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328)

“일단 돌아가셔서 의사 진찰부터 받아 보세요! 세상에, 피가 안 멈춰요.”

시종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연신 코피를 닦았다. 차라는 어버버하는 사이, 기사에게 업혀 회의장을 떠났다. 벼락같은 노성에 기함한 추기경들은 죄다 바보처럼 얼빠진 얼굴이었다.

“…어려도 사도는 사도란 건가.”

멀찍이 벽에 기대어 서 있던 클레멘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곤 손뼉을 쳐 추기경들의 시선을 불러 모았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합시다. 오늘 두 분이 보인 추태는 여기 묻도록 하지요. 부디 다음번엔 이런 일이 없길 바랍니다.”

진흙탕 싸움이 무색하게끔, 아나클레토와 보나벤투라는 싱겁게 자리를 떴다. 복도 양옆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솔란지아가 조용히 보좌관에게 속삭였다.

“만달 추기경은?”

“죄송합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솔란지아는 심란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위스누아의 대주교이자 원탁의 일원인 만달이 모습을 감춘 지 벌써 며칠째였다. 원래도 훌쩍 나타나 훌쩍 사라지는 위인인지라 모두들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솔란지아는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만달이 꼭 필요했다.

“아나클레토는 클레멘스를 막을 생각이 없어. 훗날 성하께서 깨어나시면 이 사단을 보고 탐보프를 어떻게 여기실지…. 믿었던 글리체리아 추기경마저 클레멘스의 편이니, 만달 추기경의 한 표가 반드시 필요해.”

원탁의 기본적인 원칙은 다수결. 클레멘스와 아나클레토, 글리체리아가 같은 편이라면 적어도 세 표의 반대가 있어야 그들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은 그녀와 보나벤투라뿐이었다.

“만달 추기경이 순순히 우리의 뜻을 따라 줄까요?”

“어떻게든 내 말을 듣게 해야지. 보석은 준비했지?”

“네.”

만달은 재물을 좋아한다. 값비싼 보석을 들이밀면 적어도 문 앞에서 내쳐질 일은 없을 터.

솔란지아는 계속 만달을 찾아보라 명한 뒤 쓰러질 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나클레토는 자꾸만 자신을 거스르는 엘피도 공작에게 본때를 보이려는 심산인 것 같지만, 그게 어디 쉬울까. 하려거든 보나벤투라뿐만 아니라 저까지 이겨 넘어야 한다.

“…괜찮아. 내가 맞아. 내가 옳아.”

확실히 교황 레오폴트는 지는 해다. 그에게 이 이상 의지해 봤자 돌아오는 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떠오르는 태양에게 합세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엘피도 공작은 라발이 예뻐서 끌어들이려는 게 아니었다. 탐보프를, 정확히는 아나클레토 추기경을 위시한 썩어 빠진 세력을 도려내고픈 것이었다.

솔란지아는 아나클레토에 묻어 함께 제거되고 싶진 않았다. 그녀에겐 원대한 꿈이 있었다. 자랑스러운 조국과 황제 폐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아나클레토처럼 썩은 팔다리는 스스로 잘라 낼 용의가 있었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황제 폐하께서도 아나클레토가 저지른 죄악을 모르지 않으시니, 종국엔 제 손을 들어 주시리라.

***

페기는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였다. 얼음처럼 식은 양손을 꼭 붙잡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심문관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흘끗 그녀를 바라보는 심문관의 눈빛이 묘하게 싸늘했다.

그는 말없이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작은 천 주머니를 탁상에 올려놓았다.

“알아보시겠습니까?”

페기가 머뭇거리며 맞은편에 앉았다.

“…내 주머니네요.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어디서 찾았나요?”

“전하의 침실, 베개 밑에 있었습니다.”

“이게 왜 베개 밑에….”

심문관은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탁상에 쏟아 냈다. 말라붙은 이파리였다.

“가지앵 잎입니다.”

멀뚱히 그의 손길을 지켜보던 페기가 멈칫 굳었다. 심문관의 싸늘한 눈이 그녀를 낱낱이 훑었다.

“하녀 알틴은 전하의 명으로 비밀리에 가지앵 풀을 구해 왔다고 진술했습니다. 성하의 약과 관련된 인물들 중 가지앵 풀을 지니고 있던 사람은 오직 전하뿐이십니다.”

“…….”

“달리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페기는 혼란 가득한 눈을 살며시 내리떴다. 이곳으로 연행되어 온 새벽부터 치열하게 고민해 봤지만, 알틴이 그런 진술을 한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알틴과 만나고 싶어요.”

“불가합니다.”

“왜죠?”

“증인을 보호하는 것은 심문관인 제 의무이기도 합니다.”

“…내가 알틴을 해치기라도 할 것 같아요?”

페기가 힘없이 미소 지었다. 심문관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침묵이 그의 대답이었다.

“원한다면 내 사지를 구속해도 좋아요. 난 그저 알틴이 왜 그런 거짓 진술을 했는지 물어보고 싶을 뿐이에요.”

“알틴은 이미 제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전하를 모신 지 5년이 되어 간다는 것도, 그동안 전하께서 아주 잘해 주셨다는 것도, 그럼에도 자신을 이용해 교황 성하를 시해하려 한 것은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다는 것도.”

심문관의 찡그린 얼굴에 혐오의 기색이 떠올랐다.

“전하께선 5년간 쌓아 온 신뢰를 한순간에 무너트리신 겁니다. 이에 아무런 죄책감도 없으십니까?”

페기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대꾸할 새도 없이 심문관의 말이 화살처럼 내리꽂혔다.

“고작해야 천한 하녀와의 천한 신뢰라 여기셨다면, 교황 성하와의 신뢰는 어떠십니까. 성하께서 오랫동안 전하를 아껴 오셨음은 성궁의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그 신뢰를 박살 내셨지요. 성하께서 얼마나 가슴 아프실지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

“전하께선 성스러운 불의 가호를 받은 사도십니다. 만백성이 우러러 따르는 분이세요. 그런 분께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계속해 발뺌하신다면, 저 무지렁이 백성들이 교회의 무얼 보고 따르겠습니까? 어찌 사도께서 거짓을 멀리하란 천계율의 가르침을 몸소 거스르려 하십니까?”

심문관의 말은 거침없었다. 페기는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그의 말을 들었다. 슬며시 가늘어지던 보랏빛 눈이 곧 해답을 찾은 것처럼 명료하게 뜨였다.

“그러니까 심문관은… 내 자백이 필요한 거군요.”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심문관의 말이 뚝 끊겼다. 마치 대단한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방금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자백이요?”

“지금까지 나온 증거와 증인만으론 날 벌할 수 없으니, 날 겁줘서 자백을 받아 내려는 거잖아요.”

만약 현재의 증거만으로 벌할 수 있다면 심문관은 여기서 이럴 필요가 없었다. 구태여 그녀와 얼굴을 맞대고, 순진한 소녀나 겁먹을 소릴 줄기차게 늘어놓는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왜?

심문관은 왜 이토록 그녀를 범인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났을까?

입신양명을 위한 행동이라기엔 미묘했다. 레오폴트는 죽지 않았고, 예후르 역시 언젠가 돌아올 것이었다. 그들이 그녀를 겁박한 이들을 가만둘 리 없으므로, 멀리 내다본다면 도리어 위험한 짓이었다.

따라서 심문관에겐 그녀가 범인이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를테면 반드시 그녀를 범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

레오폴트를 독살하려 했던 진짜 범인.

“누구예요, 당신 주인이?”

“…….”

“누가 감히 성하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어요?”

심문관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파르르 떨리는 주먹으로 제 허벅지를 내리친 그가 노성을 터트렸다.

“저는 제 본분을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사도시라 하나, 제게 이런 모욕을 주실 순 없습니다!”

“왜 당신이 화를 내요. 진짜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난데.”

페기는 가느다란 미소를 내걸었다.

“짐작 가는 사람이 몇 있어요. 하지만 당신처럼 무고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기 위해선 보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겠죠. 그러니 가서 당신 주인에게 전해요.”

“…….”

“나는 절대 당신들을 용서치 않으리라고.”

아직도 눈을 감으면 피를 토하던 레오폴트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거든 여기서 싹을 잘라 내야 했다.

페기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반박하려는 심문관의 말을 잘라 들어갔다.

또한.

“나를 비롯한 모든 사도들이 당신들을 용서치 않으리라고.”

“…….”

“가서 전하세요. 가는 김에 원탁에도 내가 알틴과 대면하고 싶다 전하시고.”

살기등등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던 심문관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거세게 닫히는 문소리와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페기는 속에 뭉쳐 놓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긴장으로 메마른 입 속에서 쓴맛이 돌았다.

페기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지런히 늘어진 손끝에서 아무도 모르게 불티가 튀었다.

원탁은 페기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단, 원탁이 참관한다는 조건하에서였다. 페기는 그 조건에 응했고, 자리는 곧 마련되었다.

“잘 아시겠지만 알틴 양은 이제 전하의 하녀가 아니라 원탁이 보증하는 증인입니다. 전하께서도 부디 이 점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심문관이 딱딱하게 말했다. 페기는 그저 말없이 알틴을 쳐다보았다. 알틴은 마치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판관 앞에 선 것처럼 잔뜩 옹송그리고 있었다.

“알틴, 무어라 증언했니?”

“그건 지난번에 제가 다 말씀드렸….”

“심문관에게 물은 것이 아닙니다.”

심문관은 이를 갈며 뒤로 물러났다. 대답을 종용하듯 고요한 페기의 시선에 알틴이 잘근잘근 물고 있던 입술을 슬며시 놓았다.

“…전부 사실대로 말씀드렸어요. 전하께서 저를 통해 비밀리에 가지앵 풀을 구하셨고, 그걸 성하의 약에 몰래 넣으셨다고.”

“누구의 사주인진 몰라도 꽤 많이 받은 모양이구나. 거짓을 그리 술술 말하는 걸 보니.”

“전하! 증언을 함부로 매도하지 마십시오!”

심문관이 노여움에 찬 소리를 질렀다. 살짝 미간을 찡그리고 그를 응시하던 페기가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저런 것’도 증언이다. 증언이란 이름표를 달면 새빨간 거짓말도 증언으로 둔갑하는 게 이 바닥 이치라면, 저 역시 그 이치에 따라야 하지 않겠나.

“좋아요. 그럼 나도 증언할게요.”

페기는 똑바로 알틴을 쳐다보았다.

“알틴이 성하의 약에 가지앵 잎을 넣는 것을 보았어요.”

누군가 급히 숨을 들이켰다. 알틴은 경련하듯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뻔히 보이는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 턱을 쓰다듬던 클레멘스가 느리게 말문을 열었다.

“심문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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