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328)

원탁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손을 들어 불꽃을 틔우려던 레오폴트가 손을 감싼 흰 천을 보고 앓는 소리를 냈다.

“내 지금 손이 이러해 보이지는 못하겠군. 내가 아니면 엘피도 공작도 있으니 상관없겠지. 성화는 그 존재 자체로 귀중한 것. 누가 틔우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가 꺼졌으니, 마땅히 천사 예리엘의 현신이신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이 일을 수행하셔야 합니다.”

보나벤투라가 무섭게 말했다. 글리체리아도 당연하다는 듯 합세했다.

“오늘 아침, 성 예리엘 대성당의 종이 울리는 걸 들은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지금 성궁의 모두가 카타리나 공작 전하를 의심하고 있어요. 이런 자리에서 말씀드리기 참으로 면구스러우나, 전하께서 뱀이라는 헛소문까지 돕니다.”

“흥, 앞뒤가 맞긴 하군.”

콧방귀를 뀐 아나클레토가 싸한 시선을 느끼곤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그렇잖습니까. 성궁에서 마귀가 나타나던 날, 전하께선 아그리피나 홀 근처에 계셨죠. 사도로 위장한 뱀이 활개를 치고 다니자, 하늘의 여덟 천사들이 뱀에게 속고 있는 우리에게 암시를 주신 겁니다.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를 꺼트림으로써.”

“…….”

“아, 내 생각이 그렇단 게 아니라 그런 헛소문을 퍼트리는 자들이 이렇게 생각했을 거다, 뭐 이런 겁니다.”

솔란지아가 한숨을 삼키며 아나클레토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움찔한 아나클레토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아나클레토 추기경의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보나벤투라가 나섰다.

“충분히 타당한 의심입니다. 말씀드렸듯 근자에 일어나는 모든 변고는 서로 이어져 있음이 분명해요. 뱀은 사도와 교회의 주적이니, 만일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뱀이라면 어느 날 갑자기 성화가 꺼져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보나벤투라 추기경! 어찌 그런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하십니까!”

“신성 모독적인 사건이 이미 발생했으니까요. 그러니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직접 증명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나벤투라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성하, 천 년 만에 뱀이 부활했고, 원탁의 가장 고귀한 추기경이 이유도 모른 채 죽었습니다. 이 모든 변고의 종착지가 성 예리엘 대성당의 빈 성화대입니다. 성화가 다시 타오르지 않는 이상,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과연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성화가 사라진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리라. 최악의 경우 그녀가 뱀일 수도 있고, 차악의 경우 모종의 이유로 하늘의 천사께서 그녀에게 내어 준 권능을 거두신 것이었다.

전자라면 고민 없이 참하면 그만이다. 후자라면 그녀가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했음이다. 자비로운 소명의 천사께서도 감히 용납하지 못할 죄. 그 역시 참해야 마땅했다.

“전 사도를 따르는 자로서 그간 성심으로 모셔 온 사도를 의심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디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제 마음속에 깃든 의심의 싹을 잘라 주십시오.”

보나벤투라가 굳건하게 말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듯 단단한 기세였다.

망설이던 글리체리아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하지만 보나벤투라, 모든 사도가 불씨를 틔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러했다. 사도들이 권능을 쉬이 보이지 않는 것 역시 그런 이유가 컸다. 성흔을 갖고 있음에도 불씨를 틔우지 못하는 사도들은 본인조차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신성한 권능을 지니고 있음은 성화가 증명했지요. 카타리나 공작 전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께선 오로지 본인만이 자신의 권능을 증명하실 수 있어요.”

“…….”

“그러니 전하께선 반드시 불을 피우셔야 할 겁니다.”

마치 불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는 고려하지도 않는다는 투였다. 하지만 원탁의 모두가 그런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보나벤투라는 뚫어져라 레오폴트를 응시했다. 이제는 그가 결단을 내릴 차례였다. 하지만 번민하는 연옥색 눈은 갈피를 잡지 못했고, 그의 입은 오래도록 열릴 줄 몰랐다. 길어지는 침묵 속에 불편한 기운이 움텄다.

그러자 지금껏 침묵하던 클레멘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 투표를 해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기다렸다는 듯 보나벤투라가 반듯하게 손을 들었다. 한숨만 푹푹 내쉬던 글리체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뒤를 이어 아나클레토가 슬슬 손을 들었다. 3 대 3. 그러나 레오폴트가 손을 들지 않는다면, 그의 투표권이 우선권을 가지며 이 투표는 그대로 파투 난다.

솔란지아는 망설임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탐보프를 대표하며 탐보프의 국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 다른 사안이었으면 교황의 손을 들어 주었겠으나, 이번 사안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성화가 꺼졌다.

이 충격적인 일은 순식간에 들불처럼 번져 가리라. 만일 레오폴트의 뜻대로 대강 무마하고자 한다면 도리어 격렬한 반대에 부딪힐 것이었다. 한번 조각난 신뢰는 쉬이 접붙여지지 않으니, 사람들은 카타리나 공작에 대한 의구심을 쉬이 떨치지 못할 것이다.

탐보프는 교회의 수호자. 그러나 교회의 몰락까지 책임질 이유는 없다.

끝내 결심한 솔란지아가 손을 들었다. 레오폴트가 앉은 상석에서 찌를 듯한 시선이 느껴졌으나, 외면하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었다. 그녀는 부디 이 선택이 옳은 길이길 간절하게 빌었다.

느릿하게 좌중을 둘러본 클레멘스가 선언했다.

“찬성 네 표, 반대 두 표. 축하합니다, 보나벤투라 추기경. 그대의 의견이 선택되었군요.”

“그저 옳은 말을 했을 뿐입니다.”

“…내가.”

레오폴트가 말을 뚝 자르고 들어왔다.

“원탁의 결정을 존중하는 이유는 내 손으로 재건한 원탁을 다시 잿더미로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내 딸을 믿기 때문이오.”

“…….”

“하지만 그것이 오늘의 일을 잊는다는 것은 아니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레오폴트가 엄숙하게 추기경들을 굽어보았다.

“잘 보았소. 부디 그대들이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페기는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미친 듯이 책을 펼치고 또 펼쳤지만 원하는 건 아직 찾지 못했다. 초조함에 마음이 거멓게 타들어 갔다.

바닥에 주저앉아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던 그녀는 문득 발치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레오폴트가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페기는 부스스한 치맛자락을 정리하며 일어섰다.

“계속 사료를 뒤지고 있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분실된 사료가 너무 많아서 며칠 내로 다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도의 역사는 수천 년이 넘는다면서요. 분명 나 같은 경우가 또 있을 거예….”

“이제 이런 건 하지 마라.”

성큼성큼 다가온 레오폴트가 그녀의 손에서 책을 빼앗았다. 그리고 멍하니 선 그녀의 양손을 잡아 쥐었다.

“불을 피워야 한다, 페기. 반드시 해내야만 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일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네가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를 피우기로 했다. 네가 빈 성화대를 채우기만 한다면 작금의 소란은 단번에 가라앉을 게다. 아무도 너를 의심하지 못할 게야.”

레오폴트는 페기의 손을 꼭 부여잡고 간곡하게 말했다. 멀거니 그를 쳐다보던 페기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알잖아요. 난 못해요.”

“아니다, 할 수 있어.”

“지금 못하는 걸 내일이라고 어떻게 할 수 있다는….”

“원래 이런 일은 예고 없이 닥치는 법이란다. 나도 어느 날 갑자기 손끝에서 불씨가 튀었어. 너라고 다르겠느냐.”

“하지만….”

페기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떻게 하는 건데요?”

“…….”

“레오, 어떻게 하는 건지 적어도 설명은 해 줘야죠. 무작정 할 수 있다고만 하면 어떡해요. 난 못하겠는데, 도저히.”

“그런 생각 마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설마 예리엘께서 널 버리셨겠느냐. 이건 그저 네게 내려진 시련에 불과….”

“못하겠다니까요! 당신도 어떻게 하는지 설명 못 하잖아요!”

갑작스러운 고성에 레오폴트의 말이 뚝 끊겼다. 페기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그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손을 비틀어 빼내었다.

“천사님이 내게 내린 시련? 그걸 내가 극복 못 하면 어떡해요. 지금 안 터지는 불씨가 내일도 안 터지면 어떻게 되냐고요!”

“…….”

“왜 대답을 못 해요…?”

페기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내일 불을 못 피우면, 난 어떻게 되는 거예요?”

가면 속 고통에 사로잡힌 연옥색 눈이 꾹 감겼다. 지척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페기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제게로 뻗어 오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며 더듬더듬 입가를 감싸 쥐었다. 토할 것 같았다.

“잠깐… 잠시만, 생각 좀 할게요.”

페기는 그대로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곁방에 들어갔다.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뒤늦게 따라온 레오폴트가 간절하게 제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렸지만,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이 터져 나올지 몰라 입만 꽉 틀어막았다.

멍하니 문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페기가 스르르 주저앉았다. 갑자기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분명 어젯밤까지만 해도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었는데. 건강해진 레오폴트와 차라를 데리고 평화로운 숲속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리라 다짐했는데.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카니나에서 닥친 돌풍이 잦아들고 한동안 평화롭던 내 삶에 왜 이런 파란이 닥친 걸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난 그저 날 방어하고, 내 소중한 이들을 지키려던 것뿐인데.

문득, 저 위에 걸린 동심원이 눈에 들어왔다.

멀거니 동심원을 올려다보던 페기가 엉금엉금 그쪽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 꿇었다. 손을 비비며 절박하게 빌었다.

“제발 돌려주세요.”

거둬 가신 성화를. 거둬 가신 나의 무언가를.

“제가 삿된 마음을 먹어 그러신 건가요? 앞으론 그러지 않을게요. 잘할게요. 천계율의 가르침대로만 살게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새파란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았다. 그로써 누군가를 짓밟고 이겨 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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