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스러운 욕설을 우아하게 풀어 설명한 끝에 레오폴트가 손수 서명하자, 서신이 완성되었다. 그때껏 조용히 지켜만 보던 페기가 참았던 말을 터트렸다.
“예후르가 뱀의 흔적을 발견했대요.”
레오폴트가 멈칫 그녀를 돌아보았다. 페기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마지막으로 흔적이 발견된 곳은 마가 공작령의 동쪽이에요. 리누스 도시 연맹 쪽으로 갈 거라던데, 지금쯤 국경을 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교국 동쪽에 위치한 리누스 도시 연맹은 각 도시 국가별로 성향이 판이했다. 오래된 교구로 존중받아 온 위스누아라면 두 팔 벌려 그를 환영하겠으나, 계속해 동쪽으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방해 공작을 맞닥뜨릴 것이었다.
하지만 더 예상할 수 없는 건 뱀이었다. 마귀가 저 바깥에서 활개를 치고 다님에도, 마귀를 부리는 뱀은 이상할 정도로 그 존재감이 미약했다. 남은 기록도, 알려진 것도 거의 없는 미지의 존재. 그리 베일에 싸인 존재가 예후르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겠죠?”
페기는 치맛자락을 꽉 부여잡았다. 한 번 보았던 마귀와 달리 뱀은 머릿속으로 그려지지조차 않았다. 미지에서 기인한 두려움은 그 무엇보다 크고 깊었다.
“돌아올 게다. 예후르가 언제 실패하는 것을 본 적이나 있느냐.”
레오폴트가 토닥이듯 일렀다. 페기는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예후르는 가장 뛰어난 사도니까,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레오폴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가 놓았다. 페기는 그를 한 번 안아 주고 방을 나왔다. 다시 원탁으로 돌아온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레오폴트를 대신해 할 일이 많았다.
그런데 내전을 벗어나 집무실로 가는 복도에서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세도파 역시 놀란 듯 걸음을 멈추었다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불의 종, 불의 사자, 우리를 인도하시는 소명의 천사 예리엘의 현신께 인사드립니다.”
세도파는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며 예를 취했다.
“그간 고초를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명예를 회복하셔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페기는 조금 피곤한 기색으로 세도파를 보았다. 지금 그녀의 말이 고깝게 들리는 것은 그녀가 아나클레토 추기경의 조카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제 심사가 뒤틀렸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다행인 일이지요. 교국이 어지러운 때에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는 없으니.”
“그래도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뱀의 흔적을 발견하셨다니, 곧 좋은 소식이 날아오지 않을까요?”
“…아나클레토 추기경이 그런 것까지 영애에게 얘기하나요?”
멈칫 굳었던 세도파가 다시 미소를 그려 올렸다.
“그럴 리가요. 숙부님께선 원탁 추기경으로서의 위치를 잘 인식하고 계시니 걱정 마세요. 저는 공작 전하께서 따로 서신을 보내 주셔서 알았어요.”
“아….”
페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 살짝 입술을 깨문 세도파가 이내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공작 전하께서 이번에 뱀을 처치하고 돌아오면 저와 결혼하겠다고 하셨어요. 조용하게 미리 준비하고 있답니다.”
결혼, 그 단어가 페기의 가슴에 아프게 박혀 왔다. 그녀는 고통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써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교국의 경사군요.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전하의 옆을 지키기에 아직 부족한 면이 많겠지만, 부디 너그럽게 보아 주세요.”
“영애의 부족한 면은 너그럽게 넘길 수 있겠지만, 아나클레토 추기경의 무례함은 그리 넘길 수 없겠지요.”
“…….”
“성하도, 나도.”
세도파의 입매가 설핏 굳었다. 페기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최근 아나클레토 추기경이 사도를 등지려 하더군요. 클레멘스 추기경에게 빌붙어 날 모욕한 것은 참고 넘길 수 있지만, 그 방자함이 엘피도 공작에게까지 이어지면 영애도 난감하지 않겠어요?”
“이번 일은 숙부님께서 너무 성급하셨지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유감이지만 영애의 사과로 갈음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군요. 만약 아나클레토 추기경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면, 앞으로 언행을 유의하라 전하세요. 나는 모욕을 참고 견디는 것에 익숙하지만 엘피도 공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점은 영애도 잘 알리라 생각해요.”
“…그럼요. 잘 알지요.”
세도파의 입꼬리가 살며시 떨렸다. 페기가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엘피도 공작은 내 하나뿐인 오라비라 더욱 마음이 쓰이네요. 부디 주제넘은 참견이 아니었길 바랍니다.”
“주제넘은 참견이라니요. 제가 엘피도 공작 전하와 결혼하면 전하와도 가족이 되는 것인데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페기가 조금 웃었다.
“네, 그러네요.”
페기는 아직 업무가 남아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집무실로 가는 내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모드벤나와 만나자마자 하녀들을 물렸다.
“앉아요, 모드벤나.”
페기가 먼저 집무실 책상 앞에 앉자, 모드벤나가 그 맞은편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그녀를 불러 놓고도 페기는 망설이듯 입술만 달싹였다. 결국 모드벤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알틴은 독방에 구금되어 있습니다. 성하의 진노가 크셔서 처벌이 가벼울 것 같진 않습니다.”
“…무어라 하던가요?”
“억울하다며 악을 쓰더군요. 누가 시켰느냐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성하께서 쓰러지신 건 자정 직전이고, 알틴이 증언한 건 새벽 기도 즈음이에요. 그 새벽녘에 알틴과 접촉할 수 있었던 건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해 들은 원탁 추기경들이 유일해요. 이미 매수해 놓은 심문관을 내게 들일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들 역시 그들뿐이고요.”
그중에서 끝까지 그녀를 비호하던 솔란지아와 보나벤투라, 행방이 묘연한 만달을 제외하면 클레멘스와 아나클레토, 글리체리아가 남는다. 셋 중 배후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는 역시 클레멘스와 아나클레토였다.
“굳이 따지자면 클레멘스일 가능성이 높겠죠. 나만 사라지면 교국을 제 손아귀에 틀어쥘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클레멘스 추기경이라기엔 솜씨가 너무 엉성합니다.”
“엉성할 수밖에요. 시간이 부족했을 테니. 성하께서 기적적으로 회복하고 계셨다곤 하나 깨어나실 날은 요원했고, 언제일지 모르는 그 날이 오기 전에 추기경은 날 끌어내려야 했어요. 그가 교국을 쥐고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엉성한 증언과 증거를 밀고 나가야 할 만큼 중대한 일이었겠죠.”
모드벤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페기가 한숨처럼 말했다.
“아무튼 알틴은 잘 감시하라 이르세요. 영특한 아이니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요.”
“…전하께선 괜찮으십니까?”
모드벤나의 심려 깊은 물음에 페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괜찮냐고? 무려 5년을 함께한 측근 하녀였다. 알틴의 뼈아픈 배신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게 괜찮다는 건 아니었다.
“…배신감에 사로잡혀 있기엔 할 일이 많잖아요. 성하께서 복귀하시기 전까진 내가 힘내야죠.”
페기가 힘없이 웃었다. 모드벤나는 여전히 근심스러운 얼굴로 거듭 당부했다.
“너무 혼자 짊어지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저나 다른 수도사들에게 조금쯤 의지하셔도 괜찮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날을 이렇게 살아가셔야 하는데, 벌써 지치실까 저어됩니다.”
“이런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 바삐 달려야죠.”
“얼마 남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모드벤나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페기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아직은 레오폴트와 차라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먼저 귀띔해야 한다면, 그건 지금까지 함께 고생했던 모드벤나여야 했다.
“…예후르가 돌아오면 떠나기로 했어요.”
순간 모드벤나의 눈이 확장되었다. 페기가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성하께서 성좌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하셨어요. 그동안 많이 고생하셨으니 여생은 편안히 즐기게 해 드리고 싶어요. 나와 차라가 함께 갈 거고요.”
“예… 물론 성하께선 그럴 자격이 충분하십니다만, 전하께선 어찌…. 엘피도 공작 전하를 옆에서 보필하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페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쓴웃음이 입가에 맴돌았다.
“그랬죠. 그랬는데… 지난번에 성하께서 쓰러지시는 걸 보니 도저히 그분을 외면할 수 없더라고요.”
“…….”
“알잖아요. 그분이 날 지키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페기는 손을 뻗어 모드벤나의 손등을 토닥였다.
“예후르의 곁에는 당신처럼 유능한 보좌관이 있으니 문제없을 거예요. 바도비체 영애와 결혼하면, 아나클레토 추기경과 탐보프도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줄 테고요.”
“전하께서 과연 그 아가씨와 결혼하실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뱀을 퇴치하고 돌아오면 세도파와 결혼하겠다고 했대요.”
모드벤나는 말문이 막혔다. 페기가 쓰게 웃었다.
“알아요. 당신이 바도비체 영애를 탐탁지 않아 하는 거. 하지만 예후르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진심이니 그를 잘 보듬어 줄 수 있을 거예요. 난 없어도 돼요.”
“아닙니다! 바도비체 영애는 절대 전하를 대신할 수 없어요. 잘 아시잖습니까,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전하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페기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모를 리가. 그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못 버틸 것 같아요, 내가.”
그의 곁은 늘 세도파가 지키게 되리라.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함께 가정을 이룰 것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아찔해지는 그 광경을 도무지 제정신으로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이건 날 위한 선택이기도 해요.”
예후르는 괜찮을 것이다. 외세에 침략당한 나라를 혼자서 짊어져야 했던 어린 레오폴트와 달리, 장성한 그는 레오폴트가 재건한 나라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의 곁에 머물고 싶어 온갖 이유를 댔었지만, 기실 제 존재가 예후르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니 적어도 자신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곳에 있고 싶었다.
“이해해 달란 말은 하지 않을게요. 당신은 예후르의 보좌관이니까.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나 하나 없어진다고 예후르의 현명함이 가려지는 건 아니니.”
모드벤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이 일을 아시면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어떻게 반응하실지.”
“늘 그랬듯 내 선택을 존중해 주겠죠.”
페기는 붉은 노을이 지는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