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328)

그러자 보나벤투라가 제단에 앉은 원탁 추기경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성하께서 한낱 정에 눈을 가리셨으니 원탁이 나서야 합니다! 나 보나벤투라는 소피엔의 대주교이자 원탁 추기경으로서 카타리나 공작, 카니나의 페기에게 꺼진 성화의 책임을 물어 화형을 언도할 것을 제의합니다!”

“옳소!”

사방에서 그의 말을 지지하는 목소리들이 빗발쳤다. 페기는 주저앉은 채로 멍하니 보나벤투라를 보았다. 늘 신심으로 그녀를 경배하던 검은 눈이 혐오와 살의로 범벅되어 있었다.

“화형은 너무….”

“글리체리아 추기경, 그대마저 마음이 약해지는 겁니까! 지난 정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성화가 꺼졌습니다! 이는 하늘에 계신 천사 예리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경고! 자비로우신 소명의 천사조차 용서하지 못할 죄를 범해 교국에 이런 파란을 몰고 온 저자를 반드시 불에 태워야 합니다!”

보나벤투라는 고개를 돌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레오폴트를 직시했다.

“또한 그것만이 저자를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유황 냄새나는 지옥 불이 아닌 성스러운 불에 타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니까요! 그로써 저자가 범한 죄는 사해지고, 우리는 다시 평화를 되찾을 것입니다!”

교국에서 선고되는 화형에는 성화가 쓰인다. 성스러운 불길 속에 죄인의 몸과 죄가 한꺼번에 씻긴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교국에서 화형이 극형에 속하지 않는 것도 그런 연유였다.

아나클레토가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나벤투라 추기경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감히 성화를 꺼트린 죄, 사지를 찢어 죽여도 모자라나 한때 사도였던 신분을 참작해 자비를 베풀도록 합시다!”

솔란지아 역시 참담한 얼굴로 일어섰다.

“저도 동의합니다.”

글리체리아는 고통스러운 듯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군중의 야유는 커져만 갔다. 거대한 성당 안을 메아리치는 야유는 마치 광인의 웃음처럼 들렸다.

“…전하, 정말 안 되시는 겁니까?”

페기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만 봤다. 아교로 붙인 듯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끈질기게 대답을 기다리던 글리체리아는 고통에 잠긴 두 눈을 꾹 감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부디 하늘의 천사께서 자비를 베푸시길.”

네 명의 추기경이 일어섰다. 남은 것은 한 사람뿐이었다.

“클레멘스.”

보나벤투라의 호명에 클레멘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광기 흐르는 성당과는 무관한 것처럼 냉담한 올리브색 눈이 좌중을 훑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동료 추기경들을 돌아보았다.

“참 대단들 하십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클레멘스가 가벼운 걸음걸이로 붉은 융단을 걸어 성당을 빠져나갔다. 과녁처럼 제게로 쏟아지는 조롱에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추기경들이 망연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클레멘스의 이탈은 이미 대세와는 무관했다. 보나벤투라는 엄숙하게 말했다.

“네 명의 추기경이 동의하여 과반을 넘었으므로, 카타리나 공작에게 화형이 언도되었음을 원탁의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환호성이 터졌다. 원탁을 등에 인 보나벤투라의 명령에 근위대가 제단으로 올라와 페기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레오폴트가 기함하며 그들을 막아서려 했으나, 도리어 고드릭이 울면서 그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니 됩니다, 성하!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여기서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레오폴트에게 밟히고 차이는데도 고드릭은 끝까지 그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그사이 페기는 몸부림 한번 제대로 못 치고 질질 끌려갔다. 울면서 제 뒤를 따라오던 차라는 중간에 넘어졌는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성당 안을 가득 메우던 환호도, 야유도, 고함도 순식간에 멀어졌다. 어느새 그녀의 귀를 건드리는 건 철컹거리며 저들끼리 부딪치는 갑옷 소리, 쿵쿵거리는 군홧발 소리, 혹은 가끔씩 여닫히는 문의 쇳소리뿐이었다.

철컹. 그녀의 눈앞으로 철창이 닫혔다.

근위대는 철창 안에 그녀만을 남겨 둔 채 떠나갔다. 페기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살며시 철창 위로 손을 올리자, 손끝으로 느껴지는 싸늘함에 현실이 조금 인지되었다.

화형이 선고되었다.

곧, 죽는다.

눈물도, 하다못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페기는 가만히 입술을 달싹였다.

“누가….”

누가?

아무도 없다. 레오폴트도, 예후르도, 안드레아도, 누구 하나 날 구해 주지 못한다. 심지어는 나 자신조차.

하늘에 계신 천사조차 외면하는 날 누가 구해 줄까.

철창을 쥐고 있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페기는 어둠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뒷걸음질했다. 감히 빛이 들 수 없는 곳으로. 더한 나락으로.

***

알틴은 멍하니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문 너머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 위로 메마른 그녀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런데 창틀 위로 불쑥, 억센 손이 올라왔다. 초점 없는 눈으로 창밖을 응시하던 알틴은 난데없이 창문을 밀며 들이닥친 침입자에 아연실색했다. 침입자는 비명을 지르려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황급히 속삭였다.

“야! 나야, 나!”

“읍! 읍!”

“아, 젠장….”

침입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뇌까리곤 얼굴을 가리던 후드를 휙 뒤로 넘겼다. 사막 민족 특유의 진한 갈색 피부가 드러나자, 알틴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손 뗄 테니까 비명 지르지 마. 알았지?”

알틴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가 손을 거두자, 즉각 엉덩이를 밀며 뒤로 물러난 알틴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단 눈으로 그를 훑었다.

“너 제정신이야? 여기가 어디라고…!”

“쉿, 쉿! 조용히 하기로 했잖아!”

사내가 기겁하며 양팔을 퍼덕였다. 살짝 입술을 깨문 알틴이 애써 소리 죽여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아니, 그 전에 지금 어디로 들어온 거야?”

“창문으로 들어왔잖아.”

“미친놈…. 여기 3층이야.”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사내가 어깨만 으쓱였다. 얕게 한숨을 내쉰 알틴이 벽을 짚으며 일어섰다.

“들키기 전에 빨리 나가. 여기 있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지금 밖에 난리라 여긴 신경도 안 쓸 텐데,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알틴이 날카롭게 물었다. 눈을 굴리며 잠시 뜸을 들이던 사내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알틴의 턱을 잡아 올렸다.

“너 왜 이렇게 말랐어? 설마 여기 사람들 너 굶겨?”

“이 모양 이 꼴이 됐는데, 그럼 뭐가 넘어가겠니?”

“하긴 네 성질에 억울한 일 당하고 속이 멀쩡할 리 없지.”

알틴이 멈칫 그를 올려다보았다.

“…억울한 일? 넌 그렇게 생각해?”

“그럼 억울하지, 안 억울해? 교황이 지 새끼 싸고도느라 너만 이 지경이 된 거잖아.”

알틴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넌…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나만 욕하고 있을 거 아냐. 천한 하녀가 감히 모시던 주인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다고.”

“다른 사람들, 누구. 나만 보면 더러운 이민족이니 어쩌니 하면서 호박씨나 까는 그 돌대가리들?”

사내가 피식 웃으며 알틴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야, 내가 널 안 믿으면 누굴 믿냐. 네가 성격이 좀 괴팍하긴 해도 어디 나쁜 짓 할 녀석이야? 괜히 나섰다가 봉변만 당한 거지.”

“…….”

“그러니까 너답지 않게 그런 정의로운 짓은 왜 했어?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었으면 다 좋게 좋게 끝났을 텐데. 보아하니 교황님은 아주 정에 눈이 멀어 네 주인이 무슨 짓을 벌이든 다 감싸 줄 기세더구만.”

알틴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입술을 떼려는 순간, 창밖이 시끄러워졌다. 말릴 새도 없이 사내가 성큼성큼 창가로 걸어갔다.

“야, 너 뭐 하려고!”

말리는 알틴의 손길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사내는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침 저 아래 뛰어가는 하녀가 있었다.

“저기요! 결과 나왔어요? 불은 피웠대요?”

화들짝 놀라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하녀가 계속된 사내의 외침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손을 모아 소리를 지르려다가, 이내 팔을 높이 들어 엑스 자를 만들었다. 사내가 활짝 웃으며 답례의 표시로 손을 붕붕 흔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불이라니?”

“아….”

답답해진 알틴이 사내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사내가 목을 긁으며 웃음을 흘렸다.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가 꺼졌어. 네 주인이 오늘 다시 피운다 어쩐다 하더니 결국 못 피운 모양이네.”

사내는 그러고도 한참을 나불댔지만 알틴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알틴이 별안간 풀썩 주저앉았다. 황급히 틀어막은 입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새 나왔다.

“아, 알틴?”

사내가 기겁하며 알틴의 어깨를 감쌌다. 알틴은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어깨를 거칠게 들썩였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사내는 계속 고개를 비틀었다.

“너 울어? 좋은 일인데 왜 그래! 그렇게 울지만 말고 뭐라고 말을 좀 해….”

사내의 말이 우뚝 멈추었다.

알틴은 숨이 막혀라 웃고 있었다.

“…끅, 끄흡.”

간신히 웃음을 씹어 삼킨 알틴이 사내의 손을 꽉 움켜쥐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입술이 기이하게 벌어졌다.

“이제 살았어. 살았다고!”

알틴은 미친 듯이 웃어 재꼈다. 깔깔 치솟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사내는 못내 얼떨떨한 얼굴이 되었다.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가 꺼졌다는 소문은 곧 카니나의 페기가 성화를 다시 피워 올리는 데 실패했다는 말과 결합되기 시작했다. 손쉽게 성벽을 넘은 소문은 날개 달린 듯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아주 말세야, 말세. 사도까지 그 지랄이고.”

소문을 들은 뒷골목 건달들은 쥐꼬리만 한 신앙심을 구겨 버리듯 그리 빈정거렸다.

“이렇게 다 같이 망해 가는 거지, 뭐. 사도라고 뭐 그렇게 특별한데?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거시기 하나씩 달린 건 똑같지.”

“교황은 가면 썼다며. 없는 거 아니야?”

“새끼야, 가면을 거시기에 쓰냐?”

“네가 교황을 봤어? 가면을 얼굴에 썼을지, 거시기에 썼을지 누가 알아?”

“아이고, 저 꼴통 새끼.”

건달들이 파안대소하며 허름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술집 안에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 자연스레 발길이 그쪽으로 기울었다.

“어이, 사무엘. 넌 무슨 새벽까지 술 처먹던 놈이 벌건 대낮에도 술을 푸고 있냐? 너 그러다 죽어, 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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