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328)

“다시 천사님의 신실한 종이 될게요.”

감히, 하늘의 사랑을 받는 동기를 마음에 담았다.

“다시는 다른 누구에게로 눈 돌리지 않을게요. 오직 천사님을 위한 음악만 연주할게요. 다른 건 꿈도 꾸지 않을게요.”

그러니.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서서히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기도하듯 맞잡은 양손 아래 머리를 숙이며 페기는 청하고 또 청했다. 빌고 또 빌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날, 어리석게도 무서워 피했던 하늘의 목소리가 간절해서. 연민의 목소리든, 꾸중의 목소리든 하늘의 천사께서 아직 절 보고 계시다는 증표가 고팠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엄한 음악 소리도, 무섭게 내리치는 낙뢰도. 그저 가쁘게 터지는 제 숨소리와 문밖에서 간간이 제 이름을 부르짖는 레오폴트의 흐느낌만이 가득할 뿐.

페기는 서럽게 눈물을 삼켰다. 손끝에선 여전히 아무것도 피어나지 않았다.

“…정말로 거둬 가신 건가요?”

말 한마디 없이, 손짓 한번 없이. 이 무의미한 성흔만을 남겨 둔 채로.

그녀는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저 높은 곳에 걸린 동심원을 올려다보았다. 그늘 속에 든 교회와 천사의 상징은 어찌 저리도 무력해 보이는지.

그녀는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제 목소리를 듣고 계신가요?”

사위는 고요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적막을 떨쳐 내듯, 말라붙은 입술이 재차 달싹였다.

“그곳에 계시긴 한가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성화가 꺼졌다.

소문은 순식간에 성도 전체로 퍼졌다. 충격적인 소식을 문 비둘기들이 사방 각지로 흩어져 날아갔으니, 타국으로 번질 날도 머지않았을 터. 사람들은 카타리나 공작과 뱀을 동일한 무게로 언급했다. 최근 줄을 이은 변고의 끝이 결국은 그 주모자를 지목했다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카타리나 공작, 카니나의 페기가 손수 성 예리엘 대성당의 빈 성화대에 불을 붙인다 하였다. 성화는 사도에게 깃든 천사의 권능을 상징하는 것. 만일 그 손끝에서 불씨가 터진다면 그녀는 여전히 천사의 수호를 받는 사도이리라.

하지만 그 반대라면.

성직자고 귀족이고 죄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며 성 나르세스 광장으로 발걸음 했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성 예리엘 대성당이 꽉 찼다. 근위대가 광장 앞에서 입장을 통제하자, 너희들도 뱀의 앞잡이냐며 드잡이질을 벌이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 끔찍한 소란 속에서도 성 예리엘 대성당은 새벽빛 아래 고귀한 순백의 광채를 뽐냈다. 티끌 하나 허하지 않겠다는 듯 새하얀 벽면 아래 오색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화려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의혹을 품고 성당에 든 사람들은 눈 시린 순백 아래 조촐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대성당의 위용조차 발밑에서 흐르는 속삭임은 막지 못하였으니.

발 디딜 틈 없는 성당 안으로 꾸역꾸역 들어온 치들은 저 멀리 보이는 빈 성화대를 보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 정말이었구나. 진실로 성화가 꺼졌구나. 그렇다면 카니나의 페기는 더 이상 사도가 아닌가. 사도가 아닌 사도를 무어라 불러야 하나.

그녀는 뱀인가.

불신자들에게 더없이 엄정한 칼날을 내리는 장미 기사단조차 퍼져 가는 속삭임을 막지 못했다. 그들조차 번민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교회의 적은 누구인가. 누굴 벌해야 하나. 흔들리는 칼끝은 힘을 잃었고, 엄숙하던 순백의 갑주는 거지의 누더기보다 초라해졌다.

착잡한 것은 높은 단에 앉아 그 모두를 내려다보는 원탁 추기경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뒤가 구리든, 속이 음흉하든 간에 한평생 성직자로 살아온 이들이었다. 어쩌면 교회 몰락의 신호탄일지도 모를 순간을 지켜보는 것이 마냥 기쁠 리 없었다.

“어때요.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불을 피워 냈단 얘기가 있던가요?”

소리 죽인 글리체리아의 질문에 클레멘스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본 솔란지아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서원한 한 명의 성직자로서, 마음 한편으론 부디 성화가 다시 타오르길 바라고 있었다.

예정된 시간이 가까워지자 대성당의 분위기는 점점 더 첨예해져 갔다. 근위대는 예민하게 주위를 살폈고, 성당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날카로워진 신경을 눈빛으로 드러냈다. 성당 안은 곧 터질 것처럼 불안하게 부풀어 오르는 탄약 같았다.

그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근위대가 중앙 통로 양옆으로 빼곡히 도열했다. 반사적으로 문가를 돌아본 사람들이 눈부심에 인상을 찡그렸다. 흰빛이 쏟아지는 문틈으로 교황 레오폴트가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지팡이를 짚으며 한 발, 한 발 붉은 융단 위를 걸었다. 숨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별안간 짧은 비명을 삼켰다. 레오폴트의 뒤로 카니나의 페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얇은 실처럼 흩날리는 은발, 창백한 살결, 백지에 물감을 떨어트린 것처럼 홀로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 대부분이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보았으나 모두가 그녀를 알아보았다. 저 여자가 한때 교국을 들끓게 만들었던 추문의 주인공이었다. 어쩌면 교국을 다시 쇠락하게 만들 주범일지도 몰랐다.

꼿꼿이 앞만 보며 걷는 페기에게로 사방 온갖 곳에서 따가운 눈총이 쏟아졌다. 누구는 의혹이고, 누구는 분노고, 누구는 살의였다. 늘 호기심과 경배와 경멸의 대상이었던 페기는 그리 순수하게 벼린 악의를 처음 느꼈다.

“쳐다보지 마. 레오의 등만 봐.”

뒤에서 차라가 소곤소곤 속삭였다. 페기는 대꾸하지 않았다. 숨통을 옥죌 듯한 긴장감에 시야가 잔뜩 조여져 있었다. 앞서 걸어가는 레오폴트의 뒷모습만이 그녀의 눈에 비치는 전부였다.

레오폴트는 힘겹게 제단을 올라 성좌에 앉았다. 헐떡이는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페기는 그 앞에 가만히 섰다. 조용히 맞닿은 그의 눈빛에 불안감이 싹트는 것을 그녀도 보았다. 레오폴트는 괜찮다는 듯, 아무런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 눈빛까지 감추진 못했다.

페기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개미 떼처럼 우글우글 모인 사람들이 이제야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수천 개의 바늘이 온몸을 찌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제 앞에 놓인 성화대가 배로 무거웠다.

유연한 곡선을 그리는 몸체는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자라지 않는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하였는데, 그 기이한 신성함을 이토록 뼈저리게 느낀 적이 없었다.

성화를 담는 그릇. 하지만 지금은 성화를 빼앗긴, 빈 그릇.

저것을 자신이 채워 넣어야 했다. 제게 내려진 권능만이 저 그릇을 다시 채울 수 있다 하였다. 만일 천사께서 권능을 거두지 않으셨다면. 그래서 저 성화가 꺼진 것이 단순한 오류라면.

레오폴트는 자기 자신을 믿으라 하였다. 너에게 권능을 내려 주신 천사 예리엘을 믿으라 하였다. 믿음으로써 네 앞에 펼쳐진 난관을 극복할지니, 그 모든 영광을 하늘에 계신 여덟 천사께 돌리라 하였다.

하지만 페기는 알았다. 그녀는 더 이상 믿지 못했다. 꺼진 성화대와 잠잠한 제 손끝이 그녀에게서 믿음을 앗아 갔다. 하늘의 천사께서 그녀의 무언가를 앗아 가셨다면, 그건 권능이 아니라 한 점 흔들림 없이 믿을 수 있는 마음이리라.

그럼에도 그녀는 이미 예견된 패배의 길을 걸어야 했다. 페기는 달달 떨리는 아래턱에 애써 힘주며 성화대로 손을 뻗었다. 수백 명의 따가운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끝을 저들이 몰랐으면 좋으련만.

찰나가 흘렀다. 혹은 영원일지도 모르겠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그녀의 손은 점점 떨림을 더해 갔다. 페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솟구쳐 속을 얼룩덜룩 물들이고 있었다.

불현듯 누군가의 혼잣말이 또렷하게 울렸다.

“못하는데?”

그걸 기점으로 수군거림이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못하네. 못하잖아. 성화, 권능, 사도, 타락한 사도, 범인, 뱀, 뱀, 뱀.

페기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석상처럼 굳은 레오폴트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면 구멍 사이로 보이는 연옥색 눈이 곧 절명할 것처럼 확장되어 있었다.

덜컥 겁이 난 페기가 다시 고개를 홱 돌렸다. 성화대로 뻗은 손 위로 다른 손을 겹쳤다. 경련 이는 손에 이 악물고 더 힘을 주었다. 눈가가 홧홧해졌다. 꽉 틀어막은 목구멍 사이로 울음이 새 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 어디선가 돌이 날아왔다. 부지불식간 이마를 얻어맞은 페기가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저 요사스러운 마녀를 당장 끌어내!”

사내의 거친 목소리가 성당 안을 쟁쟁하게 울렸다. 근위대가 달려가 사내를 포박했으나, 한번 물웅덩이에 인 파문은 그칠 새가 없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젊은 여인이 벌떡 일어났다.

“뱀! 저 여자가 뱀이에요! 당장 일어나, 이 사특한 뱀아! 네가 죄 없는 우리 어머니를 죽였잖아!”

페기는 충격으로 흐릿한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여인이 몸부림치며 고래고래 소릴 내지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그리피나 홀에서 제일 먼저 죽은 샤미소 백작 부인의 딸이었다. 눈앞에서 어머니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하고 정신이 반쯤 돌았다고 하였다.

“설마 정말로….”

화르르 번지는 파문을 근위대도 막을 재간이 없었다. 기실 막을 용의도 없었다. 근위대고 성직자고 귀족이고 한데 얽힌 경악의 시선이 제단 위에 못 박혔다. 그 위로 촘촘히 쌓이는 악의를 페기는 온몸으로 깨우쳤다.

“그만! 그만하지 못할까!”

노성을 터트리며 달려 나온 레오폴트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근위대! 당장 저들을 내보내거라! 당장!”

“그만하십시오, 성하! 어찌 타락한 사도를 감싸시는 겁니까!”

벌떡 일어난 보나벤투라가 고함쳤다. 레오폴트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삿대질했다.

“네 감히 나를 거스르는 것이야?”

“예, 타락한 사도를 감싸시는 것이 성하의 뜻이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거스를 것입니다!”

“저 무엄한 놈을 보았나! 내 오늘 반드시 네 목을 칠 것이야!”

“보나벤투라 추기경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발 그만하십시오!”

글리체리아마저 보나벤투라를 두둔하고 나섰다. 노기가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레오폴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터져 나오지 못하는 분노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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