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328)

기적이란 찬사에 걸맞게 레오폴트의 회복 속도는 경이로웠다. 깨어난 지 고작 며칠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는 요 몇 년 중 가장 정력적으로 업무에 임했다.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눈빛은 총명하고 말은 매서웠다.

그러자 그의 한평생을 따라다녔던 저주받았단 소문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사람들은 미로의 레오폴트야말로 천사들의 사랑을 받는 사도라 떠들고 다녔다. 비록 뱀과 마귀가 창궐하였지만, 레오폴트의 기적이 있어 모두 무사하리라 믿었다.

레오폴트가 돌아오자, 그동안 그의 대리로 일했던 페기는 뒤로 물러났다. 페기는 그동안 처리했던 일들의 경과를 레오폴트에게 설명해야 했는데, 라발의 문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페기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겨우 말을 꺼냈다.

“레오, 라발과의 합의안이 완성되었어요.”

레오폴트가 멈칫 그녀를 보았다. 그와 시선이 맞닿자 페기는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예후르가 인장을 찍고 갔어요. 아직 공표하지 않았을 뿐 실질적인 효력은 지금도 발휘되고 있고요. 이제야 말해서 미안해요. 당신을 기만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다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페기는 입술을 꾹 사리물었다. 다른 일들이 많아서, 당신이 충격에 또다시 쓰러질까 봐. 이딴 건 죄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레오폴트를 기만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치맛자락을 꽉 부여잡은 그녀의 손등을 하얀 천으로 동여맨 레오폴트의 손이 살며시 감싸 왔다. 페기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가면에 뻥 뚫린 구멍 사이로 부드럽게 휘어진 연옥색 눈이 보였다.

“알고 있단다.”

“…안다고요? 어떻게.”

“예후르를 옆에 두고 지켜본 지가 어언 20년이 되어 간다. 대충 그리할 것이라 예상이 갔지. 탐보프가 고깝다며 제 약혼녀도 멀리하던 녀석이 아니더냐.”

레오폴트가 투덜거렸다.

“한데 그 녀석은 제가 저지른 짓이면 자기가 와서 말을 해야지, 왜 애먼 너를 시키고 있는지, 원. 예후르가 와서 자백하면 오랜만에 성질도 좀 부리고 화도 좀 내려고 했는데, 이리 아무런 죄 없는 네가 죄인처럼 고개를 조아리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느냐. 하여간에 잔머리 하난 아주, 쯧쯧.”

“내, 내가 말하겠다고 한 거예요!”

“…….”

“그게, 예후르라면 통보식으로 말할 게 뻔하니까…. 안 그래도 화나는 내용인데 그렇게 들으면 더 화날 거 아니에요.”

페기가 레오폴트의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멀뚱히 그녀를 응시하던 레오폴트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 맞다! 그 녀석이라면 지나가는 말로 ‘오늘부로 라발과의 국교가 회복되었으니 그렇게 알아요’ 하고 말았겠지. 에잉, 그 녀석은 그 교만한 말투부터 고쳐야 해. 멋모르는 사람들이나 그 멀끔한 낯짝과 목소리에 속아 엘피도 공작은 참 상냥한 분이시라 하지, 우리는 그 시커먼 속내를 다 알지 않느냐!”

“그렇게 시커멓지는….”

“아이고, 페기야. 너마저 그 낯짝에 속으면 아니 된다. 고 녀석이 너한테나 좀 다정한 게지, 나한텐 얼마나 재수 없게 구는지 모를 게다. 흥. 하도 분이 차서 가끔 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차마 그 예술적인 얼굴에 흠집을 낼 순 없어서 참은 것이 수백 번이야!”

“얼굴에 속은 건 내가 아니라 레오 같은데요?”

의아하게 던진 말에 두 눈을 끔벅끔벅하던 레오폴트가 뒤늦은 탄성을 내뱉었다.

“오, 생각해 보니 그렇구나. 역시 얼굴을 보지 말아야….”

“…….”

“그래, 이렇게 중요한 건을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진행한 건 화내야 마땅할 일이지. 암, 그렇고말고. 한데 얼굴을 보면 이 화를 전부 분출할 수 없을 테니, 내 파리발 숲의 별궁으로 옮기거든 예후르 고 녀석에게 한 달간 출입 금지 명령을 내려야겠다.”

페기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레오폴트가 장난스럽게 눈을 휘었다.

“왜. 한 달은 너무 길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파리발 숲의 별궁이라니요?”

“벌써 잊은 게야? 너와 나 그리고 차라, 셋이서 숲속의 별궁으로 떠나자 약속하지 않았느냐.”

잊었을 리 없다. 다만 레오폴트가 라발의 이야기를 듣고도 이리 훌훌 떠나자 말할 줄은 몰랐을 뿐이다.

레오폴트는 상념에 잠긴 연옥색 눈을 조용히 내리떴다.

“라발을 용서한 것이 아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이 늙은이가 떠나는 것이지.”

“…….”

“네 말대로 이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으며 쉬고 싶구나.”

생기 넘치는 목소리에는 채 감추지 못하는 고단함이 녹아 있었다. 페기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은 레오폴트가 물었다.

“너는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겠느냐?”

“…네.”

페기는 애써 웃어 보였다. 그녀의 복잡한 심사를 다 짐작한다는 듯 레오폴트는 그저 말없이 어깨만 토닥여 주었다.

그날 밤, 내전에선 작은 연주회가 열렸다.

음악에 젬병이라던 차라는 그간 레오폴트의 권유로 배웠던 바이올린 연주를 선보였다. 처음엔 그럭저럭 괜찮더니, 갈수록 선율이 꼬이다 못해 마지막엔 줄까지 끊어 먹었다. 그럼에도 레오폴트와 페기는 박수를 아끼지 않았고, 차라는 꼭 토마토처럼 붉어진 얼굴로 자리에 돌아왔다.

그 뒤를 이어 자연스럽게 피아노 앞에 앉은 페기는 못내 서름한 눈으로 건반을 내려다보았다. 근 10년, 누구보다 가까웠던 피아노가 이리 낯설어질 줄 알았을까. 그녀는 조금 이상한 기분으로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익숙한 선율이었다. 파도처럼 거세게 몰아치면서도, 한순간 숲의 개울로 잦아들었다. 제 손이 아닌 것처럼 움직이는 손가락은 변화무쌍한 음악을 쉼 없이 연주해 나갔다. 기분이 조금 더 이상해졌다. 낯설고 생경한 느낌이 음악이 되고 해일이 되어 그녀를 덮쳐 왔다.

“…아.”

손가락이 우뚝 멈추었다. 페기는 멍하니 하얀 건반을 응시했다. 건반 위에 고인 물기 위로 또다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무, 무슨 일이야!”

차라와 레오폴트가 놀라 달려왔다. 당혹한 페기가 얼른 눈가를 훔쳤다. 하지만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쏟아졌다.

“무슨 일이냐!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게야? 응?”

“야, 뭐라고 말 좀 해 봐!”

레오폴트와 차라가 그녀를 둘러싸고 닦달했다. 페기는 경황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아, 아니야, 그런 거… 그냥….”

페기는 대답을 망설였다. 지금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여러 단어가 떠올랐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을 함의하는 기분은 단 하나였다.

“좋아서.”

“…….”

“돌아온 게 좋아서 그래.”

페기는 헐떡이는 숨을 짓누르며 뺨의 물기를 마저 닦아 냈다. 멀거니 그녀를 보던 레오폴트와 차라가 허탈하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뭐야, 난 또 큰일 난 줄 알았잖아!”

“그러게나 말이다. 페기가 아주 우리 간을 들었다 놨다 하는구나.”

투덜투덜 제자리로 돌아간 차라와 레오폴트가 마구 연주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어느 유명한 소곡을 연주해 달라는 둥, 요새 유행하는 가수의 노래를 연주해 달라는 둥. 빗발치던 요구는 어느새 서로를 향한 신경전이 되어, 교양이 있느니 없느니 옥신각신 다투는 양상이 되었다.

페기는 순식간에 둘 사이에서 튕겨져 나왔다. 정신없이 오가는 말소리에 옅게 남아 있던 울음기마저 싹 날아가 버렸다. 멍하니 그들을 지켜보던 페기는 솟구치는 웃음을 참으려 황급히 입가를 가렸다. 그러나 풋, 하고 튀어나온 웃음소리까지 가릴 순 없었다.

레오폴트와 차라가 말을 뚝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페기는 아예 그들을 외면한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녀가 또 우는 줄 알고 식겁했던 두 사람은 둥글게 솟아오른 그녀의 광대를 발견하곤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웃든가 울든가 하나만 해….”

하지만 괜히 핀잔을 놓던 차라의 입꼬리도 이미 슬금슬금 떨리고 있었다. 슬쩍 눈을 굴려 서로를 본 레오폴트와 차라가 크게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높낮이의 웃음소리가 삼중주처럼 조화롭게 연주되었다.

***

아직 태양이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녘은 몹시 어두웠다. 불을 모시는 성궁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아스라한 어둠이 비단처럼 사방을 뒤덮어, 그 시각 밖을 나다녀야 하는 수도사들은 횃불로 새벽의 어둠을 한 겹 한 겹 벗겨 내곤 했다.

그리 어둠을 밟아 나아가는 것에 가장 익숙한 이들은 천사의 이름을 단 대성당의 문을 여는 수도사들이었다. 온 대륙을 통틀어 가장 먼저 문을 열고 가장 늦게 문을 닫아야 하는 곳이 바로 성 나르세스 광장의 대성당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늘도 다섯 명의 수도사가 성 나르세스 광장에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다섯 대성당의 석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직하게 퍼져 갔다. 아직 지상에 사도를 내려보내지 않은 나머지 세 대성당의 문은 굳건히 잠겨 있었다.

소명의 천사 성 예리엘 대성당을 맡은 수도사는 자꾸만 새 나오는 하품을 참으며 느릿느릿 중앙 통로를 걸었다. 졸음은 수행의 적이요, 번민의 요체라. 아직도 새벽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수도사는 눈을 비비며 중앙 제대에 올랐다.

순식간에 잠이 확 달아났다.

멍하니 눈을 끔벅이던 수도사가 다시 눈을 비볐다. 그러나 눈앞의 광경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안색이 하얘졌다가 퍼레졌다가 붉어졌다. 점점 벌어지는 입술 새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수도사는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올랐다. 빙글빙글 올라가는 원형 계단은 성당의 꼭대기로 이어졌다. 그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무섭게 헐떡이면서도 네 발로 기듯이 올라 밧줄을 쥐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종을 울렸다.

새벽 찬 공기 속으로 음산한 종소리가 퍼져 갔다. 놀란 새들이 퍼드덕 날아오르고, 그 아래 사람들은 경악감을 집어삼켰다.

바야흐로 칠월의 어느 여름날.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가 꺼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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