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밖에서마저 소요가 일자, 자연스레 원탁 추기경들이 모였다. 밤샘 시위를 주도했던 보나벤투라는 계속된 취조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 정력적으로 나섰다.
“다들 아시겠지만 일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성하께선 귀를 막으셨고, 근위대는 말이 통하질 않습니다. 하지만 성 안팎의 여론이 모두 우리 편이에요! 성직자들과 시민들이 우리의 뒤를 따를 것이니, 두려움 없이 옳은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옳은 길을 성하께서 막고 계시니 문제지요. 우리가 직접 장작을 쌓고 기름을 부은들, 불태울 죄인이 근위대에 손아귀에 있는데 어찌 잡아 온단 말입니까?”
아나클레토가 한가롭게 손톱이나 보며 말했다. 밤샘 시위는커녕 요 며칠 저택에서 놀고먹느라 낯짝에 기름이 줄줄 흘렀다.
“우선 성하를 설득해 봐야지요. 아니면 최후의 수단으로 근위 대장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허! 그 꼬장꼬장한 늙은이가 잘도 성하의 명령을 거스르겠습니다. 행여나 그 늙은이가 우리 편으로 들어오는 날엔 내 이 추기경 자리를 내놓도록 하지요!”
“…농담으로도 그런 말은 삼가세요. 원탁 추기경 자리가 그리 가볍습니까?”
아나클레토를 흘기며 핀잔을 준 솔란지아가 심란한 눈으로 보나벤투라를 보았다.
“성하는 물론이고, 미란테 경도 설득이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무슨 묘책이라도 있습니까?”
“입궁하는 길에 들어 보니 카타리나 공작이 뱀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그 소문이 공작과 아주 가까운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요?”
솔란지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보나벤투라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알틴의 말입니다.”
“알틴이라면 설마….”
좌중이 잠시 시끄러워졌다. 알틴은 5년이나 페기를 가까이서 보필한 측근 하녀였다. 어쩌면 교황이나 엘피도 공작보다 그녀를 더 잘 알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하녀는 성하의 시해 미수범이 아닙니까? 감금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글리체리아의 날카로운 지적에 솔란지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그런 중죄인이 풀려났을 리는 없고.”
“감시가 소홀해진 틈에 달아났다고 합니다. 근위대가 그녀의 신병을 다시 확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하니, 일단 그 건은 근위대에게 맡깁시다.”
집중하라는 듯 보나벤투라가 원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중요한 건 이겁니다. 듣자 하니 어제 성 밖에서 일어난 소요도 알틴의 연설로 촉발된 것이라 하더군요. 카타리나 공작이 성하의 시해 미수에 관여됐단 사실까지 밝혀지며, 이미 성 밖 시민들은 공작이 뱀이라고들 굳게 믿고 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성도의 시민들이 얼마나 성하께 충성스러운지.”
30년 전 오스피나 참극으로 고통받은 것은 레오폴트만이 아니었다. 성도의 시민들 역시 용병대의 무자비한 탄압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참극을 딛고 일어나 교국을 재건한 레오폴트가 다른 사도들보다 특별해 보이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비록 지금은 성하께서 우리를 외면하고 계시지만, 성 안팎에서 소요가 끊이지 않는다면 결국 돌아보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장기전을 각오합시다. 우리의 뒤에 오스피나 시민들이 함께하고 있음을 잊지 말고….”
“그 말을 어찌 믿습니까?”
문득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껏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하던 클레멘스였다.
보나벤투라가 눈살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클레멘스 추기경?”
“알틴의 말을 어찌 믿느냐 여쭈었습니다.”
서부 앙페르어를 모국어로 삼은 이답게 우아한 클레멘스의 어투는 오늘따라 더욱 나긋나긋하게 들렸다. 보나벤투라는 어리둥절하게 눈을 끔벅였다.
“지난 5년 간 공작의 최측근이었던 하녀니까요. 공작의 죄를 밝힐 증인으론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인물입니다.”
“공작의 죄를 밝힐 ‘증인’이요. ‘천한 하녀’가 아니라.”
보나벤투라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클레멘스는 나지막하게 웃으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조금 우스워서 말입니다. 천한 하녀 따위가 어찌 증인이 될 수 있느냐 난리를 치던 분이 알틴의 말을 이리 무겁게 들으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때와 지금은 사안이 다릅니다.”
“예, 다르지요. 하지만 알틴이 카타리나 공작의 측근이란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아니면 뭐 이런 겁니까? ‘천한 하녀’는 교황 독살 미수 사건에 증언할 수 없지만, 사도가 뱀이라고 증언할 수는 있다?”
어디선가 풋, 하는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살벌한 눈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노려본 보나벤투라가 씹어 뱉듯이 말했다.
“태도가 변한 건 클레멘스, 그대도 마찬가집니다. 알틴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던 그대가 어찌 이제 와 증인을 문제 삼는 겁니까?”
“오, 나야 언제나 박쥐 같은 사람이니까요. 내 변심이야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대쪽 같은 보나벤투라 추기경의 변심은 보기 드문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이 시국에 날 조롱하겠단 말입니까? 어찌 페아노라의 대주교란 사람이 그리 가벼울 수 있습니까!”
보나벤투라의 호통에 클레멘스가 그림 같이 웃었다.
“설마요. 하도 신기하여 언급하였을 뿐 요지는 따로 있습니다.”
“…….”
“이를테면 그 뱀 문제 말입니다.”
클레멘스의 손끝이 동쪽을 가리켰다.
“뱀은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던가요? 듣기론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뱀의 흔적을 쫓아 리누스 도시 연맹 쪽으로 가셨다던데요.”
좌중에 불편한 침묵이 맴돌았다.
“물론 뱀이 하도 간악하여 엘피도 공작 전하마저 속여 넘겼을 수도 있지요. 예, 충분히 뱀은 지금 이 순간 성도에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카타리나 공작 전하가 뱀이라고 주장하는 건 조금….”
클레멘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여러분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교황 성하나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과연 코앞에 있는 뱀을 10년 넘게 못 알아채실 분들인가요?”
글리체리아가 눈가를 감싸며 앓는 소리를 냈다. 클레멘스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적어도 뱀의 문제에 한해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습니다. 단 하나의 눈을 믿으라면 고민의 여지 없이 엘피도 공작 전하의 눈을 택하겠어요. 그리고 가장 믿음직한 분께서 지금 뱀을 잡기 위해 동쪽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
“난 도리어 이 모든 변고가 뱀의 계략인 건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뱀은 교회와 사도의 주적. 사도를 무너트리기 위해 지난 수천 년간 재앙을 일삼았으니, 간악한 모략을 꾸며 무고한 사도 하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 따윈 어렵지도 않으리라.
수긍의 분위기가 빠르게 번지는 가운데, 보나벤투라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빠트리셨군요.”
“…….”
“카타리나 공작은 불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일이 이렇게 극단으로 치달은 데는 그 문제가 가장 커요. 대성당의 성화가 꺼졌는데, 사도가 성화를 피울 수 없다? 공작에겐 더 이상 권능을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나 역시 카타리나 공작이 뱀이라는 데는 회의적이나, 뱀이 아니라고 그녀에게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뱀이라는 헛소문을 이용할 작정이군요.”
클레멘스의 예리한 지적에 보나벤투라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모두가 아닌 척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숨 쉬듯 모략을 사용하는 클레멘스나 아나클레토와 달리, 보나벤투라는 꺾일지언정 휘어지지 않는다는 인사였다. 알틴에 대한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바꾼 것만 해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지만, 뱀의 추문과는 무게가 달랐다.
보나벤투라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로써 죄인을 벌할 수만 있다면, 네, 나는 그리할 것입니다.”
누군가 놀라움에 탄성을 내뱉었다. 짧게 조소한 클레멘스가 도리 없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었다.
클레멘스가 뒤로 빠지자, 원탁 추기경들의 입장은 하나로 모아졌다. 대성당에서 카니나의 페기를 화형에 처하자는 보나벤투라의 의견이 통과되었을 때부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보나벤투라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지금부터 원탁은 카니나의 페기를 벌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교황 성하를 설득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펼칠 것이나, 여의치 않을 경우 성하께서 간악한 뱀에게 홀려 더 이상 공무를 수행하실 수 없다고 판단. 교황 성하의 퇴진을 요구한 뒤, 원탁의 이름으로 화형을 엄벌할 것입니다.”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의 뒤엔 수만 명의 성직자와 시민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옳은 길을 걷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정의의 길은 늘 가시밭길이었으니.”
부디 성화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하기를.
기도하는 다섯 추기경의 눈이 감겼다.
***
카니나의 페기가 뱀이라는 추문은 빠르게 퍼져 갔다.
근위대는 추문의 근원인 알틴을 잡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으나, 성도 어디서도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시시각각 터지는 문제들이 산적하여 알틴의 존재는 곧 잊히고 말았다.
성도의 민심이 들끓고 있었다. 누구보다 신실하게 교황을 따랐던 이들이 교황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분연히 일어섰다. 어느덧 그들의 뇌리 속에 카니나의 페기는 마귀를 부리는 사악한 뱀이었다. 누구보다 애틋한 교황 레오폴트가 뱀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교국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누굽니까! 잿더미가 되었던 오스피나의 영광을 되찾은 것이 누굽니까!”
시민들은 가장 끔찍했던 참극을 함께하며 고통을 나누고 희망을 선사해 준 레오폴트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만큼 분노는 거세게 타올랐다. 그가 자신들을 일으켜 세웠듯, 이번에는 자신들이 그를 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성궁으로 갑시다! 가서 사악한 뱀을 쫓아냅시다! 성도의 구원자를 이번엔 우리 손으로 구해 냅시다!”
조악하게 무장한 시민들이 성문으로 돌진했다. 무딘 도끼날이 철문에 튕겨져 나오고, 녹슨 검은 두 동강 났다. 아슬아슬하게 성벽을 기어오르다 추락한 사람들은 뇌수가 터져 즉사했다.
근위대는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화살로만 대응했다. 성직자들의 시위처럼 하룻밤이면 잦아들리라 여겼으나, 시민들은 횃불로 밤을 몰아내며 몇 날 며칠 투쟁을 계속했다. 굶고 목마른 그들의 동력은 광적인 믿음과 사랑이었다. 한낱 화살 세례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