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시발, 꼰대 새끼. 또 지랄이야.”
금발 남자가 술병에 얼굴을 들이민 채로 중얼거렸다. 호기롭게 말을 걸었던 건달이 허, 짧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여간 저 새끼, 재수 없게 말하는 거 하난 일등이다, 일등.”
“꼰대야, 입이 똑바르면 말도 똑바르게 해야지. 내가 어디 말만 일등이냐?”
느릿하게 고개를 든 남자가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나한테 쳐 발렸던 거 까먹었어? 다시 기억나게 해 줄까?”
“아니, 뭐… 그냥 말이 그렇단 거지.”
하나같이 죄다 남자에게 죽사발이 났던 건달들이 어색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종업원을 불러 술과 안주를 주문하는데, 문득 옆 테이블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마가 공작? 그게 누군데?”
“똘추야. 사도잖아, 사도. 이멘바흐의 안드레아.”
“사도를 왜 이런 데서 찾아?”
“거 높으신 분 취미가 이런 데서 싸돌아다니는 건가 보지.”
폭포처럼 입 안에 술을 쏟아붓던 금발 남자의 손이 점점 느려졌다.
“거참, 세상이 어찌 되려는지 모르겠다. 사도 하나가 아작 나질 않나, 또 다른 사도 하나는 이런 뒷골목에서 굴러 다니고 있다 하질 않나.”
“그러게나 말이다. 어휴, 사도쯤 되었으면 몸가짐 좀 바르게 하던가. 그게 도대체 무슨 창피야?”
옆 테이블의 과객들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휘청거리며 일어난 금발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가 턱, 하고 테이블을 짚었다.
“어이, 아저씨들.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 누구야?”
“내가 누군진 알 필요 없고. 사도 하나가 아작 났다는 게 무슨 소리냐고.”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건달들이 멋쩍은 얼굴로 다가와 금발 남자를 말렸다.
“야, 사무엘. 술을 처마셨으면 곱게 취해야지. 또 무슨 행패를 부리려고?”
“시발, 이거 좀 놔. 행패가 아니라, 그냥 물어보고 있는 거잖아.”
“아, 그거라면 우리가 알려 줄게. 너는 무슨 녀석이 거리에 파다한 소문도 모르고 있냐? 귀 닫고 살아?”
남자를 질질 끌고 온 건달들이 더듬더듬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뭐야. 어디 성당에 불 있잖아.”
“불 없는 성당도 있어?”
“아니, 그 불 말고. 비싼 불. 귀한 불. 성궁 어디에 있다던데.”
“…계속해 봐.”
“하여간에 그 불이 꺼졌대.”
지긋이 건달을 응시하던 남자가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어느 대성당의 불…. 됐다, 너희가 알 리가 없지. 그래서?”
“어떤 사도가 다시 불을 지피려고 했는데 실패했대. 꺼지면 절대 안 되는 불이 꺼진 거라던데. 그 사도는 이제 망했지, 뭐. 그 사도 이름이 뭐더라?”
“무슨 메리였던 것 같은데?”
“병신아, 메리는 엊그제 너랑 잤던 년이고.”
“그 비슷한 이름이긴 했어!”
“페기.”
남자가 분명하게 발음했다.
“카니나의 페기.”
멀뚱멀뚱 서로를 마주 보던 건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맞아, 그런 이름이었어!”
“인생 말아먹은 불쌍한 녀석이지. 듣기론 감옥에 갇혔다는데, 종교 재판이라도 열리면 우리도 구경 가야 하나? 우리 생전에 사도가 종교 재판 당하는 걸 언제 또 보겠어?”
“하긴. 이왕이면 예뻤음 좋겠네. 눈호강이나 하게… 사무엘? 쟤 어디 가냐?”
건달들은 술집을 뛰쳐나가는 금발 남자의 뒷모습을 멀뚱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테이블에 널린 빈 술병들을 발견하곤 기겁하며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야! 사무엘! 네가 마신 건 계산하고 가!”
***
내전의 문이 잠겼다.
앞장서는 보나벤투라를 따라 수많은 성직자들이 내전 앞에서 시위를 벌였으나, 밤새도록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지쳐 가는 소란 속에 해가 떴다.
고뇌에 사로잡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던 레오폴트는 아주 피곤한 상태로 일어났다. 그의 눈 밑에 드리워진 그늘을 보고 조용히 한숨을 삼킨 고드릭이 손수 옷을 갈아입혀 주기 시작했다. 멍하니 고드릭의 손길을 받던 레오폴트가 문득 나지막이 물었다.
“페기는 어찌 지내고 있다더냐.”
“조용하시다고 합니다. 속이 단단히 여문 분이니 의연히 계실 겁니다.”
“저 불충한 자들이 감옥이라고 가지 않았겠느냐. 여긴 성벽이라도 높지만 감옥은 그도 아니니, 그 아이가 저 삿된 말과 손가락질을 그대로 보고 들었을까 저어되는구나.”
“왈테르 경이 밤새 감옥 앞을 지켰다고 들었습니다. 근위대 최고의 기사 아닙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왈테르 경에게 일러 교대하고 돌아가기 전에 내게 직접 보고하라 전하거라. 그 아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내 정확히 듣지 않으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공손하게 대답한 고드릭이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성하, 엘피도 공작 전하께 이번 일을 알리는 것이 어떠실는지….”
“아니 된다.”
피곤하게 늘어져 있던 레오폴트가 문득 날을 세웠다.
“페기의 문제도 중하지만 뱀도 그에 못지않아. 천 년 만에 부활한 뱀이다. 힘을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목을 베지 않으면, 그 옛날처럼 수많은 재앙이 몰아닥칠 것이야.”
“…….”
“그리고 예후르가 뱀을 잡아 오면, 페기가 뱀이라는 그 사특한 헛소리들도 잦아들겠지.”
레오폴트가 이를 갈 듯 읊조렸다. 심려한 얼굴로 고개를 떨군 고드릭이 레오폴트의 옷자락을 마저 정리한 뒤, 가면을 씌워 주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때, 문밖에서 차라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레오! 일어났죠? 나 들어가요?”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발칵 열리더니, 차라가 침실로 뛰어들었다. 밤새 울었는지, 붉어진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페기 어떡할 거예요! 계속 감옥에 둘 건 아니죠? 교황이잖아요, 어떻게 좀 해 봐요!”
차라가 울먹이자, 고드릭이 가면을 내려놓고 황망히 그에게 다가갔다.
“도련님, 일단 나가시지요. 성하께서도 고민이 많으십니다.”
“고민할 게 뭐가 있어요! 페기가 뭘 잘못했다고! 빨리 풀어 줘요! 빨리!”
“이러신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중대한 사안이라는 건 도련님께서도 잘 아시잖습니까.”
“내가 뭘 안다고 그래요. 나 아무것도 몰라요. 나도 불을 못 피우는데, 그럼 나도 지하 감옥에 가둬야 하는 거 아녜요? 왜 페기만 잡아가요. 나도 잡아가요!”
차라가 울먹울먹한 얼굴로 그에게 매달렸다. 고드릭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하께서는 사도의 으뜸이며 교회의 수호자십니다. 가족의 정보다는 대의를 더 중하게 여겨야 하는 분이세요.”
“그래서 페기를 계속 저기 두겠다고요? 죽게 놔둔단 말이에요?!”
“도련님….”
고드릭이 난처한 기색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때껏 동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던 레오폴트가 천천히 얼굴에 가면을 썼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차라에게 다가갔다.
“비키거라, 고드릭. 아직 어린아이의 팔을 그리 세게 잡으면 쓰나.”
고드릭이 머뭇머뭇 물러나자, 레오폴트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차라와 시선을 맞추었다. 차라는 눈물 가득한 암녹색 눈을 힘껏 째푸리며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었다. 레오폴트는 조심히 손을 뻗어 그 말랑한 뺨을 매만졌다.
“울지 마라. 네가 울면 내 가슴에도 비가 내린단다.”
“하, 하지만 페기가….”
“설마 내가 페기를 계속 저대로 둘까. 네 눈엔 내가 가여운 딸을 죽게 내버려 둘 위인으로 보이더냐.”
차라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눈물을 흩뿌렸다. 고드릭이 굳은 얼굴로 성하, 하고 말리려 들자 레오폴트가 단호하게 손을 들어 막았다.
“이건 모두 어른들의 실책이다. 눈앞의 잇속과 광기에만 눈이 멀어 제대로 된 경위도 알아보려 하지 않고 처벌을 내리기 급급했지. 난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페기의 억울함을 풀어 줄 것이야.”
상처 입은 그녀의 명예를 회복시킬 것이다. 땅으로 떨어진 그녀를 빛나는 저희들의 권좌로 되돌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명명백백 시비를 밝혀낼 것이었다.
“그러니 너는 귀한 눈물을 거두고, 근심으로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 있을 페기에게 가 이런 내 의지를 알려 주려무나.”
멍하니 그를 응시하던 차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점차 거세지는 고갯짓 속에 환한 미소가 번져 갔다.
레오폴트는 헐레벌떡 달려 나가는 차라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고드릭이 조급하게 말을 꺼냈다.
“성하, 부디 재고하여 주십시오. 원탁이고 신학회고 귀족원이고 죄 카타리나 공작 전하에게서 돌아섰습니다. 어찌 성직자들의 목소리를 그리 가볍게 여기십니까.”
레오폴트는 비틀거리며 침대맡에 가 앉았다. 고드릭이 따라붙으며 간절하게 호소했다.
“이대로면 성하의 위신에도 해가 갑니다. 벌써부터 무고한 사도들에게도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불경한 자들이 생기고 있는데, 하루라도 빨리 의심의 싹을 잘라 내셔야지요. 어떻게 재건하신 교국입니까. 지난 수십 년간 피땀 흘린 노력을 이리 허무하게 무너트릴 작정이십니까?”
고드릭이 그의 발밑에 엎드려 흐느꼈다. 레오폴트는 말없이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가면 속에서 곧 실낱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네로사가 단칼에 갔었지.”
엎드려 포갠 고드릭의 손등이 움찔했다. 레오폴트는 멍하니 시선을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그녀의 죄가 무엇이었더라…. 라발에 대항하는 연합을 꾸려서였는지, 아니면 단순히 용병들의 화풀이었는지… 이젠 아무래도 좋구나. 무엇이든 그리 죽을죄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니.”
“…….”
“그날, 다시는 가족을 그리 보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평생 외로웠던 제네로사에게 그의 존재가 축복이었듯, 만일 그에게도 그런 축복이 허락된다면.
레오폴트는 어느덧 품에 가득 찬 네 명의 아이들을 떠올렸다. 평생을 바쳐 재건한 교국이 소중하듯 아이들도 소중했다. 제 목숨보다 소중한 둘을 이제는 저울에 올려 무게를 재야 할 때였다.
“살면서 그런 말들을 참 많이 들었다. 왜 그리 열심히 일하느냐. 왜 병든 몸을 돌보지 않느냐. 교국이 융성해졌는데 왜 아직도 더 이루지 못해 아등바등하느냐.”
혹자는 권력에 눈이 멀었다 하고, 혹자는 복수에 눈이 멀었다 했다. 몸이 삭고 닳도록 교국에 헌신하면서도 레오폴트 본인조차 뚜렷한 이유를 몰랐다. 교국은 이미 옛날의 위용을 되찾았는데 뒤에서 누군가 채찍질하는 것처럼 허겁지겁 달리기 바빴다.
“그런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구나.”
레오폴트는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더 큰 힘, 더 높은 지위를 갈망하던 것이 결국 오늘 이날을 위함이었다. 어린 딸만은 제네로사처럼 덧없이 떠나보내지 않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