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328)

“젊어서 기운 좋은 솔란지아 추기경과 달리 나는 피곤해 죽겠으니, 이왕이면 빨리 끝냅시다.”

아나클레토가 흉하게 입을 벌리며 하품했다. 윗입술을 씰룩거리며 그를 쏘아본 솔란지아가 가까스로 눈빛을 가다듬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동의하신 겁니까? 훗날 교황 성하께서 아시면 얼마나 진노하실지 고려는 해 보셨습니까?”

“대단히 진노하시겠지요.”

“그걸 아시면서…!”

“그래 봤자 종이 호랑입니다. 이미 권력의 추는 엘피도 공작에게로 넘어갔어요.”

솔란지아가 아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숨을 푹 내쉰 아나클레토가 은근슬쩍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같은 동향 사람이고, 같은 황제 폐하를 모시는 사람으로서 한 가지 충고하겠습니다. 성하를 믿지 마세요. 성하께서 건재하셨다면 라발의 황태자가 감히 성궁을 활보하고 다닐 수나 있었겠습니까? 나이가 들면 약해지기 마련이에요. 성하도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솔란지아는 혼란 가득한 눈을 떨구었다. 탐보프가 교국에서 큰 발언권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교황인 레오폴트의 덕이었다. 만일 그가 이대로 물러난다면 탐보프는 때를 기다리며 발톱을 감추어야 하리라.

“문제는 엘피도 공작입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아주 제멋대로예요. 성하께서 쓰러지신 틈을 타 라발과 밀실 협상을 벌이질 않나…. 가만히 있으면 우리가 알아서 성좌로 모실 텐데, 왜 그리 탐보프를 적대하려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건.”

“솔직히 말하자면 공작한테 뒤통수를 맞은 느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 조카가 공작의 약혼녀예요. 공작이 갑자기 이딴 식으로 나오니 도대체가 나와 우리 가문의 면이 안 서요! 세도파도 불안한지 자꾸 우는소리만 해 대고.”

솔란지아가 까득 이를 갈았다.

“…때문이잖습니까.”

“뭐라고요?”

“그건 당신 때문이라고요!”

솔란지아는 진득하게 제 어깨를 만지작거리는 아나클레토의 손을 잡아 콱 비틀었다. 아나클레토가 악 소리를 내며 펄쩍 뛰었다.

“뭐, 뭐 하는 짓입니까! 놔요, 놔!”

“당신 때문이라고! 당신이 제대로만 살았으면 일이 이 모양 이 꼴이 됐겠어요?!”

“이, 이, 뭐 이런 미친년이 다 있나!”

“그래, 나 미쳤다, 이 미친놈아!”

솔란지아가 그의 멱살을 쥐었다.

“아나클레토, 당신이 하도 방만하게 구니 엘피도 공작이 탐보프를 아예 잘라 내겠다 맘먹은 거 아닙니까! 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당신은 염치란 것도 없습니까? 네?!”

“내, 내가 뭘 했다고! 폐하께 여쭤보십시오! 나는 폐하의 충직한 하인이요, 그분의 종이니!”

“당신 조카가 아직은 공작의 약혼녀니 눈감아 주고 계신 거겠죠!”

솔란지아가 홱 그의 멱살을 놓았다.

“제발 부탁이니 자중 좀 하세요! 당신이 저지르는 그 추잡한 짓거리들, 정녕 폐하께서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전에 원탁에서 카타리나 공작에게 그 창피를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어요?!”

아나클레토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씩씩거렸다. 솔란지아는 쐐기를 박았다.

“앞으로 지켜볼 겁니다. 애꿎은 조카 파혼시키고 싶지 않거든, 엘피도 공작 앞에선 제발 그 빳빳한 고개 좀 숙이고요!”

앙칼지게 외친 솔란지아가 쿵쿵거리며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핏발 선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아나클레토가 구겨진 옷자락을 펴며 허리를 세웠다. 차가운 얼굴에 조소가 올랐다.

“딱딱거리는 것밖에 못 하는 계집이 무슨….”

아나클레토는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다란 가운이 음침하게 휘날렸다.

***

아침 해가 떠올랐다.

밤새 혼돈에 사로잡혔던 성궁은 새벽 기도와 함께 겨우 질서를 되찾고 있었다. 원탁회의는 진작 막을 내렸고,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와 근위대를 이끌던 미란테도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레오폴트가 몸소 기적을 선보이고 있는 덕분이었다.

그러나 페기의 침실만은 여전히 극심한 혼란에 사로잡혀 있었다. 레오폴트의 침실에서 끌려 나와 제 방에 갇힌 뒤로 수 시간이 흘렀지만, 누구도 그녀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해 주지 않았다.

페기는 밤새 엉엉 울며 문을 두드렸다. 레오폴트가 어찌 되었는지만 알려 달라 애걸복걸했지만, 문밖은 묵묵부답이었다.

문이 열린 것은 시퍼런 새벽이 밝아 올 즈음이었다.

“…전하?”

구석에 쪼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페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모드벤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모, 모드벤나.”

퉁퉁 부은 눈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성하는, 성하는 어찌 되셨나요? 괜찮으신 거죠? 네?”

목멘 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정처 없이 떨렸다. 제발 알려 달라는 듯 페기가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모드벤나가 황급히 무릎을 마주 꿇었다.

“전하, 어찌 제게 이러십니까. 고정하세요.”

“제발 알려 줘요. 성하께서 무사하신지만, 그것만….”

“염려 놓으세요. 무사하십니다.”

그 말에 겨우겨우 눌러놓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페기는 몸을 둥글게 말며 소리 없이 통곡했다.

“전하, 아직 안심하실 때는 아니에요. 오히려 정신 바짝 차리셔야 합니다.”

모드벤나가 억지로 페기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팔에 매달려 페기가 헐떡였다.

“나, 난 성하께서 정말 돌아가시는 줄만 알고…. 레오가 막 피를 토하는데, 정말 죽을 것처럼….”

그러고 보니 페기의 옷이며 손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모드벤나는 이를 깨물며 양손으로 페기의 뺨을 감쌌다.

“전하, 제 말 똑똑히 들으세요. 지금 교국을 장악한 건 클레멘스 추기경입니다. 전하께서 원탁에서 빠지시자 자연스레 그가 주도권을 쥐었어요. 성하께서 언제 깨어나실지 모르는 이상 하루빨리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한없이 흐려졌던 보랏빛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모드벤나가 재차 강하게 일렀다.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해요. 지금 성하의 약과 관련된 사람들은 모조리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주치의, 약사, 주방장, 하녀들까지 전부요. 전하를 오래 모셨던 알틴도 엄중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약…. 약에 독이라도 들어 있었던 건가요? 하지만 잔은 멀쩡했는데….”

“아뇨, 독은 없었습니다. 대신 가지앵 잎이 소량 들어 있었어요.”

“가지앵… 그건 찻잎이잖아요.”

페기는 아연해졌다. 모드벤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찻잎으로도 쓰이죠. 하지만 성하처럼 폐결핵을 앓았던 분께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성하께선 거듭된 졸도와 지병으로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지신 터라 그 효과가 더 컸을 테고요.”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의사는 모를 수가 없다. 즉, 누구나 알고자 한다면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이었다.

“내전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분명 가까운 자의 소행이에요. 개인적인 복수심이든,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든 내막은 곧 밝혀질 겁니다. 많이 힘드시겠지만 그때까지 버티셔야 해요.”

다른 일도 아니고 교황의 살해 미수였다. 이런 일에 연루된 이상, 결백함이 드러날 때까진 가만히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클레멘스가 활개를 칠 것이다.

“일단은 병사들을 풀어 마가 공작 전하를 찾고 있습니다. 소식을 기다려 봐야지요.”

페기는 바위를 얹은 듯 무거운 고개를 떨구었다. 안드레아는 쉽게 찾지 못할 것이다. 행방을 감추는 덴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예후르는요…?”

가느다란 목소리에 모드벤나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페기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완전히 탈진한 듯 이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따뜻한 물을 넣어 달라 청하겠습니다. 일단은 몸부터 씻으세요. 성하께선 정말로 무사하시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모드벤나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따뜻하게 일렀다.

“곧 심문관들이 전하를 찾아뵐 겁니다. 당당하세요. 전하께선 아무런 죄도 없으시니 그들 앞에서 작아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부디 그들의 무례함을 용납하지 마세요.”

페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드벤나는 여전히 근심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자 페기가 깜짝 놀라 그녀의 옷자락을 쥐었다.

“벌써 가는 거예요?”

“보초에게 사정해서 몰래 들어온 겁니다. 제가 여기 있는 걸 들켰다간 상황이 난처해질 수 있….”

쿵쿵! 멀리서 군홧발 소리가 들려왔다. 모드벤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페기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모드벤나의 옷자락을 쥔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문이 활짝 열렸다.

쏟아져 들어온 근위대가 차례로 벽에 붙어 섰다. 철커덩, 갑옷끼리 부딪치는 쇳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수십 명의 근위대가 방을 둥글게 에워싸자, 마지막으로 경갑을 입은 본시오가 느릿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불청객이 계셨군요.”

나른하게 내리깔린 그의 눈빛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묘한 서늘함을 느끼며 모드벤나는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경이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심문관이 벌써 올라오나요?”

“수도사에겐 그런 걸 물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럼 내가 묻죠.”

페기가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내게도 자격이 없나요?”

보랏빛 눈이 올곧게 그를 향했다. 본시오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야 자격이 충분하시죠.”

그의 시선이 페기의 뒤로 미끄러졌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던 근위대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양손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모드벤나가 경악하여 외쳤다.

“이게 감히 무슨 짓입니까!”

“죄인을 포박하고 있습니다.”

“죄인…?”

모드벤나가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본시오는 마치 외운 것처럼 읊어 나갔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은밀히 가지앵 잎을 구해 오라 명령하셨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누가…? 누가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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