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328)

“…….”

“게다가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 일을 주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람들 기억에서 잊힐 때까지 어영부영하는 건 선택지에 없어요. 원탁의 침묵이 오래갈수록 아우성은 커질 겁니다. 그리고 행여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는 게 밝혀지면, 원탁 전체가 공세를 받게 돼요.”

“…….”

“그리고 그 비난의 종착점은 전하가 되시겠지요.”

대차게 반대하던 추기경들도 그 말에는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요한 좌중을 훑어본 클레멘스가 사뿐사뿐 페기에게 다가와 동정하듯 속삭였다.

“그러게 어찌 이런 흙탕물로 나오셨습니까. 바라시던 대로 자연을 벗 삼아 여생을 보내면 훨씬 행복하셨을 텐데.”

페기는 대답 없이 주먹만 꽉 쥐었다. 그러려고 했다.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은 그녀를 여기 앉힌 건 저 알틴과 암막 속의 권력자였다.

클레멘스가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럼 투표합시다. 동의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주세요.”

아나클레토가 번쩍 손을 들었다. 글리체리아 역시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들었다. 솔란지아가 뜯어말렸으나 소용없었다.

그때, 문짝이 뜯어질 듯 발칵 열렸다. 투표 결과를 읊으려던 클레멘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문가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지?”

“그, 그게….”

시종이 헉헉거리며 겨우 말을 토했다.

“성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순간 클레멘스의 낯이 차게 굳었다. 곧바로 태연을 가장했지만 그 찰나를 목격한 자가 있었다. 페기였다.

얼결에 페기와 맞닿은 클레멘스의 올리브색 눈이 잘게 흔들렸다. 싸늘한 얼굴로 그를 노려본 페기가 조용히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다. 붙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몇 번이고 재검하던 주치의가 감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축하드립니다, 성하. 건강이 많이 회복되셨습니다.”

“음…. 확실히 숨 쉬는 것이 예전만큼 버겁진 않군.”

“예. 고질적인 폐병으로 호흡이 많이 힘드셨을 텐데, 거의 완벽하게 회복되신 상탭니다. 오히려 쓰러지시기 전보다 훨씬 더 건강해지셨으니, 이를 기적이 아니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기적은 기적이지.”

레오폴트는 심드렁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되었으니 이만 나가 보거라. 내가 쓰러져 있는 사이 고생이 많았을 텐데, 며칠 쉬어도 좋고.”

“부디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며칠 더 성하의 상태를 두고 봐야 합니다.”

“한 번 내려진 기적이 아무런 전조 없이 거두어지기라도 하겠느냐. 의사가 너 하나뿐인 것도 아닌 것을. 염려 말고 가 쉬어라.”

“하지만….”

말의 꼬리를 물던 주치의가 고드릭의 눈총을 받고 주춤주춤 침실을 나갔다. 레오폴트가 힘없이 웃었다.

“너도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어찌 하겠느냐, 너도 휴가를 좀 줄까?”

“전 성하의 곁이 제일 편안합니다.”

“고집하고는.”

못 말린다는 듯 레오폴트가 고개를 내저었다. 고드릭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정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품에 안겨 계신 성하를 보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너에게도 페기에게도 못 볼 꼴을 보였구나.”

“성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성하의 약에 몹쓸 짓을 한 대역무도한 죄인은 제가 기필코 잡아내겠습니다.”

“그리 서두를 것 없다. 어차피 짐작 가는 이들이 그리 쉽게 꼬리가 잡힐 만한 인물들은 아니지 않느냐.”

레오폴트는 태평하게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었다. 일주일 가까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들었다. 쓰러졌을 때의 기억은 온전치 않으나, 그만하면 대단히 위급한 상황이었으리라. 물론 지금은 날아갈 듯 몸이 가벼웠지만 말이다.

문득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틈으로 시종과 이야기를 나눈 고드릭이 굳은 얼굴로 다가와 속삭였다.

“성하, 클레멘스 추기경이 알현을 청하십니다.”

두꺼운 공단으로 감싸인 레오폴트의 몸이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고드릭은 솟구치는 울화를 간신히 꿀꺽 삼켰다.

“이토록 내밀한 침실에서까지 알현을 받아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도리어 추기경의 무례를 탓하셔야 하는 상황이지요. 그동안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당하신 수모가 얼만데,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다니….”

“추기경을 불러오거라.”

“성하!”

레오폴트는 고집스레 방문을 쏘아보았다.

“불러와.”

“…알겠습니다.”

고드릭이 깊게 허리를 숙인 뒤 침실을 나갔다. 레오폴트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불 속에 든 다리를 빼내어 바닥에 딛자, 곧 문이 열리며 고드릭이 들어왔다. 그 뒤로 변함없이 멀끔한 클레멘스의 낯짝이 보였다.

“오, 성하. 강건하신 모습을 뵈니 비로소 안심이 되….”

벌떡 일어난 레오폴트가 별안간 근위대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내었다. 당황한 클레멘스가 말을 멈추었다. 검집이 반쯤 벗겨진 검을 들고 레오폴트는 형형한 눈으로 클레멘스를 노려보았다.

“네가… 네가 감히….”

흡, 숨을 들이쉰 레오폴트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클레멘스가 화들짝 뒤로 물러나자,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검 끝이 박혔다. 레오폴트는 손아귀에 힘을 주며 파들파들 검을 끌어 올렸다.

“네 감히 내가 정신 놓은 틈을 타 도둑질을 하려 들어?”

“성하! 오해십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고약한 놈! 발뺌해도 소용없다! 그동안 네가 무슨 짓거리를 벌였는지 다 들었어! 나 없는 틈에 홀랑 교국을 삼키려 들어?! 게다가 페기한테 그런 모욕을…!”

“모욕이라니요! 전 그저 증언과 증거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공정한 것도 죄가 됩니까?”

“공저엉? 네 입으로 방금 공정이라 하였느냐? 세상에 어떤 머저리가 제 손으로 독약을 탄 약을 가져와?! 네 눈엔 페기가 그런 바보 천치로 보이더냐!”

쿵! 아슬아슬하게 클레멘스를 비껴 난 검 끝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클레멘스가 질겁한 얼굴로 고드릭을 돌아보았다.

“고드릭 수도사! 성하를 말리지 않고 뭐 하시오!”

“전 성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고드릭은 벽에 딱 붙어 선 채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검을 지팡이 삼고 선 레오폴트가 거친 숨을 헐떡였다.

“내 지금껏 네가 열 길 물속 같다 여겼는데, 이제야 네 시커먼 속이 제대로 보이는구나. 네가 교국을 홀랑 집어삼키려던 것을 요앙 오귀스트는 알고 있느냐?”

“집어삼키다니요! 전 그저 더 이상 공무를 수행하실 수 없게 된 카타리나 공작 전하를 대행했을 뿐입니다.”

“허! 섭정을 배신한 졸개가 황제마저 배신하려 드는군!”

“성하, 전 누구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순간 레오폴트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는 검을 놓고 맨주먹으로 클레멘스의 얼굴을 갈겼다. 휘청거리는 레오폴트의 모습에 고드릭이 기겁하며 달려왔다.

“배신한 적이 없다….”

고드릭의 부축을 받아 겨우 바로 선 레오폴트가 실소하듯 뇌까렸다.

“클레멘스, 넌 태생부터 배신자다. 감히 서원을 받은 성직자가 사도를 따르지 않고 한낱 세속 군주의 졸개로 전락했으니, 이를 배신이 아니면 무엇이라 칭하겠느냐? 네 설마 30년 전 오스피나 참극을 잊었다고 하진 않겠지.”

가면 속 연옥색 눈동자가 노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얻어맞은 뺨을 감싼 채 몇 발짝 뒤로 물러났던 클레멘스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의 얼굴은 고요했다. 망설이듯 달싹이던 입술이 열리려던 찰나, 누군가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페기였다.

“레오, 아직 무리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녀는 레오폴트를 부축해 다시 침상으로 데려갔다. 고드릭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클레멘스에게 다가왔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십시오. 어찌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으신 분을 괴롭히십니까.”

물끄러미 고드릭을 응시하던 클레멘스의 시선이 화기애애한 레오폴트와 페기에게 닿았다. 생각에 잠기듯 잠시 고개를 숙였던 클레멘스가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왔다. 문밖에서 전전긍긍하던 보좌관이 짙푸른 멍이 올라오는 클레멘스의 얼굴을 보고 기함했다.

“예, 예하! 얼굴이 어찌!”

“음.”

클레멘스는 별말 없이 멍든 광대를 문질렀다. 보좌관이 고개를 숙이며 이를 갈았다.

“성하께서 그러신 것이죠? 정말 교회가 어찌 되려는 건지. 만인의 모범이 되셔야 하는 분이 어찌 이리도 폭력적이시란 말입니까?”

“되었다. 내 자업자득이지.”

“예?”

의아해하는 보좌관을 버려둔 채 클레멘스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왔다. 씁쓸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배신자라.”

페기는 침실을 나가는 클레멘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제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을 느끼곤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왜요?”

“아니, 여기 먼지가 붙어 있어서….”

레오폴트는 수를 놓듯 신중한 손길로 먼지를 떼어 냈다. 흡족한 기색으로 고드릭에게 손을 맡기자, 고드릭이 공손하게 그의 손끝에 매달린 먼지를 가져갔다.

“손목은 괜찮아요?”

“물론이지.”

“그렇게 무거운 검을 휘두르고 멀쩡할 리가 없는데….”

페기가 그의 손목을 콕 찌르자, 레오폴트가 움찔하며 얼른 손목을 이불 아래 숨겼다. 페기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의사 부를 테니 당장 검진부터 받아요.”

“아, 아니다. 그냥 놀란 것뿐이야.”

“깃펜보다 무거운 건 든 적도 없는 손인데 그럼, 놀라지 않고 배겨요?”

페기가 눈을 흘기며 시종에게 의사를 불러오라 명했다. 레오폴트가 시무룩한 기색으로 웅얼거렸다.

“그래도 너무 뭐라 하지 말거라. 내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리했겠어. 네가 내 시해 미수범으로 구금되어 심문받았단 소릴 듣고 정말로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나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을 테니, 레오도 그만 잊어요.”

“아나클레토를 두들겨 팰 때까지만 마음에 담아 두마. 클레멘스와 아나클레토, 고 앙숙 같던 두 놈이 나 없는 틈에 합세할 줄 누가 알았겠어. 내 당장 빌헬미나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도대체 하수인 관리를 어찌하는 게야?”

레오폴트는 고드릭에게 받아 적으라 명한 뒤, 분기를 꾹꾹 눌러 담은 항의를 줄줄 읊기 시작했다. 내용의 수위로 보건대 아나클레토는 탐보프의 황제에게 따끔히 혼이 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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