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328)

“저, 저도 잘…. 전하! 그걸 왜 이제야 말씀하십니까! 절 우롱하려는 생각이시라면 그만두십시오! 어찌 원탁의 권위를 스스로 깎아내리려 하십니까!”

“거짓된 증인을 보호하려는 것에서부터 원탁의 권위는 이미 바닥났습니다. 심문관,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당신의 무얼 믿고 증언을 합니까? 내 말을 들으려고나 했나요?”

페기는 심문관으로부터 냉담하게 시선을 돌렸다.

“아까 증언한 것처럼 나는 알틴이 성하의 약에 말린 풀을 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치듯 본 것이고 알틴이 필사적으로 부정하기에 당시에는 내가 잘못 본 것이라 여겼어요. 하지만 나중에 성하의 약에 가지앵 잎이 소량 들어갔다는 것을 전해 듣고 알틴의 짓이라는 걸 깨달았죠.”

“…….”

“하지만 알틴의 거짓 증언이 먼저 터져 나는 홀로 감금되었고, 유일하게 내가 만날 수 있던 심문관은 이미 날 범인으로 단정 짓고 있더군요. 하여 알틴과의 대면을 청했습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누군가 참관할 테니까요. 덕분에 원탁 추기경들 앞에서 증언을 하게 되었군요.”

페기의 시선이 잔뜩 찌푸리고 있는 클레멘스, 벙찐 아나클레토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추기경들을 훑었다. 글리체리아가 매섭게 물었다.

“심문관, 그게 사실입니까? 범인을 함부로 단정 지었다고요?”

“증거가 있질 않습니까!”

“알틴의 수작이겠죠. 내 잠자리를 살피던 것 역시 알틴의 몫이었으니까.”

“전부 추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능성 높은 추측이죠.”

페기의 반박에 심문관은 주먹만 꽉 쥐었다. 페기는 고요한 눈으로 알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머리가 산발이 되어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길게 자란 앞머리 사이로 지독할 만큼 형형한 안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알틴과 만나면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왜 그런 거짓된 증언을 했는지. 혹 누구에게 협박이라도 당했는지. 행여 고문에 몸이 상해 어쩔 수 없이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닌지.

하지만 정작 마주 앉고 보니 죄다 쓸모없는 짓임을 알겠다. 그녀가 알던 알틴은 여기 없었다. 어쩌면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것 참 일이 어렵게 되었군요. 전하의 증언에는 증거가 없고, 알틴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증거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으니.”

느리게 운을 떼고도 얼마간 고민하던 클레멘스가 재차 입을 열었다.

“차라리 고위 성직자들을 불러 고견을 듣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뭐, 공의회라도 열자는 겁니까?”

“그리 거창할 건 없겠지요. 성 나르세스 광장을 수호하는 여덟 대성당의 주임 신부들만 불러 모아도 충분할 겁니다. 가까이 계시니 지금 당장 불러 모실 수도 있겠군요.”

여덟 천사들의 이름을 내건 여덟 대성당의 주임 신부들은 대대로 신망 높은 성직자들이 맡아 왔다. 개중에는 한때 원탁의 일원이었으나 지금은 추기경 자리에서 은퇴한 이도 있으니, 고견을 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솔란지아가 불안한 얼굴로 머뭇머뭇 말했다.

“그럼 소문이 퍼질 텐데요.”

비밀을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건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된다. 더욱이 레오폴트의 실신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들이 많아, 그간 보안 유지에 배로 신경을 써야 했다.

클레멘스는 짐짓 고민하는 척 눈을 굴렸다.

“그럴 가능성도 충분합니다만… 일단은 여덟 주임 신부님들을 믿어 봅시다. 그리 가벼우신 분들은 아니니까요.”

“…….”

“설사 말이 퍼진대도, 전하께선 그런 경험이 많지 않으십니까?”

페기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클레멘스는 더없이 선량하게 웃었다.

“전하께선 괜찮으실 겁니다. 암요, 강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클레멘스!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무책임이고 뭐고, 클레멘스 추기경의 말이 옳아요. 지금 어디 이 문제에만 원탁이 매달려 있어야 하는 줄 압니까? 저 바깥에 마귀가 돌아다니고 있어요, 마귀가! 더 이상 밖에서 이상한 말이 나돌지 않게끔 빨리 매듭짓는 것이 상책이에요!”

아나클레토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던졌다. 솔란지아는 아연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지금 전하를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하자는 거예요?!”

“참,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나도 어쩔 수 없단 것이죠. 어차피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클레멘스!”

솔란지아가 비명처럼 내질렀다. 페기는 옷자락 사이로 숨긴 손을 남몰래 꽉 쥐었다.

“하세요. 사람들 입놀림이 무서워 내 결백을 입증할 기회를 날리겠습니까?”

“오….”

클레멘스가 의외라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솔란지아가 책상을 쾅 내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안 됩니다, 전하! 클레멘스 추기경의 도발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이 일은 어디까지나 전하와 알틴의 대치일 뿐, 클레멘스 추기경과는 관계없습니다! 전하의 결백을 입증할 방법은 그 외에도 많아요!”

“고작 주임 신부님 여덟 분께만 고견을 청하는 건데, 그리 바락바락 반대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

“그야 소문이 나돌면 가장 피해를 보는 분이 전하시니까 그렇죠!”

무릇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잃을 것도 많은 법이다. 소문의 시작은 카니나의 페기와 그 하녀 알틴이겠으나, 두어 사람의 입만 지나면 카니나의 페기와 어떤 하녀로 압축될 것이었다.

“괜한 걱정입니다, 솔란지아. 사도시잖습니까. 저기 계시는 누구처럼 숨만 쉬어도 떠받드는 사람이 한가득 널렸는데 무얼 그리 걱정해요?”

아나클레토가 저 멀찍이 앉은 보나벤투라를 눈짓하며 힐난했다. 보나벤투라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옆으로 틀어 앉았다. 솔란지아는 붉어진 눈으로 아나클레토를 노려봤다.

“예, 순박한 백성들은 그러겠죠. 몇몇 성직자들도 그럴 테고요. 하지만 대다수의 성직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특히 이 성궁의 성직자들은요!”

교국이 온 대륙을 망라하는 교회의 중심지라면, 성궁은 그 교국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인물만 모인 곳이었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원탁의 추기경들이 정치인과 한 점 다를 바 없는 것처럼, 그들을 따르는 성직자들 역시 제 잇속에 아주 밝았다. 사도가 그저 사도이기에 따르는 신실한 신도들은 정작 성궁 밖에 있었다.

“흩어져 모일 줄 모르는 저 무지렁이 백성들의 의견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하지만 성궁의 여론은 다릅니다. 그걸 누구보다 뼈저리게 겪으신 분이 바로 전하신데, 어찌 그리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십니까?”

“음… 하지만 전하께서도 수긍하셨잖아요?”

클레멘스의 가벼운 반박에 솔란지아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아나클레토가 빈정거리듯 콧방귀를 뀌었다.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글리체리아가 한숨처럼 말했다.

“전하의 의사와는 별개로, 저는 원탁의 일은 원탁에서만 돌아야 한다고 봅니다. 여덟 대성당의 주임 신부님들께서 명망 높으신 분들임은 분명하나, 이런 상황에서 뾰족한 대안을 내주실 것 같진 않군요.”

“…….”

“보나벤투라 추기경.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말을 쏘는 활이 이제는 보나벤투라에게 쥐어졌다. 그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리 복잡할 것도 없지요. 순리를 따르면 될 일입니다.”

“순리라면….”

“죄인을 참하는 불길 위를 걷도록 합시다.”

좌중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클레멘스가 드물게 당혹한 기색을 내비쳤다.

“보나벤투라…. 그건 너무 비인도적인 방안이 아닌지….”

“옛 성인들도 행하신 바 있는 일을 어찌 비인도적이라 논하십니까?”

“아니, 그분들이야 성인이니까 가능하셨던 거지요. 지금 내가 ‘페아노라의 대주교는 나다!’ 외치고 불길에 손을 들이민다 한들, 과연 내 손이 멀쩡하겠습니까?”

“하하! 말 한번 재미있군.”

아나클레토가 폭소했다. 모욕당한 보나벤투라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글리체리아가 넌더리 내듯 끼어들었다.

“됐습니다. 그대들에게 진지한 반응을 기대한 내가 바보였지요.”

“오, 글리체리아. 그러면 우리가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말씀드렸지요. 원탁의 일은 원탁에서만 돌아야 한다고. 아무리 마귀 사태가 급하다곤 하나, 이렇게 막다른 길에 다다른 사안을 제대로 된 논의도 없이 마무리 지을 수는 없습니다. 시간을 더 들여서 조사를 계속해야지요.”

“조사요? 도대체 조사를 어디까지 더 해야 하나요?”

“…….”

“전하의 침실, 집무실, 알틴의 독방, 심지어는 하녀들이 사용하는 모든 공간을 이 잡듯이 뒤졌습니다. 아무것도 나온 것이 없어요. 약과 관련된 다른 이들도 모두 조사를 마쳤는데 어찌해야 합니까. 재조사라도 할까요?”

글리체리아는 말없이 클레멘스를 노려봤다. 그는 빙글 돌아 페기를 마주 보았다.

“가지앵 잎은 오직 전하의 침실에서만 발견되었고, 전하의 말씀대로 이는 알틴의 수작일 수도 있습니다. 전하의 말씀이 옳다면 알틴이 범인인 것이고, 아니라면 전하께서 범인이시겠지요. 지금으로선 가부를 논할 수 없는 일입니다.”

“…….”

“하지만 두 사람 중 하나가 범인이 확실한 이상,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도 없지요. 정황이 확실해질 때까지 하녀 알틴은 독방에 구금, 카타리나 공작 전하 역시 원탁 추기경의 직위를 일시적으로 반납하고 내전에 은거하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솔란지아는 아연해졌다. 카타리나 공작이 이대로 물러나게 되면, 교국은 완전히 클레멘스의 세상이 된다.

“말도 안 됩니다! 결백하실 수도 있는 분을 어찌!”

“그래서 일시적이란 조건을 붙이지 않았습니까? 후일 결백하다는 증거가 발견되면 그때 다시 돌아오시면 될 일이지요. 모두를 만족시킬 판결을 내려 주실 분은 교황 성하께서 유일하신데, 그분은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셨으니까요.”

“클레멘스! 도대체 그대가 무엇이라고 감히 사도께 은거를 명합니까!”

“오, 보나벤투라. 사도 아닌 자가 사도를 벌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이미 원탁에서 논의가 끝난 문제로 압니다.”

클레멘스가 양손을 들어 올리며 연설하듯 말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황 성하께서 시해당하실 뻔한 일입니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선 누구보다 고귀한 사도시지만, 교황 성하께선 사도 중에서도 가장 높은 사도십니다. 사도가 시해당할 뻔했다는 점에서 이미 전하의 특별함은 빛을 잃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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