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328)

페기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아연함에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나한텐 당신도 소중해요.”

뒷골목의 더러운 시궁쥐를 보자마자 흘리던 눈물, 손잡고 싶어 하자 대신 내밀던 들꽃, 어설픈 피아노 연주에 환호를 보내던 목소리, 잠 못 들던 아이의 방을 찾아와 조곤조곤 옛이야기를 들려주던 그.

낳아 준 부모도, 피를 이은 가족도 필요 없다. 한 번도 맨얼굴을 보여 준 적 없는 그야말로 세상 누구보다 헌신적인 부모였다.

“지금까지 날 지켜 줬잖아요. 이젠 내가 당신을 돌봐 줄게요.”

좁은 시야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야 눈에 보였다. 음악도, 풋사랑도, 불투명한 제 미래도, 죽어 가는 레오폴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영영 잃고 나서 후회할 수는 없었다.

“차라도 데려가요. 그 애는 예후르와 데면데면하니, 우리가 떠난다고 하면 헐레벌떡 따라올 거예요. 보베시아 숲이나 비가노 호수의 별궁이 좋겠어요. 어디든 조용하고 자연과 가까운 곳이 낫겠죠. 예후르가 없으면 안드레아도 지금보단 자주 돌아올 거예요. 늘 밖으로 나도는 안드레아를 보고 싶어 했잖아요.”

아침이면 이슬 머금은 풀잎 냄새가 날 것이다. 차라는 늦잠을 잘 테고, 안드레아는 또 술타령을 하다가 호된 타박이나 들을 것이다. 자연을 닮은 피아노 소리가 끊임없이 흐를 것이며, 예후르는 가끔 찾아와 쉬다 갈 것이다. 울창한 숲에 가려진 우리를 아무도 엿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 행복하게 살아요.”

갈대처럼 흔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고름과 피로 썩어 들어가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토록 여리고 강한 힘에 레오폴트는 굴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오래도록 상상했던, 그러나 이루지 못하리라 여겼던 꿈이었다.

“그래…. 그러자꾸나.”

늘 머릿속으로만 그려 왔던 꿈 같은 하루를 생각하며 그가 낮게 읊조렸다. 연옥색 눈에 이슬이 맺혔다. 가면 속 가려진 입가에는 어렴풋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레오폴트는 서서히 기력을 되찾아 갔다. 주치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근심 가득하던 근위대 역시 미소를 되찾았다. 가장 반색한 것은 차라였는데, 말하고 움직이는 레오폴트와 한동안 낯을 가리더니 어느새 쭈뼛쭈뼛 다가와 옆자리를 꿰어 찼다.

“차라, 네가 그동안 날 간호했다고 들었다. 참으로 고맙구나.”

이런 말에는 얼굴을 화르르 붉히면서 말이다.

급한 일을 모두 해치운 페기는 이제 조금 한가로워졌다. 가장 신경을 곤두세웠던 조르멘디 남작 건도 의외로 큰 반발 없이 무마되었다. 남작은 며칠 새 얼굴이 반쪽이 되어 성궁을 떠났는데, 마지막까지 자신의 뒷배가 되어 준 인물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대단한 권력자란 뜻이겠죠.”

모드벤나는 그리 평했다. 라발의 지방 귀족에게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교국에서도 그 힘이 지대한 추기경. 교국의 면면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얼굴을 떠올릴 것이었다.

그러나 남작의 뒷배는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남작 일행은 라발로 떠났다. 기밀 명령을 받은 근위대가 그들을 추적해 중간 지점에서 셀린느를 다그마르 산맥으로 빼돌렸다. 속앓이를 하던 것이 무색할 만큼 깔끔한 결말이었다.

페기를 한낱 심약한 규중처녀라 얕보던 시선들은 순식간에 거두어졌다.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교황과 엘피도 공작이 직접 가르친 사도였다. 엘피도 공작이 이유 없이 성궁을 맡기고 떠나진 않았으리라 수군대는 자들이 많았다.

제 평가가 어찌 뒤바뀌든, 페기는 착실히 하루의 일과를 끝마치고 나면 차라와 레오폴트를 찾아 교국의 지도를 펼쳤다. 레오폴트의 수발을 든답시고 수업은 죄 미룬 채 노닥거리던 차라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지도에 딱 달라붙었다.

“여긴 어때?”

“음, 발렌트랑 너무 가까운데….”

“그럼 안 돼?”

“발렌트엔 아나클레토 추기경이 있어.”

“으, 취소, 취소.”

예상대로 차라는 성궁을 떠나자 넌지시 떠보았을 때 뛸 듯이 기뻐했다. 한참 뛰어놀아야 할 나이에 성궁은 무진 답답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초콜릿 포장지가 아닌 종이는 들여다보지도 않던 애가 온종일 지도를 끼고 살며, 레오폴트에게 여긴 어떠냐 저긴 어떠냐 묻기 바빴다.

페기는 그런 차라가 보기 좋았다. 성궁의 틀에 맞춰 깎이고 다듬어지기보단, 타고난 천성대로 살길 바랐다.

“레오는 어디가 좋을 것 같아요?”

“…어, 어? 나 말이냐?”

티 없이 밝은 차라와 달리, 레오폴트는 때로 수심이 깊은 얼굴이었다. 막상 떠나려니 주저하는 모양새였다. 하기야 갓난쟁이 시절부터 성궁에서 살았으니, 좋든 싫든 이곳에 깃든 감정의 깊이가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하지만 깊은 수심에 발을 잘못 들이면 그대로 가라앉기 십상이다. 페기가 굳이 병자의 침상에 지도를 펴는 것도 그런 연유였다. 그녀는 레오폴트가 망설일 때마다 그를 부르고 다그쳤다. 어디까지나 그를 위한 여정이었다. 더는 이 수렁에 얽매이게 할 순 없었다.

“나는 호수보단 숲이 좋구나.”

다행히 레오폴트는 수렁을 돌아보면서도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여전히 반신반의한 기색이나, 성궁을 떠난 삶을 점점 구체적으로 그려 나갔다.

차라는 고분고분 지도에서 호수의 별장을 지워 나갔다. 그의 말 한마디에 줄어드는 지명을 보며 페기는 손을 꾹 움켜쥐었다.

성 밖이 두려운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예후르는 여기 남아야 했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둥 두 개가 뽑히려 하고 있었다. 꼭 그래야 하나. 문득 솟구치는 약한 마음에게 이렇게 고했다. 이제 휘둘리는 건 지긋지긋해.

이건 레오폴트를 위한 여정이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그녀를 위한 여정이기도 했다.

업무가 줄어들자 페기는 남는 시간이면 자연스레 레오폴트를 돌보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침실에서 꼼짝 안 하던 차라를 타일러 수업을 듣게 했다. 제 간호를 핑계로 놀자 판을 벌였다는 걸 깨달은 레오폴트도 더는 차라에게 다정하지 않았다.

페기는 그간의 일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레오폴트는 그녀가 처리한 조르멘디 남작 건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하루 한 번 날아오는 예후르의 서신에는 한숨만 지었다. 페기는 그에게 모든 것을 터놓았으나 단 한 가지, 라발과의 합의안만은 보이지 못했다.

“아직은 절대 안정이 필요하십니다. 부디 유념해 주십시오.”

주치의마저 그렇게 이르자, 도저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페기는 결국 합의안을 봉해 서랍에 넣어 두었다. 서랍이 다시 열리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레오폴트는 곧 건강을 회복할 테고, 예후르도 머지않아 돌아올 테니까.

그날도 페기는 바쁜 일과를 끝낸 뒤 레오폴트를 돌보고 있었다. 그는 하루 세 번 식후에 약을 마시는데, 쓴맛이 하도 과하여 꼭 달콤한 주전부리를 함께 내오도록 했다. 페기는 특별히 그 일을 알틴에게 맡겼다.

“저번에 보니 산딸기 조림을 좋아하셔서 주방에 미리 귀띔해 두었거든요. 주방장이 공을 많이 들인 것 같아요.”

알틴이 쟁반을 건네며 속삭였다. 시키지 않아도 먼저 나서서 일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페기는 알틴을 칭찬한 뒤 조심조심 쟁반을 들고 침대맡으로 돌아왔다.

“레오, 약 먹어야죠.”

“…….”

“잠든 척하지 말고요.”

등 돌리고 누워 있던 레오폴트가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네 도대체 누굴 닮아 그리 박한지 모르겠구나.”

“당신은 누굴 닮아 그리 유치한 건지 모르겠네요.”

“네 말하는 것이 꼭….”

“예후르를 닮았다고요?”

레오폴트가 토라진 듯이 입을 다물었다. 페기는 웃음을 참으며 약이 든 잔을 건넸다.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다 드세요. 고작 이런 걸로 투정 부리면 차라가 뭘 보고 배우겠어요?”

“크흠.”

레오폴트가 영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잔을 받았다. 빨대를 매만지던 그가 문득 문가에 반듯하게 서 있는 근위대 본시오를 불렀다.

“그러고 보니 자네, 이번에 상을 받았다던데.”

“아….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기는. 내 아그리피나 홀에서 자네의 활약이 눈부셨다는 얘길 들었는데.”

본시오는 그저 허허롭게 웃기만 했다. 어디 나사 하나 빠진 듯 헐렁한 얼굴을 보며 레오폴트는 혀를 쯧쯧 찼다. 출신만 아니었으면 진작 출세하고도 남았을 실력이건만, 이렇게 보니 지나치게 무욕한 것이 출세하지 못하는 원인인 듯했다.

“레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마셔요.”

페기가 짐짓 눈을 가늘게 떴다. 손을 움찔한 레오폴트가 그제야 황급히 빨대를 구멍 속에 집어넣었다. 어쩜 갈수록 어린애가 되어 갈까. 페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산딸기 접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알틴의 말대로 오늘따라 산딸기에 반들반들 윤이 났다.

그런데.

“쿨럭!”

난데없이 격한 기침 소리가 터졌다. 고개를 돌리던 페기의 손에서 스르르 접시가 떨어졌다. 레오폴트가 괴로운 듯이 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빳빳하게 세워진 그의 목 끝에서 꺽, 꺼억, 꽉 막힌 신음 소리만 새어 나왔다.

“…레오?”

가면에 뚫린 눈, 코, 입 모든 구멍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한 줄기, 두 줄기…. 둑이 터지듯 핏물이 끓어 넘쳐 가면 아래로 주룩주룩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얗던 가슴팍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꺼어… 끄윽….”

핏발 선 연옥색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린다. 움찔움찔 경련하던 그의 몸이 서서히 기울어졌다. 풀썩, 피에 절은 앙상한 몸이 그녀의 품으로 쓰러졌다.

페기는 그대로 굳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둔탁한 소리들이 귓전을 때렸다. 고함 소리, 비명 소리, 울음소리, 오만 가지 소리들이 끔찍하게 얽혀 들었다. 쨍하니 아파 오는 귀도 못 막고 페기는 그저 레오폴트의 옷자락만 부여잡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힘이 빠지며 절로 무릎이 꺾였다.

그때, 침대맡에 아슬아슬 걸려 있던 잔이 곤두박질쳤다.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듯 굴러간 잔이 어느 군홧발에 부딪혀 나동그라졌다. 크고 단단한 손이 잔을 주워 들었다. 페기는 멀거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본시오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침착한 얼굴이었다. 경악과 참담함이 병처럼 번져 가는 곳에서 홀로 냉엄한 판관이었다. 활짝 열린 문밖에서 쏟아지는 빛을 등진 채 그는 가만히 잔을 들여다보았다. 시선은 고요했다. 미끄러지듯 그녀에게 닿은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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