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328)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레오폴트의 고함 소리에 고드릭이 쩔쩔맸다.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가 꺼졌습니다. 제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왔습니다.”

“여기 페기가 이렇게 멀쩡히 있는데 성화가 어찌 꺼졌단 게야!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레오폴트가 시뻘게진 눈으로 페기를 가리켰다. 고드릭은 그저 황망히 고개만 조아렸다.

성화. 스스로 타올라 만물을 창조하는 성스러운 불.

사도의 각성과 함께 타오르는 성화는 사도의 죽음과 함께 잦아든다. 성화의 존재는 그 자체로 지상에 강림한 천사의 권능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사도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성화가 먼저 그치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성화가 꺼졌다.

페기는 더듬더듬 제 심장께를 만져 보았다. 두근두근 박동하는 심장의 진동이 느껴졌다. 살아 있다. 하지만 성화는 꺼졌다.

“일단 대성당에 가 봐야겠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는 이상 도저히 믿을 수가 없겠구나.”

노여움 가득한 목소리로 뇌까린 레오폴트가 성큼성큼 방을 나갔다. 페기는 경황없이 그를 따라갔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보이지 않게 팽창하는 불안감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종이 울린 직후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된 성 나르세스 광장은 싸늘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레오폴트는 흰 천을 펄럭이며 성 예리엘 대성당으로 들었다. 순백으로 칠한 성당의 벽면이 질릴 정도로 희었다.

“성하.”

초조하게 제단 앞을 서성이던 주임 신부가 황급히 달려왔다. 레오폴트는 단호한 손짓으로 그의 입을 막고 성큼성큼 제단을 올라갔다. 교회를 상징하는 동심원 아래, 성화대는 텅 비어 있었다.

레오폴트는 망연자실하여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를 어찌 해석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저, 성하….”

늙은 주임 신부가 힘겹게 제단을 올라와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그러나 레오폴트가 딱딱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가로챘다.

“어젯밤 대성당에 누가 침입한 흔적이 있는가?”

“예? 아니요, 그런 건 없습니다. 설령 누가 침입했다 하더라도 이 일과는 관련 없겠지요. 성화대에서 타오르는 성화를 인위적으로 꺼트리는 방법은 없지 않습니까.”

성화는 저절로 피어올라 저절로 꺼진다. 한낱 인간은 성화를 피울 수도, 꺼트릴 수도 없었다.

“그럼 성화가 왜 갑자기 꺼졌단 말인가!”

“그, 그건….”

주임 신부의 시선이 멍하니 선 페기에게 가 닿았다. 레오폴트가 벌컥 화를 냈다.

“지금 누굴 탓하려는 게야!”

“하, 하오나….”

“쓸데없는 소리 하려거든 그 입 다물게! 고드릭! 당장 근위대에게 침입자를 색출하라 이르거라!”

고드릭이 황급히 대성당을 달려 나갔다. 레오폴트가 몸을 홱 돌려 제단을 내려가자, 주임 신부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그를 뒤쫓았다.

“성하, 성하! 사도께서 멀쩡하신데 성화가 꺼졌습니다! 이는 불길한 징조입니다! 대비를 하셔야 합니다!”

“대비? 무슨 일이 닥칠지 어떻게 알고 대비를 하란 건가!”

“우선 사도께서 건재함을 증명하셔야지요! 종소리를 들은 성궁의 모두가 불안감에 떨고 있습니다!”

“그 눈은 옹이구멍인가! 페기가 저리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안 보여?!”

“제 말이 그런 뜻이 아님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주임 신부가 절박하게 매달렸다. 레오폴트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꽉 주먹 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별안간 성당 안으로 소식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성하! 클레멘스 추기경이 대성당의 종이 울린 연유를 물으셨습니다.”

“아나클레토 추기경이 지금 성 나르세스 광장 앞에서 근위대와 마찰을 빚고 계십니다!”

“성하, 글리체리아 추기경이….”

“그만!”

레오폴트의 노성이 성당 안을 쟁쟁하게 울렸다. 소식을 전하러 온 수도사들이 안절부절못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좌중에 싸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때, 누군가 석문을 밀어젖히며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이 땀으로 범벅된 수도사였다. 그는 헐떡이며 레오폴트의 발아래 철퍼덕 엎어졌다.

“성하, 만달 추기경이….”

골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고 있던 레오폴트가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수도사의 말이 한발 빨랐다.

“만달 추기경이 우물 안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셨습니다!”

“…뭐?”

레오폴트가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충격받은 그의 눈이 페기를 향했다. 멀리 맞닿은 시선에 지독한 불길함이 얽히기 시작했다.

회의장의 문이 긴급히 열렸다. 추기경들이 속속들이 도착하는 가운데, 원탁의 분위기는 침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변고란 말입니까.”

하룻밤 새 뺨이 푹 꺼진 글리체리아가 한탄하듯 말했다. 솔란지아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성화가 왜 갑자기…. 아무래도 종이 잘못 울린 게 아닐까요? 착오가 분명합니다.”

횡설수설하는 솔란지아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새벽 기도 중에 불려 나온 그녀는 원탁에 도착해서야 자신이 안경을 거꾸로 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보나벤투라가 침울하게 말했다.

“잘못 울린 거면 우리에게 호출이 왔겠습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선 무사하시다고 하더군요. 곧 성하께서 오실 테니 말씀을 들어 봅시다.”

솔란지아는 불안하게 뛰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째선지 눈을 감고 침묵하는 클레멘스를 힐끗 훔쳐보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카타리나 공작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이였다. 저 심각해 뵈는 얼굴로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아나클레토가 들어왔다.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은 그가 시뻘게진 얼굴로 외쳤다.

“저 망할 근위대 놈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내 앞을 가로막아!”

솔란지아가 미간을 왈칵 찌푸렸다.

“설마 성 나르세스 광장에 다녀오는 길입니까?”

“그래요! 밤새 성화가 꺼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릴 듣고 부랴부랴 대성당에 확인하러 갔던 겁니다! 한데 그 천한 놈들이 날 들여보내 주질 않더군요!”

글리체리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성궁에 아나클레토 추기경을 모르는 근위대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성하의 명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놈들 태도가 아주 오만불손했단 말입니다!”

“먼저 오만불손하게 굴었으니 그런 거겠죠.”

“뭐요?!”

솔란지아의 타박에 아나클레토가 벌컥 화를 냈다. 보나벤투라가 눈을 시퍼렇게 떴다.

“다들 자중하십시오. 지금이 어느 땐데 그리 함부로 언성을 높이십니까.”

“어느 때긴요! 밖에선 마귀가 창궐해, 뱀이 돌아다녀, 안에선 성화가 꺼져! 이게 다 타락한 교국을 벌하는 하늘의 분노라, 이 말입니다!”

“…그러는 추기경이야말로 교국의 타락에 가장 큰 일조를 한 사람이지 않나.”

불현듯 아나클레토의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나클레토가 식겁하여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열린 문 앞에 레오폴트가 우뚝 서 있었다.

“서, 성하….”

모두들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형한 눈으로 그들을 훑어본 레오폴트가 느릿하게 교황의 자리로 가 앉았다.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살피던 아나클레토가 느물거리며 살갑게 말을 붙여 왔다.

“성하, 깨어나셨다는 말은 진작 들었습니다만, 이렇듯 건강해 보이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두시오. 그런 번드레한 인사나 듣자고 모인 것이 아니니.”

레오폴트가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만달 추기경이 사망했소.”

“예?!”

다들 벼락 맞은 듯 경악했다. 글리체리아가 창백해진 얼굴로 더듬더듬 물었다.

“이, 이렇게 갑자기요? 연세가 있으시다곤 하나 아주 건강하던 분인데….”

“우물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더군. 지금 심문관들이 만달 추기경의 시신을 조사하고 있소.”

“맙소사….”

원탁 위로 술렁거림이 파도처럼 번졌다. 만달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원탁 추기경이었다. 그야말로 교황을 셋이나 보필했던 역사의 산증인이기에 충격은 더했다.

“만달 추기경의 장례는 사인이 밝혀진 뒤 논하도록 하겠소.”

“성화는 어찌 된 것입니까? 진실로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가 꺼진 것이 맞습니까?”

보나벤투라가 날카롭게 물었다. 레오폴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방금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왔소. 어젯밤 성당의 문이 닫힐 때까진 이상이 없었다 하니, 간밤에 별고가 생긴 것이겠지.”

“카타리나 공작 전하는 무사하신데 성화는 꺼졌다. 이게 가능이나 한 일입니까? 애당초 성화는 사도에게 깃든 권능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잖아요.”

솔란지아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힘없이 눈을 내려트렸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뱀에, 성화에, 만달 추기경까지. 꼬리를 물며 일어나는 변고가 더욱 가슴을 불안하게 옥죄었다.

보나벤투라가 딱딱하게 말했다.

“한 번도 드문 일이 이토록 연달아 일어날 리 없습니다. 근자의 변고들은 모두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해요. 주모자를 발본색원해서 그 연쇄의 사슬을 끊어 내야만 합니다.”

“그 주모자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잖습니까?”

“성하의 말씀대로 아나클레토 추기경의 타락이 문제일지도 모르죠.”

“뭣이!”

발끈한 아나클레토가 레오폴트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차갑게 코웃음 친 보나벤투라가 레오폴트에게 직언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신성의 상징인 성화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성하, 부디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손으로 성화를 다시 틔우시지요.”

절묘한 묘안에 모두가 탄성을 내뱉었다. 사도는 성화의 가호를 받아 성화의 힘을 일부 빌려 쓸 수 있었다. 예후르가 마귀를 태워 죽이던 힘 역시 성화의 힘이었다.

레오폴트가 난처한 기색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그사이 다른 추기경들이 화기애애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 수가 있었군요! 사도께서 피우시는 불은 성화 그 자체이니 오늘의 일이 심각하게 비화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성화가 왜 꺼졌는지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젭니다. 역사상 전례 없던 일이 갑자기 일어난 이유가 분명 있어요.”

“그건 그렇지만… 뱀이 깨어났고 만달 추기경마저 그 지경이 되신 마당에 최대한 구설수 없도록 덮고 넘어가는 것도 필요해요.”

레오폴트가 머뭇거리며 끼어들었다.

“성화는 내가 틔우는 것이 어떻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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