거니 들여다보았다.
페기와 견주던 교국의 저울 위로 안드레아가 얹혔다. 차라가 얹혔다. 수많은 목숨들이 얹혔다.
그리고 30년 전의 그날이 얹혔다.
지축이 뒤흔들리는 듯한 폭발음이 무색하게도 사위는 다시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속절없이 철창 너머만 기웃거리던 페기는 곧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제자리로 돌아왔다.
요 며칠, 성궁은 시도 때도 없이 시끄러웠다. 그녀가 갇힌 지하 감옥으로 정확한 소리가 전달되진 않았으나, 직감적으로 자신과 관련된 일임을 알아챘다. 짐작건대 저를 살리려는 레오폴트에 대항해 많은 사람들이 들고일어난 것일 터.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이 지하 감옥에 침입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만난 사람이라곤 가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러 오는 왈테르 경과 세 끼 식사를 가져오는 간수가 전부였다.
모두 잘 풀릴 거라는 왈테르 경의 위로도 이젠 반갑지 않았다. 대책 없이 낙관적인 말보단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말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정확한 현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페기는 한숨을 집어삼키며 차가운 돌바닥 위로 조심스레 머리를 누였다. 제대로 잠들었던 날이 요원한데도 졸리긴커녕 두 눈이 말똥말똥했다. 창살 바깥에 걸린 횃불을 가만히 응시하며 그녀는 바깥의 소리에 집중했다.
쿵쿵거리는 군홧발 소리, 비명인지 고함인지 모를 높은 소리, 웅웅거리며 건물 전체를 울리는 진동과 온몸을 좨치듯 둔탁한 타격음.
그 사이로 문득, 돌계단을 밟아 내려오는 은밀한 발소리가 스며들었다.
페기는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횃불이 닿지 못하는 저 먼 어둠 속에서 누군가 깊디깊은 이곳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누굴까. 간수의 발소리는 이보다 더디고, 왈테르 경의 발소리는 이보다 무겁다. 누굴까. 혹시 날 잡으러 온 시위대인가. 지하에 숨은 날 끄집어내 발가벗겨 불 지르려나.
어느덧 계단을 다 내려온 불청객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횃불 아래 그이의 모습이 드러나자, 페기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안드레아였다.
횃불보다 붉은 머리칼을 치렁치렁 늘어트린 안드레아가 조용히 쇠창살 앞에 섰다. 페기는 돌바닥을 짚고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언제 돌아온 거야? 얼굴이 많이 상했네.”
페기는 안타까운 듯이 검댕이 묻은 안드레아의 뺨을 살살 문질렀다. 안드레아가 픽 웃으며 고개를 틀었다.
“하여간에 이놈이나 저놈이나 착해 빠져선….”
“응?”
“남 걱정할 시간에 네 걱정이나 해. 도대체 감옥에 갇힌 게 누군지 모르겠다.”
가시 없는 타박에 페기가 민망한 듯이 웃었다.
“놀랐지?”
“누군들 안 놀랐겠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라는데.”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페기는 솔기가 터진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부끄러운 꼴을 하고도 안드레아가 반가운 마음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물끄러미 그녀의 모습을 응시하던 안드레아가 주머니에서 찰캉거리는 쇠붙이를 꺼내 들었다.
“이만 나가자.”
안드레아는 자물쇠를 잡고 몇 번 손을 움직이더니, 철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페기는 열린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안 나오고 뭐 해?”
안드레아가 문가를 고갯짓했다. 페기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열린 문과 그녀를 번갈아 봤다.
“나가도 돼…?”
“안 나가면, 뭐. 거기서 뒈지려고?”
“…….”
“됐으니까 빨리 나와. 사람은 어울리는 데 있어야지. 너랑 이 어두침침한 감옥이랑 진짜 안 어울리는 거 알아?”
안드레아는 재촉하듯 손을 흔들었다.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뗐던 페기가 도로 망설이며 발을 뒤로 물렸다.
“아니야. 내가 이렇게 사라져 버리면 레오한테 더 폐가 될 거야.”
“…미치겠네. 너나 영감님이나 왜 그렇게 남부터 걱정하냐? 보고 배운 게 그거야?”
한숨을 푹 내쉰 안드레아가 양손을 허리에 올렸다.
“이보세요, 아가씨. 지금 죽게 생긴 건 너야. 네 목부터 좀 걱정해. 그렇게 미적거리다 진짜로 타 죽고 싶어? 어?”
“하지만….”
“하지만이고 나발이고, 네 존재 자체가 영감님한텐 이미 민폐야. 너 지금 바깥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 성도의 시민들이 죄다 들고일어났다니까? 영감님이 성벽 위에서 손만 흔들어도 좋아 죽던 사람들이 너 하나 죽이겠다고 벌 떼처럼 성문 앞으로 몰려들었다고.”
페기의 눈이 충격으로 굳었다. 성도의 시민들은 레오폴트의 말 한마디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고작 저 때문에 레오폴트에게 반기를 들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성밖에서 폭동이라도 일어난 거야?”
“그래, 폭동은 진작 일어났지. 이제 상황을 좀 알겠어?”
안드레아는 철창 사이로 팔을 꿰어 불량하게 몸을 기대었다.
“너 여기 있는다고 영감님한테 좋을 거 하나 없다? 그러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 내가 너 대신할 시체도 하나 구해 왔어. 나가면서 여기 불만 지르면 끝이야. 넌 불에 타 죽는 거고, 영감님은 더 이상 네 문제로 골머리 앓을 일 없고, 사람들은 네가 죽어서 좋고. 어때?”
“…내가 죽는다고?”
“그래. 카니나의 페기는 사라지고, 새로운 네가 탄생하는 거지. 이제 사도니 성궁이니 하는 거에 얽매일 필요 없어. 네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대로 살면 돼. 좋잖아, 자유.”
안드레아가 양팔을 퍼덕이며 날아가는 시늉을 했다. 페기는 묘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더는 지금의 나로 살지 못하는 거지?”
“그거야 그렇지. 새로운 신분 만드는 건 간단해. 내가 도와줄게.”
“더는 여기서 살지 못하는 거고.”
“마침 잘됐잖냐. 너도 여기 지겹지 않아?”
“더는 레오랑 예후르랑 차라를 보지 못하겠네.”
“아… 그건 좀 어려운 문제긴 하다. 나중에라도 기회가 있겠지.”
“한마디로 평생 도망쳐 살아야 한다는 거구나.”
잘도 나불거리던 안드레아의 입술이 닫혔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페기는 설핏 미소 지었다. 발밑에서 익숙한 악취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카니나의 뒷골목 같은 곳을 누비며 살아야 한다거나.”
평생 도망자의 삶일 것이다.
제 얼굴을 아는 사람들로부터 달아나고, 지금까지 쌓아 온 연들을 한순간에 끊어 내야 할 것이다. 새로 만나는 그 누구에게도 제 이름과 과거를 밝히지 못한 채, 지난 스무 해를 홀로 끌어안고 무덤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괜찮다. 힘들어도 그렇게 살 수는 있다. 레오폴트도, 예후르도, 차라도. 살아만 있으면 언젠간 만날 수 있겠거니 여기며 기약할 수 없는 언젠가를 꿈꾸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악취가 피어오르는 그곳은 안 된다.
나는 평생 거기서 도망쳐 왔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야. 너라고 못 살 게 뭐 있는데, 응? 너 정말 이런 데서 죽고 싶어?”
안드레아가 매달리듯 철창을 꽉 쥐었다.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던 페기가 결심한 듯이 발걸음을 떼어 자박자박 철창문 앞으로 왔다. 그러곤 손을 들어 문을 닫았다.
“맞아, 살 수 있어.”
“…….”
“그런데 사람으로는 못 살아.”
철창 너머에서 페기가 희게 웃었다. 안드레아의 얼굴 근육이 경련하듯 떨렸다. 그녀가 팔을 홱 집어넣어 페기의 멱살을 잡았다.
“시발, 그럼 여기서 죽겠다고? 내가 너 죽는 꼴 보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사람으로 못 살면 좀 어때서! 개똥밭이든 흙탕물이든 구르면서 살란 말이야!”
“하하하.”
종잇장처럼 흔들리던 페기의 입술에서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멱살을 쥐고 흔들던 안드레아가 망연히 손을 멈추었다. 페기의 고개가 맥없이 뒤로 꺾여 있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난 이가 유달리 희었다.
“네가 뭘 알아.”
“…….”
“넌 거기서 살아 본 적이 없잖아. 그저 방랑하는 거잖아. 너한텐 방랑이 삶이지. 거기 사람들한텐 방랑도 꿈이야. 벗어날 수 없는 수렁을 네가 알아?”
나는 안다.
살아 있음이 삶이 되지 못하던 응달을.
“난 거기서 시궁쥐로 살았어. 쓰레기 더미나 파고들던 더러운 시궁쥐가 여기 와서야 겨우 사람 꼴이 된 거야. 그런데 이번엔 또 무슨 짐승이 되라고 날 여기서 끌어내. 네가 무슨 자격으로? 네가 뭐라고?”
“너….”
멱살을 쥔 안드레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페기가 발작하듯 웃었다.
“그래, 나도 이제 커서 쥐 새끼는 못 되겠다. 그럼 뭐가 될 수 있을까? 내 엄마란 작자들처럼 몸 파는 씨암말이나 되어 볼까? 아니면 네가 적선하듯 내어 주는 돈으로 그 사람들을 부리는 건? 이것도 아니야? 그럼? 아무도 모르는 곳에 처박혀서 혼자 죽어 버려?”
“…….”
“난 그렇게 못 살아. 내가 어떻게 거기서 도망쳤는데. 죽어도 사람으로 죽고 싶은 게,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가끔 생각하곤 했다.
그때, 천사의 계시를 받지 못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십중팔구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죽었을 것이다. 설령 살아 남았더라도 사람 사는 모습은 아니었으리라. 시궁쥐가 커 봤자 남의 것 갉아먹는 좀도둑인 것처럼, 남의 것으로 연명하며 버러지 같은 목숨을 부지했으리라.
참으로 죽는 편이 나은 인생 아닌가.
안드레아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그녀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게 페기를 보았다.
“내가 왜 왔는지 모르겠다. 고작 이런 년 하나 구하겠다고….”
멍하니 중얼거리던 안드레아가 갑자기 인상을 왈칵 구겼다. 눈빛이 자못 살벌했다.
“너, 죽을 각오는 돼 있냐?”
“…….”
“속으론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 아냐. 영감님이 날 버릴 리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날 구해 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거기서 버티고 있는 거잖아.”
페기는 그저 가만히 시선만 보내왔다.
“가.”
“미친년! 내가 너 예후르 그 새끼 졸졸 따라다닐 때부터 알아봤지! 넌 아무것도 아니야! 늙어 죽어 가는 영감님 골수나 파먹는 기생충이라고! 알아?!”
안드레아가 휘청거리며 쏘아붙였다.
“그냥 죽어! 죽어 버려! 너 같은 건 그냥 죽는 게 나아! 불에 타 죽든, 거기서 고꾸라지든 알아서 죽어 버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