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328)

“저 머저리들이 무어라 떠들든 개의치 않는다. 그놈들이 나불대는 것처럼 페기가 사특한 뱀의 간자가 아님은 세상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아는데, 그런 내가 먼저 페기를 버릴 수야 있겠느냐.”

“…….”

“그러니 고드릭, 너는 앞으로 그런 말을 입에 담지 마라. 네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임을 알아 벌하진 않겠으나, 다시는 용서치 않을 것이다.”

고드릭이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레오폴트는 어지러운 눈을 가만히 내리감았다.

제 병든 몸이 어찌 되든 이젠 상관없었다. 이 한 몸 불살라 죄 없는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는 기꺼이 제 몸에 불씨를 붙일 것이었다.

“레오가 그랬어, 반드시 네 억울함을 풀어 줄 거라고.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차라가 쇠창살에 딱 달라붙어선 말했다. 페기가 멍하니 눈만 깜박이자, 답답하다는 듯 차라가 언성을 높였다.

“진짜라니까?! 내 어깨를 꽉 붙잡더니, 페기에게 이런 내 의지를 알려 주려무나, 이렇게 말했다고!”

“…모든 일이 레오의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뭐어?”

어이가 없다는 듯 차라가 말꼬리를 높였다. 페기는 무릎을 감싸 안곤 등을 둥글게 말았다.

“난 버림받은 사도야. 나 같은 걸 살리려고 감싸다간 레오도 다칠 텐데. 난 그 꼴 못 봐.”

페기는 고집스레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망연자실 그 옆얼굴을 응시하던 차라가 물었다.

“그래서 이대로 죽겠다고?”

“…….”

“변명도 안 하고, 살려는 노력도 안 하고, 그냥 이렇게 타락한 사도로 죽겠단 거야?”

“응.”

“응 좋아하시네. 야, 너 나 똑바로 안 봐?!”

쇠창살 사이로 팔을 쑤셔 넣은 차라가 페기를 잡으려고 용을 썼다. 화들짝 엉덩이를 뒤로 뺀 페기가 그를 노려봤다.

“너 바보야? 레오가 무작정 버티면 너한테도 안 좋아. 애당초 여긴 왜 들어온 거야? 나랑 만났다가 무슨 얘길 들으려고.”

“무슨 얘길 하든지 말든지! 동생이 누나 보러 오는 것도 안 돼?!”

페기가 덜컥 입을 다물자, 차라가 다다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나랑 레오가 피해를 입으면 입는 거지, 고작 그게 무서워서 죽는다는 게 말이 돼?! 내가 바보면 넌 거짓말쟁이야! 이대로 죽긴 개뿔, 너도 살고 싶은 거 다 알거든!”

“네가 알긴 뭘 알아!”

“알아! 네가 네 입으로 예후르 돌아오면 숲속 별궁에 가서 살자고 했잖아! 그게 어디 죽고 싶은 녀석이 할 소리야? 너도 지금보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한 거잖아! 누구보다 살고 싶은 거잖아!”

갑갑한 성궁을 떠나자는 말을 들었을 때, 차라는 몹시 기뻤다. 대놓고 말은 안 해도 페기도 당연히 그날만을 고대하고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저리 고집스럽게 틀어 앉은 페기의 모습에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행복한 미래가 코앞인데 이렇게 손 놓고 포기하겠다고? 차라는 고작 성당에 불 하나 꺼진 것으로 페기를 포기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건 레오폴트도 마찬가지였다.

“됐고, 넌 거기 틀어박혀서 레오가 너 구해 주는 꼴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해!”

발딱 일어난 차라가 주머니에서 작은 알갱이를 한 움큼 꺼내 창살 안으로 던졌다. 페기가 황급히 팔을 들어 떨어지는 알갱이들을 막는 사이, 차라는 우다다 감옥을 뛰쳐나갔다.

갑작스레 일었던 소란처럼 적막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페기는 천천히 팔을 내려 바닥을 짚었다. 손끝에 무언가 집히기에 들어 보니 차라가 잔뜩 내던지고 간 알갱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포장된 초콜릿이다.

페기는 울 것처럼 웃었다.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나서 던진 게 고작 초콜릿이다. 이 어린애를 도대체 어찌해야 할까. 아픈 레오폴트와 바쁜 예후르 사이에 두고 가도 정말 괜찮은 걸까.

아니다, 차라는 괜찮을 것이다.

괜찮지 않은 건 자신이다.

페기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맞아. 난 거짓말쟁이야….”

바보는 죄가 아니지만 거짓말은 죄다. 아마 저는 죽어서도 지옥에 갈 것이다. 살고 싶은데도 죽겠다고 거짓말한 죄, 그 거짓말로 동생을 울게 한 죄로 지옥 불에 떨어질 터.

그래서 더더욱 죽고 싶지 않았다. 살아서 누리고픈 행복이 너무나도 많았다. 아닌 척 밤마다 들떠서 잠 못 이루고 그렸던 날들이 코앞인데, 고작 이런 데서 죽고 싶진 않았다. 마음 편히 살아 더 많은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제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카니나에서 태어난 죄로 레오폴트를 그렇게 힘들게 했으면서 또 이렇게 그를 번민하게 만들었다. 지난 스무 해의 기억을 낱낱이 뒤져 봐도 도저히 성화가 꺼진 이유를 짐작할 수 없으나, 그녀의 죄가 아닐 리 없었다. 또다시 그녀의 죄가 레오폴트의 숨통을 옥죄고 있었다.

어째서 항상 나만, 하는 울분은 가신 지 오래였다. 그보단 나 때문에, 하는 자책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거듭된 불행은 사람을 지치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페기는 우울하게 눈을 내리떴다.

왜 성화를 앗아 가셨나요?

오늘도 하늘의 천사께선 응답이 없다. 어쩌면 그녀의 목소리는 하늘로 채 닿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은 말해도 되지 않을까. 천사께서 듣지 못하는 지금이라면, 입 밖으로 내어도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말라붙은 입술이 머뭇거리며 열렸다.

“살려 줘요….”

자그마한 속삭임은 순식간에 적막에 먹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페기는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작은 몸뚱이 위로 차가운 감옥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레오폴트는 집무실에 들자마자 근위 대장 미란테를 호출했다. 근위대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밤새 시위 소리가 그치지 않았느냐는 호통이 복도까지 번졌다. 굳은 얼굴로 집무실을 빠져나온 미란테는 즉시 휘하의 근위대를 집합시켰다.

“앙겔리카 성궁은 밤 시간 동안 가장 정숙해야 하는 곳! 우선 어젯밤 성궁의 고요함을 망친 주범들을 체포한 뒤, 직무를 다하지 못한 우리의 죄를 성하께 고해 용서를 구하도록 하겠다!”

명령을 받은 근위대는 성 안팎으로 퍼져 시위의 참가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추기경, 주교, 귀족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취조실로 붙들려 왔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죄인은 저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거짓된 사도 아니오!”

“맞소! 당장 카니나의 페기를 화형에 처하시오!”

당당함은 찰나였다. 근위대가 내놓는 증거마다 사람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발뺌하기 바빴다.

“어젯밤 시위에서 교황 성하를 두고 ‘뱀에 홀린 멍청한 늙은이’라고 하셨다죠?”

“내, 내가 언제!”

“이미 다리오 주교님이 다 증언하셨습니다.”

더 이상 사도가 아닌 페기를 모욕하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으나, 다른 사도들은 사정이 달랐다. 지난밤 감정이 격해져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일삼았던 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당혹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아주 잠깐의 당혹일 뿐이었다. 눈앞에 당면한 페기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신성 모독 비슷한 발언만으로 이 많은 성직자들을 무겁게 처벌하진 못했다.

레오폴트라고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다만 그는 근위대를 내세운 강경한 대처로 만천하에 선언한 셈이었다.

카니나의 페기를 결단코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노라고.

이는 그녀를 화형에 처하기로 한 원탁의 결정과는 완벽하게 대치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성직자들은 공분했다. 지난밤 시위에 참여했다가 붙잡힌 이들이 태반인데도 또다시 시위를 벌이겠다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원탁의 결정은 어디까지나 권고였다. 천계율은 원탁의 결정이 곧 교회의 결정이라 명시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집행권을 지닌 교황에게 원탁의 뜻을 따르라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교황권이 극에 달했던 시기, 원탁이 무용지물로 전락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동강 난 원탁을 다시 세우고 교국의 질서를 재수립한 인물이었다. 아무도 지키지 않던 천계율을 되살려 다시 기준으로 삼은 것이 그였다. 그런 그가 손수 쌓아 올린 질서를 스스로 무너트리려 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반작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믿음을 배반당한 성직자들은 더더욱 치를 떨었고, 성궁의 여론은 끝을 모르고 곤두박질쳤다. 교황과 성직자 간의 첨예해지는 갈등에 각국의 대사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레오폴트가 성인이 된 이래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던 교황의 성좌에 처음으로 금이 가고 있었다.

카니나의 페기를 잘 안다는 여자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5년이나 그 여자의 수발을 들었어요. 나보다 그 여자를 잘 아는 사람은 없어요!”

알틴이었다.

“내가 그 여자의 본모습을 까발리지 못해 그 동안 얼마나 속앓이를 했는지 몰라요! 성스러운 천사의 현신? 우리를 인도하시는 소명의 천사? 허! 죄다 헛소리예요! 그 여자가 얼마나 치졸하고 간사한 사람인지, 얼마나 방종하고 방탕하게 살았는지 알면 여기 모인 사람들 다 눈 까뒤집고 기절할걸요!”

감시가 소홀해진 틈에 성 밖으로 뛰쳐나와 사람들 앞에 선 그녀였다. 갈색 머리는 산발이 되고 뺨은 푹 꺼졌으나, 눈빛만은 광적으로 형형했다.

“그리고 날 속여 감히 교황 성하를 시해하려 했어요!”

천인공노할 이야기에 오스피나의 시민들이 질겁했다. 레오폴트가 피 토하며 쓰러졌었다는 것도, 거기에 페기가 관여되었다는 것도 성궁 내에서나 돌던 말이었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우러르던 교황이 사선을 넘나들었단 사실에 터질 듯 분개했다.

“가여우신 분, 그토록 아끼던 딸에게 죽을 뻔하고도 아직도 저렇게 싸고도시네요. 성하마저 저리 속여 넘길 정도니 얼마나 악랄한 사람인지 다들 아시겠죠! 천한 하녀인 내 눈에도 명명백백한 것을요! 그 여자는 뱀이에요! 이 고귀한 성도에 마귀를 불러들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해하려 한 뱀!”

알틴의 연설에 성도의 여론이 들끓어 올랐다. 신심으로 사도를 따르던 이들이 앞장서서 성궁으로 향했다. 성문에 돌을 던지고 나뭇가지를 던지며, 한편으론 교황 성하께서 빨리 눈을 뜨시길 빌고 또 빌었다. 근위대도 차마 그들에게 창검을 겨누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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