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이 아프게 묶이는 와중에 페기가 황망히 물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누구일까. 내가 누군가의 원한을 산 적이 있던가.
“알틴입니다.”
하지만 너는 아니다.
페기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말이 목에 걸린 듯 나오지 않았다.
“전하께서 명하셨습니다.”
원탁 아래 조아린 알틴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전 은밀히 가지앵 잎을 구해 오라 하셨습니다. 차를 마시고 싶으시다며…. 가난한 하층민들이나 마시는 차를 어찌 아셨나 싶었지만, 전하께서도 한때… 그러셨으니 별다른 의심을 갖진 않았고요. 다만 명 받은 바가 있어 뒷골목 상인을 통해 비밀스럽게 구해다 드렸습니다.”
“허어….”
원탁 여기저기서 한탄하는 소리가 터졌다. 클레멘스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너 말고 전하의 말씀을 들은 자가 또 있느냐.”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본디 측근의 하녀나 호위 기사를 가까이하지 않으셨습니다. 감사하게도 저만은 아껴 주시어 가까이서 그분의 수발을 드는 명예를 누렸으나… 설마 저를 통해 이런 짓을 저지르시리라곤 조금도….”
알틴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클레멘스가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알틴을 데려온 심문관이 마른 잎을 보였다.
“이것이 가지앵 잎입니다. 아마 탐보프에서 자라신 분들은 눈에 익을 겁니다. 북방에선 화로를 지필 때 같이 넣는다고 하더군요.”
“하녀들이 넣는 걸 봤습니다. 듣기론 타는 냄새를 가라앉혀 준다던데….”
솔란지아는 말끝을 흐렸다. 저 잎을 본 적이 있는 그녀도 저걸로 차를 끓여 마신다는 건 생각도 못 했다.
클레멘스가 침통한 표정으로 알틴을 내려다보았다.
“전하께서 널 아끼셨음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네 증언만으로 감히 전하를 의심할 수야 있겠느냐. 하물며 네 말을 뒷받침해 줄 증인이나 증거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전하의 침실에서 이것을 발견했습니다.”
심문관이 기다렸다는 듯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주머니를 열어 확인한 클레멘스의 표정이 싹 굳었다. 안에 말린 가지앵 잎이 들어 있었다.
“정녕 전하의 침실에서 나온 것이라고?”
“네, 베개 밑에서 발견했습니다.”
아나클레토가 주먹을 쾅 내리찧으며 외쳤다.
“여인네들이 툭하면 비밀을 숨기는 곳이군. 됐습니다. 증인이 있고 증거가 있는데 무얼 망설인단 말입니까? 당장 카타리나 공작을 교황 성하의 시해 미수범으로 체포합시다!”
보나벤투라가 눈을 살벌하게 떴다.
“저 하녀가 누구의 사주를 받은 줄 알고요! 고작 저런 천한 하녀의 말로 사도를 의심하는 겁니까?!”
“천한 하녀라 하지 마십시오. 그럼 저딴 천한 계집을 곁에 둔 카타리나 공작은 뭐가 됩니까?”
“이보시오, 아나클레토!”
노여움에 북받친 보나벤투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글리체리아가 황급히 그의 옷소매를 잡고 말렸다.
“진정하세요, 보나벤투라! 그대까지 이러면 어쩌자는 겁니까!”
“하지만 지금 저자가 감히…!”
“아나클레토, 그대도 자중하세요. 아직 전하의 죄라 확정된 것도 아니잖습니까? 도대체 전하를 향한 존칭은 어디 갔습니까?”
“아, 예. 아직은 전하시죠, 저언하.”
아나클레토가 밉살맞게 웃었다. 눈을 부라리며 그에게 달려들려는 보나벤투라를 가까스로 말리며 글리체리아가 날카롭게 클레멘스를 보았다.
“클레멘스! 원탁의 책임자면 좀 말려 보세요!”
“오, 저는 보기 좋은 것을요. 한 분은 신성 모독죄로, 한 분은 소란죄로 잡혀가시면 더욱 즐거울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이쯤에서 근위대를 불러오는 것은?”
어중간하게 내리깔린 침묵 위에서 클레멘스는 빙긋 웃었다. 아나클레토가 탐보프 방언으로 욕설을 뇌까리며 방만하게 앉았다. 보나벤투라 역시 살벌하게 아나클레토를 노려보면서도 꼿꼿하게 착석했다.
눈썹을 한 번 까딱인 클레멘스가 깍지 낀 양손을 원탁에 올려놓았다.
“뭐, 좋습니다. 아나클레토 추기경의 말씀대로 증인이 있고 증거가 있지만, 보나벤투라 추기경의 말씀처럼 선뜻 믿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요. 일단은 카타리나 공작 전하를 심문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으로선 그 방법뿐이겠군요.”
글리체리아가 고단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나클레토와 보나벤투라도 심기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에 조심스레 나서려던 솔란지아마저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갑자기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 근위대와 대거리라도 펼치는지, 웅웅거리는 고함이 무디게 전해졌다. 원탁 위로 의아한 눈빛이 오가는 가운데, 예고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도련님!”
근위대와 시종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난입한 사람은 다름 아닌 차라였다. 난데없는 인기척에 깜짝 놀랐던 추기경들이 차라의 어린 티 나는 얼굴을 확인하고 조금 식었다.
“이게 누구십니까. 차라 도련님 아닙니까? 길이라도 잘못 드셨는지요?”
클레멘스가 상냥하게 웃으며 다가가자, 차라가 도끼눈을 뜨고 회의실을 휙휙 둘러보았다.
“걔 여기 있다면서…. 아이씨, 야! 이거 놓으라고!”
“아, 안 됩니다, 도련님! 이렇게 회의장에 맘대로 난입하시면 큰일 나요!”
“큰일은 이미 났잖아, 이 멍청이들아! 어, 야! 알틴!”
차라는 급기야 시종들의 손을 뿌리치고 껑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곤 처량하게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알틴의 어깨를 쥐고 다그쳤다.
“야! 네가 그랬다며! 페기가 한 짓이라고! 너 미쳤어? 어?!”
“이, 이러지 마세요, 도련님….”
고개를 푹 수그린 알틴이 파들파들 떨며 차라를 밀어냈다. 차라는 아연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예의상 존칭만 붙였을 뿐이지, 늘 저를 동네 꼬마 대하듯 했던 사람이 뭐? 파들파들 떨어?
뒷짐 지고 지켜보고 있던 클레멘스가 달래듯 나섰다.
“도련님, 가여운 하녀에게 어찌 그리도 모질게 말씀하십니까? 도련님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러신다고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 득이 되진 않아요.”
“하지만 말도 안 되잖아요! 가족밖에 모르는 애가 레오한테 왜 그런 짓을 해! 분명 쟤가 거짓말하는 거예요! 다들 알잖아요!”
차라가 좌중을 돌아보며 외쳤지만, 다들 그의 시선을 피하며 모르는 척만 했다. 갑갑해진 차라가 입술만 크게 벙긋거렸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목덜미가 다 빳빳해질 지경이었다.
“진심이에요? 걔가, 그 순한 애가 레오의 약에 그런 짓을 했다고, 다들 그렇게 믿는다고요?”
“뭐어… 사람 속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밉살맞게 대꾸하던 아나클레토가 차라의 찌를 듯한 시선을 느끼곤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보다 못한 글리체리아가 엄한 목소리로 일렀다.
“도련님, 저희도 카타리나 공작 전하를 오래 지켜봐 왔습니다. 저희라고 전하를 의심하고 싶겠습니까? 그분을 의심해야 하는 저희들 마음 역시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집니다.”
“글리체리아 추기경이 말씀 한번 잘하셨습니다. 기실 고작 반년 전하를 보신 도련님보다야 저희가 전하를 더 잘 알고 있겠지요.”
아나클레토가 이죽거렸다. 차라는 실소하며 그를 보았다.
“그러니까 고작 반년 본 나보다 걔를 모른다는 거잖아요.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모르는 척하고 싶은 거예요?”
아나클레토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싸한 분위기를 감지한 보나벤투라가 기민하게 차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도련님, 일단 나가시지요. 아직 원탁회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들어오시면 곤란합니다.”
“알틴만 데리고 나갈게요.”
“곤란합니다. 그래도 증인인데….”
“말 똑바로 하세요, 보나벤투라. ‘그래도 증인’이 아니라 그냥 증인입니다. 사도만 보면 물불 안 가리고 꼬리부터 흔드는 게 지겹지도 않아요? 어디 시골 개새끼도 아니고.”
보나벤투라가 멈칫 아나클레토를 돌아보았다.
“방금 무어라 했습니까?”
“아, 하나 추가할까요? 족보도 없는 시골 개새끼, 근본 없는 그대와 딱 맞는 별명이 아닙니까!”
“아나클레토!”
보나벤투라가 들소처럼 달려들었다. 근위대와 다른 추기경들이 혼비백산하여 그를 막아 세웠다.
“그만하세요! 원탁에서 이 무슨 추탭니까!”
“글리체리아 추기경의 말씀 들으셨지요? 추태랍니다, 추태.”
“당신도 그만해요, 아나클레토!”
“저기….”
조심스레 다가가던 차라의 손이 보나벤투라의 몸부림에 내쳐지고 말았다.
“아나클레토, 당신은 그럼 제대로 된 근본이 있어서 고작 그 꼴이오? 허! 그따위 근본, 나는 줘도 안 갖겠소!”
“어디 준다는 사람이나 있습니까?”
“당신이 그 더러운 뒷구멍으로 저지르는 일, 내가 모를 줄 알아?! 이 교국에 당신을 벼르고 있는 사람이 나뿐인 줄만 아냐고!”
“저기, 잠깐만요. 내 얘기 좀….”
“누가 들으면 나 혼자만 더러운 줄 알겠군! 다들 똑같은 처지 아니오?! 그리 잘난 척하는 당신도 뭐 그렇게 깨끗하다고! 고아인 척 돌보는 애가 당신이 싸지른 애새낀 거 모르는 사람 있나?!”
“뭐야?!”
“저….”
보다 못해 그 사이로 끼어들려던 차라가 누군가의 팔꿈치에 얻어맞고 나동그라졌다. 멀찍이서 관망하던 클레멘스만이 눈을 동그랗게 뜰 뿐, 누구 하나 차라를 신경 쓰지 않았다.
차라가 씨근덕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만 좀 해요….”
“저, 저 뚫린 게 입이라고!”
“그러는 당신은!”
“지금 감히 누구 앞이라고….”
“내가 ‘말하잖아’!”
벼락같은 소리였다. 아니, 벼락이었다. 한순간 벼락이 꽂힌 줄 알았던 사람들은 벼락을 ‘알아들었단’ 사실에 아연해졌다. 벼락에도 말이 있는가. 그렇다면 벼락은 누구의 말인가.
모두의 시선이 바닥에 주저앉은 차라를 향했다. 차라는 숨을 얕게 헐떡이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망연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후드득 코피가 쏟아졌다.
“도, 도련님!”
경악한 시종들이 차라에게 달려왔다. 그들은 피가 쏟아지는 차라의 코 밑에 손수건을 대 주고, 기사에게 그를 업게 했다. 얼떨결에 시키는 대로 움직이던 차라가 퍼뜩 알틴을 돌아보았다.
“아, 아냐! 아직 얘기 다 못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