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의 투쟁이 그치질 않자, 레오폴트는 몸소 성문 앞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고드릭을 비롯한 측근들이 그를 뜯어말렸다. 이미 그가 나선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저들은 폭도입니다. 몸도 성치 않으신 분께서 어찌 창칼이 넘나드는 곳으로 가려 하십니까!”
교황을 구하겠단 일념으로 일어섰던 이들이 이젠 도시를 부수고 같은 시민들을 약탈하고 있었다. 성도 곳곳에서 불이 오르고 비명이 빗발쳤다. 용병대의 군홧발 아래 짓밟혔던 30년 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레오폴트는 망연자실하여 주저앉았다. 그저 죄 없는 딸을 구하고자 했던 노력이 철 지난 악몽을 재현하고 있었다.
“어찌… 어찌 일이 이렇게 흘러간단 말이냐.”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성문 앞에 쌓인 송장이 늘어날수록 시민들의 분노는 거세어져만 갔고, 적군이 아닌 시민을 겨누며 근위대는 빠르게 신념을 잃어 갔다. 수십 년간 근위대를 통솔했던 미란테조차 그들을 보듬지 못했다. 차라리 적군이면 맹렬히 싸우다 전사하겠다며 칼을 내던지는 자들이 늘어났다.
원탁은 그 모든 것을 방관했다. 원탁의 세력을 기반으로 나누어진 성직자들 역시 시민들의 폭동에 발맞추어 레오폴트를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자 원탁 추기경들과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던 각국의 대사들도 하나둘 성명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침묵하는 클레멘스를 따라 미적지근한 라발과 달리, 레오폴트를 잃을 수 없는 탐보프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선언했다.
“성도의 시민들이 스스로 일어섰다. 하늘의 천사께서 그들의 앞날을 밝히실 것이다.”
30년 전, 군홧발에 짓밟혔던 도시가 시민들의 발아래 짓이겨졌다. 레오폴트가 결벽주의적으로 지워 나갔던 지난 참극의 상처 위로 새로운 상흔이 새겨졌다.
거룩한 새벽의 도시 오스피나는 온데간데없었다. 부연 연기로 뒤덮인 하늘 아래 남은 것은 광적으로 자해를 거듭하는 무법 지대뿐이었다.
“하늘의 여덟 천사여. 부디 오스피나를 돌보소서.”
누군가의 흐느끼는 기도가 덧없이 사그라지던 때.
전의를 잃은 근위대와 악만 남은 폭도들 사이로 교묘히 섞여 드는 자가 있었다. 익숙하게 성벽을 타고 넘어 그림자처럼 내전으로 숨어드는 한 사람.
이멘바흐의 안드레아였다.
“…곧 성문이 무너질지도….”
“…세투발로 파발을….”
“…지금 원탁이 모여….”
레오폴트는 어느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사방이 어두운 야밤이었다. 잠결에 무거운 머리를 흔들며 윗몸을 일으켜 앉자, 말소리가 뚝 끊기며 타닥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성하, 깨어나셨습니까.”
고드릭이 천개(天蓋)를 걷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가 들고 온 촛불에 눈이 부셔 오만상을 찌푸리던 레오폴트가 큼큼거리며 잠긴 목을 열었다.
“물을 좀 다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 시끄러운 게야.”
“아, 그것이 실은….”
고드릭의 등 뒤로 불쑥 키 큰 인영이 나타났다. 레오폴트는 물을 마시던 그대로 굳었다. 당황한 고드릭이 황급히 제 몸으로 레오폴트의 민낯을 가리며 더듬더듬 가면을 씌워 주었다.
“마, 마가 공작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바깥 상황이 워낙 급박하여 무례인 줄 알면서도 침실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부디 놀라지 마시고….”
“그만. 이제부터 내가 말할 테니까 나가 봐요.”
안드레아가 침대맡으로 의자를 끌고 와 털썩 주저앉았다. 얼결에 그녀에게 밀쳐진 고드릭이 잠시 머뭇거리다 촛대를 두고 침실을 나갔다.
눈썹을 매만지며 말을 고르던 안드레아가 드물게 신중히 입을 열었다.
“성궁이 어떤 상황인지 대충 얘기는 들었어요. 원탁이랑 아예 척을 졌다면서요. 다른 성직자들도 대부분 원탁 편이고.”
생각만으로도 속이 쓰린 상황이었지만, 막 잠에서 깨어난 탓인지 레오폴트는 조금 멍한 기색이었다. 묘하게 끝이 상한 적발, 그을음이 옅게 남은 뺨, 피곤이 얹힌 눈두덩. 촛불이 일렁이는 안드레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는 문득 코끝을 스치는 탄내를 느꼈다.
“넌 괜찮은 게지?”
“…하, 지금 내 걱정을 하는 거예요? 하다 하다 걱정할 사람이 없어서.”
“너는 늘 내 걱정거리다. 네가 더 나이 먹어 머리가 희끗희끗해져도 마찬가지일 게야.”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잠자코 듣던 안드레아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평소처럼 방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자세에서 묘하게 초조한 기색이 묻어났다.
“됐고, 날 걱정할 여력이 있으면 당신 스스로나 좀 걱정해요. 도대체 지금 바깥이 어떤 상황인지 알기나 해요?”
레오폴트는 말없이 눈만 느리게 껌벅였다. 순간적으로 욱한 안드레아가 언성을 높였다.
“눈이 있으면 저 성 밖을 좀 보라고요! 도시가 완전히 망가지고 있잖아! 지금이 무슨 30년 전이에요? 라발이 쳐들어오기라도 했나? 그냥 지들끼리 미쳐서 쳐부수고 다니는 건데 왜 못 막고 있어요! 일을 왜 이 지경으로 만들었냐고요!”
“지금껏 나와 함께 난관을 넘어온 시민들이다. 날 지키고자 하는 자들을 어찌 함부로 죽이라 할 수 있겠느냐.”
“말은 똑바로 해요! 안 죽이는 게 아니지, 못 죽이는 거잖아!”
안드레아가 외궁을 가리켰다.
“내전 밖으로 나가 보긴 했어요? 성직자들이 내전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어서 못 나갔다, 이런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은 관두고. 그 미친 새끼들 다 쓸어 버리고 나가면 됐잖아. 그리고 나가서 상황이 어떤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잖아요. 지금 성 밖이 어떤지, 근위대는 어떤 상황인지!”
“…….”
“더 이상 못 버텨요. 근위대? 걔넨 믿음으로 움직이는 작자들이에요. 황제의 명이면 당신 목도 따다 바칠 그런 충성스러운 기사가 아니라고. 막말로 살인해도 되는 성직자들이 하늘의 뜻을 등진 당신 말을 그리 열성적으로 따르겠어요? 저기, 저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대가 휑하니 비어 있는데?”
흔히 말하길 성궁의 근위대를 맡은 장미 기사단은 광신도들의 모임. 누구보다 신실한 그네들은 카니나의 페기를 벌하기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겠으나, 그녀를 보호하란 명령에는 시골 자경단보다 약해졌다.
“걔넬 믿지 마요. 당장 지금이라도 당신을 향해 칼을 겨눌 놈들이 바로 걔네란 말이에요. 언제 적이 될지 모르는 놈들한테 집을 지키라고 해 놓은 격이라고요, 지금!”
갑갑하다는 듯 안드레아가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실제로 그녀가 보고 온 근위대원들은 하나같이 눈에서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흔들리는 믿음을 방증하듯 시위를 잡은 손끝이 흔들리고, 화살은 엉뚱한 데로 날아가 박혔다.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그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미란테 경이 있는데….”
“젠장맞을! 그 여자가 무슨 전지전능한 존재예요? 내가 보고 왔다잖아요! 근위대가 지금 어쩌고 있는지! 저 밖이 어떤지!”
안드레아가 살벌하게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리고 씹어 뱉듯 뇌까렸다.
“치안 대장이 죽었어요.”
“그게 무슨….”
가면 속 연옥색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아직도 밖에선 상황 파악이 잘 안 됐을 거예요. 아마 날이 밝아야 시신이 수습되고 당신한테도 소식이 전해지겠죠. 그런데 내가, 내 이 두 눈이 똑똑히 봤어요. 미쳐 날뛰던 폭도한테 치안 대장 머릿골이 빠개졌다고요.”
성궁을 지키는 근위대가 흔들리고, 성 밖을 수습해야 하는 치안대는 구심점을 잃었다. 상상도 못 한 상황에 레오폴트는 연이어 가쁜 숨만 내뱉었다.
“세투발… 세투발로 파발을 보내야겠다. 당장 칼라한에게 성도로 올라오라 전해야….”
“맙소사, 내전이라도 벌일 생각이에요? 지금 이 상황에 경비대까지 끌어들이면 어쩌겠단 건데요. 저 밖의 미친놈들이 경비대라고 넙죽 엎드리겠어요? 피부 검은 이교도들, 이참에 몰아내자고 선동할 놈들이 진정 없을 것 같아요?”
안드레아는 벌벌 떨리는 레오폴트의 손을 억지로 잡아 내렸다. 그리고 그 손에 이마를 비비며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제발, 영감님, 제발요. 부질없는 희망은 그만 버려요. 당신은 할 만큼 했어요. 평생을 바쳐 지켜 왔던 걸 지켜야죠.”
“그게 무슨 소리냐…?”
“무슨 소린지 알잖아요.”
어둠에 잠긴 벽안이 가만히 그와 눈을 맞춰 왔다. 레오폴트가 발작적으로 그녀의 손을 내쳤다. 몽롱하게 흔들리던 연옥색 눈에 노여움이 끓어 넘쳤다.
“감히 너까지 그런 말을 해! 네 동생이다! 10년을 돌본 네 동생이야!”
“그래서요.”
차가운 반문에 레오폴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울렁거리는 속에서 울음기가 치받혔다.
“너도… 페기를 아끼지 않았느냐. 불쌍한 아이란 걸 너도 알아. 그런데 어찌, 어찌해 그 가여운 아이를 버리라고 나한테….”
“알아요. 가엾고 착한 아이인 거.”
“…….”
“그런데 나한텐 영감님이 더 소중해요.”
그리고 영감님보단 내가 더 소중하고.
안드레아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어요. 이렇게 타고난 걸 어떡하라고. 그런데 영감님, 당신은 나랑 한 약속 지켜야지. 날 무사히 성가의 족보에서 지워 주기로 했잖아요. 다치지 않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한순간에 부모를 잃고 고아원으로 내돌려졌던 어떤 아이. 작고 거친 손을 쓰다듬으며 그리 말했었다.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게 해 주마. 내 품으로 감싸 행복을 찾게 해 주마.
“나뿐만이 아니에요. 차라, 그 어린애는 어쩔 건데요. 저대로 폭도들이 성문을 넘으면 그 애라고 멀쩡할 것 같아요? 당신이 겪었던 그 끔찍한 고통, 그 어린놈한테도 물려줄 거예요?”
레오폴트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서서히 침몰하는 그의 등을 굽어보며 안드레아는 씁쓸하게 읊조렸다.
“…지켜야 할 사람이 페기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침대에 엎드린 채로 레오폴트는 가만히 숨만 몰아쉬었다. 기억 속 많은 순간들이 번잡하게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제네로사의 목이 떨어지던 순간, 꿈길을 따라 사막에 이른 순간, 고아원에서 안드레아와 직면한 순간, 어린 페기가 그에게 처음 웃어 준 순간, 차라가 친부모의 손을 놓지 못하고 울던 순간.
“레오폴트, 나의 어린아이여.”
그분을 처음으로 뵌 순간.
“이제 괜찮습니다.”
야속하신 분.
어찌 이 순간 나를 떠나 계십니까. 어찌해 이 험난한 순간을 나 홀로 짊어지라 하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