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328)

쿵쿵, 바닥을 짓밟는 군홧발 소리가 그녀의 온몸을 좨치기 시작했다. 침실로 쏟아져 들어온 근위대가 하나둘 본시오의 주변으로 모여들어 그녀를 굽어보았다. 페기는 공포에 전율했다. 역광에 잠식된 이들의 모습이 한 덩어리처럼 얽혀 구분되지 않았다. 어둠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시오가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공작 전하를 체포하라.”

***

원탁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오밤중에 소식을 듣고 달려온 추기경들이 참담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다 일어나 거칠어진 얼굴들 위로 불안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때, 문이 활짝 열리며 클레멘스가 바람같이 들어왔다. 치렁치렁한 추기경 의복이 우아하게 휘날렸다. 잠옷 위에 가운만 걸친 상태로 정신없이 달려온 다른 추기경들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의 완벽한 차림새를 흘겼다.

“분위기가 왜 이리 어둡습니까? 누구 하나 죽기라도 한 것처럼.”

클레멘스가 명랑한 어조로 물꼬를 틔웠다. 안경을 벗고 고단한 눈가를 쓸어내리던 솔란지아가 날카롭게 반문했다.

“제정신입니까, 클레멘스? 뚫린 입이라고 그런 말이 쉽게 나와요? 지금이 어느 땐데…!”

“어느 때긴요. 성하께서 쓰러지신 때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며칠 전에도 쓰러져 계셨던 것 같기도 하고….”

“클레멘스.”

언제나 석상처럼 자리만 지키던 보나벤투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을렀다. 검은 눈이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클레멘스는 눈썹을 까딱이며 즐겁게 웃었다.

“오, 아직 원탁으론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군요. 염려치들 마십시오. 성하께선 무사하십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글리체리아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반쯤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정하라는 듯 우아하게 손짓하며 클레멘스가 말을 이었다.

“성하께선 언제나 은 식기를 사용하십니다. 약을 담는 잔 역시 마찬가지지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길, 성하께서 마시고 피를 토하신 잔은 검게 변색된 부분 없이 멀쩡했습니다. 독은 아니란 얘기지요.”

“독이 아니면 대체 무엇 때문에 저 지경이 되셨단 말입니까?”

“몸에 해로운 것이 어디 독뿐이겠습니까. 더욱이 성하께선 한 달 사이 혼절을 두 번이나 하셔서 건강이 많이 쇠하신 상태였지요. 정확한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성하의 건강 상태를 자세히 알고 있는 측근의 짓이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살구 냄새만 맡아도 목구멍이 부풀어 오른다. 또 어떤 사람은 갑각류에 닿기만 해도 온몸을 벅벅 긁었다. 평범한 식재료들도 사람에 따라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성하께선 지금 독을 드신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란 거군요.”

의자에 늘어져 있던 아나클레토가 손톱을 보며 한가롭게 말했다. 클레멘스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저었다.

“오, 다행히 그렇진 않습니다. 의사가 말하길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더군요.”

“기적이요?”

“평범한 사람이면 당장 목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인데, 스스로 회복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술렁임이 일었다. 그러고 보면 레오폴트는 아주 어린 시절 나병에 걸린 것치고 명줄이 아주 질겼다.

솔란지아가 아연함에 중얼거렸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아무리 사도라지만….”

“오래전 야누비타 1세는 뱀을 봉하여 썩어 들어가던 팔을 스스로 치유하셨지요. 그 이외에도 사도가 일으킨 기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사도께 불가능은 없습니다.”

“하지만 보나벤투라 추기경, 야누비타 1세는 천 년 전의 인물입니다. 그런 기적은 전부 까마득한 오래전의 일이에요. 이후 많은 사도들이 계셨지만, 고작해야 손끝에 성스러운 불꽃을 틔우는 정도였지 않습니까?”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계십니다.”

보나벤투라가 시선도 주지 않고 고고한 자태로 대꾸했다. 솔란지아는 할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엘피도 공작, 수사의 예후르는 대단한 사도였다. 손끝에 틔운 불씨로 산 하나를 태우고, 이 나간 검으로 수많은 마귀들을 베어 넘겼다. 어쩌면 오래된 역사서에 기록된 진정한 사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깜냥인지도 몰랐다.

상황을 정리하듯 클레멘스가 나섰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잘된 일이지요. 존귀한 분이 이렇게 덧없이 가신다면 우리 교국의 불행일 테니까요.”

“오랜만에 맞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 30년 전의 일이 되풀이되면 안 될 일이죠.”

“아나클레토 추기경. 어찌 그 참사를 그토록 가벼이 입에 담습니까? 자중하세요.”

글리체리아의 엄한 질책에 아나클레토는 입만 비쭉하고 말았다. 솔란지아는 불안한 눈으로 아나클레토를 곁눈질했다. 어쨌거나 같은 편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방만하게 구는 이유를 모르겠다.

“성하께서 회복 중이시라곤 하나, 언제 깨어나실지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현재 가장 큰 문제는 성하를 대신해 국정을 살피셔야 할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도 성하의 시해 미수에 관련되었다는 것이겠죠.”

클레멘스의 말에 솔란지아가 왈칵 미간을 찌푸렸다.

“시해 미수라니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성하께서 각혈하며 쓰러지신 마당에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성하께 약을 드린 사람이 카타리나 공작 전하시니, 그 일에 연관되신 것도 맞아요.”

“글리체리아.”

솔란지아가 아연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글리체리아는 냉철한 눈으로 솔란지아를 마주 보았다.

“지금은 무엇보다 냉정해야 합니다. 저도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흉측한 마음을 먹으셨다는 걸 믿고 싶진 않지만, 이런 일일수록 가슴보다는 머리를 따라야 하는 법입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글리체리아. 저 역시 같은 생각으로 카타리나 공작 전하를 비롯해 관련된 모든 자들을 체포하란 명령을 내렸습니다. 조사는 엄밀하고 철저히 이루어질 겁니다.”

좌중이 찬물 맞은 듯 고요해졌다. 총명한 두 눈을 멀뚱멀뚱하던 클레멘스가 문득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참, 제 직권으로 그리했습니다. 네 분의 사도께서 모두 불가피하게 자리를 비우신 상황이니, 규율상 바로 다음 서열인 제가 원탁과 교국의 일인자가 되어야 하니까요.”

“…….”

“혹 반대하는 분 계십니까?”

모두들 슬그머니 그의 눈을 피했다. 천계율에 따른 원탁의 서열이었다. 명분은 그에게 있었다.

좌중을 한번 훑어본 클레멘스가 빙긋 웃으며 손뼉을 짝 쳤다.

“좋습니다. 그럼 회의를 계속하도록 하지요.”

“공작 전하를 체포했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기다렸다는 듯 보나벤투라가 물었다.

“말 그대롭니다. 신병을 구속해 구금해 두었지요. 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교국을 떠받치는 신성한 사도를 어찌 함부로 다루겠습니까? 전하께선 본인의 침실에 갇혀 계실 뿐, 털끝 하나 다치신 곳은 없습니다.”

“다른 이들은요?”

“주치의, 약사, 주방장, 약을 전달한 하녀들, 하나도 빠짐없이 지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지금쯤 심문관들이 한 명씩 맡아 진술을 받아 내고 있겠지요. 누가 악랄한 역심을 품었는지 곧 명명백백히 밝혀질 것입니다.”

클레멘스의 설명에 글리체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한 기색으로 아랫입술을 물어뜯던 솔란지아가 어렵게 물었다.

“만에 하나 전하께서 관여하신 것이면 어떡합니까?”

“…….”

“우리가 감히 사도를 벌할 수 있을까요?”

보나벤투라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듯 강하게 헛기침했다. 클레멘스는 고개를 뒤로 빼며 넌지시 좌중을 훑어보았다. 오직 글리체리아만이 솔란지아와 눈을 맞추며 분명하게 말했다.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만일 전하께서 죄를 범하셨다면 그 죗값을 치르셔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한낱 추기경이지만, 우리의 뜻이 모여 원탁의 결정이 된다면 사도 역시 그 결정에 순응해야 합니다.”

“사도는 원탁보다 높이 계십니다. 글리체리아, 당신의 말은 옳지 않아요.”

보나벤투라가 무섭게 을렀다. 글리체리아는 이마를 감싸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나벤투라, 그대가 사도를 깊이 신봉하는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사도라고 모든 죄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에요. 만인의 귀감이 되어야 하는 사도이기에 더더욱 그 죄에 엄해야 합니다.”

“예, 만일 사도께서 죄를 범하셨다면 마땅히 그 죗값을 치르셔야지요. 하지만 사도를 벌할 수 있는 자, 오직 사도뿐입니다. 우리는 감히 사도를 벌할 수 없습니다.”

클레멘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 사도가 없는데 어찌하란 겁니까?”

“성하께서 깨어나시길 기다려야지요. 마귀를 잡겠노라 샅샅이 교국 땅을 뒤지고 다니는 엘피도 공작 전하도 계십니다. 두 분 다 아니 된다면, 마가 공작 전하라도 찾아 모셔야 합니다.”

“허, 그분께서 당장 어디 계신 줄 알고.”

아나클레토가 콧방귀를 뀌며 비딱하게 턱을 괴었다. 진정하라는 듯 클레멘스가 양손을 흔들었다.

“자자, 그러지들 마시고 이참에 투표를 한번 해 봅시다. 사도 아닌 자가 사도를 벌할 수 있느냐는 공의회에서도 수백 년 동안 답이 나오지 않은 문제예요. 이토록 곤란한 문제가 발등에 떨어졌으니, 결국은 원탁의 규칙을 따르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관례였다. 훗날 문제가 생기더라도 책임을 피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했다.

반박하는 자가 없자 클레멘스가 말했다.

“좋습니다. 원탁의 뜻으로 카타리나 공작 전하를 벌할 수 있다에 찬성하시면 손을 들어 주십시오.”

클레멘스가 손을 들었다. 글리체리아도 손을 들었다. 보나벤투라는 꼴 보기 싫다는 듯 두 눈을 감았고, 솔란지아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글리체리아를 흘깃거렸다.

그리고 세 번째 손이 올라왔다.

“…아나클레토 추기경?”

솔란지아가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클레멘스 역시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음…. 세 분이 손을 드셨으니 벌할 수 있다, 가 되겠군요.”

드르륵! 분개한 보나벤투라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클레멘스는 멋쩍은 얼굴로 회의의 끝을 선언했다. 맥 빠지는 끝맺음이었다.

글리체리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클레멘스에게 말을 거는 사이, 아나클레토는 하품을 질질 흘리며 회의장을 나갔다. 바람 먹어 펄럭이는 그의 가운을 솔란지아가 급히 잡아챘다.

“잠깐 나 좀 봅시다.”

솔란지아가 낑낑거리며 아나클레토의 가운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작달막하고 빼빼 마른 솔란지아가 끌고 가기에 아나클레토는 지나치게 육중했다. 흥, 하고 코웃음 친 아나클레토가 늘어진 뱃살을 어루만지며 성큼성큼 으슥한 복도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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