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후르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럼 그렇지. 그에게 툭하면 무시당하는 게 일상인 니체타는 서글피 웃었다. 클로디아는 늘 그가 지나치게 격의 없다고 탓했으니, 어쩌면 그의 잘못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불쑥 예후르가 손을 들어 올렸다. 손끝엔 작은 불꽃이 매달려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니체타는 바보처럼 눈을 끔벅였다.
“어떻게 생각하냐니… 당연히 신기하죠.”
“그리고.”
“대단하시고.”
“또.”
며칠 전 마귀를 불사르던 공작의 모습이 떠올랐다.
“…좀 무섭기도 하네요.”
예후르가 빙긋 웃었다.
“그렇지?”
니체타는 자신이 제대로 대답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공작은 늘 그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기뻐하고, 그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실망했다.
“걱정하지 마. 보통은 너처럼 말하니까. 신기해하고 대단해하고 무서워하지. 그런데 페기는 울었어.”
“우셨다고요?”
울음에는 여러 감정이 있다. 신기해서 울 수도 있고, 대단해서 울 수도 있으며, 무서워서 울 수도 있었다. 니체타는 얼굴만 한 번 본 카타리나 공작이 셋 중 어떤 이유로 울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내가 아플까 봐 울었대.”
오래된 일이었다.
저만 졸졸 따라다니는 누이동생이 귀엽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던 그는 요술을 보여 준다며 불꽃을 피워 냈다. 레오폴트처럼 놀랄 수도 있고, 안드레아처럼 질색할 수도 있었다. 뭐가 되었든 제게서 떨어진다면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페기는 갑자기 대성통곡을 했다. 까치발로 서서 하나도 안 아픈 제 손을 붙잡더니, 죽지 말라며 아주 고래고래 울었다. 늘 개미처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던 애가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너무 놀라서 뒷산을 다 태워 버리고 말았지 뭐야.”
10년도 더 전의 일을 떠올리며 그는 조금 웃었다. 그 옆에서 니체타는 아주 이상한 얼굴을 했다.
“설마 암피사 산이 민둥산이 된 게 다 전하 때문….”
“어쩌다 보니 겸사겸사.”
“멀쩡한 산이 어떻게 겸사겸사 민둥산이 된다는….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요. 아플까 봐 울었다고 그분을 아끼시는 거라고요? 그게 전부예요?”
“누가 날 걱정해 준 게 처음이었거든.”
니체타는 할 말을 잃었다. 하기야 그는 신나게 뛰어놀다가 넘어져서 걱정 어린 타박을 들은 적도 없을 것 같았다. 엘피도 공작은 태어나자마자 직립 보행했을 사람이었다.
두 번째 꽃을 발견한 예후르가 허리를 굽혀 들꽃을 꺾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흠 없이 싱그러웠다. 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팔을 들어 올리자, 높은 나뭇가지에 쪼르르 앉아 있던 새들이 기다렸다는 듯 퍼드덕퍼드덕 내려왔다.
치열한 경쟁 끝에 그의 팔을 차지한 새는 커다란 독수리였다. 갓난애도 잡아먹는 맹금이 그의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돌변했다. 예후르는 독수리의 부리에 꽃을 물려 준 뒤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속삭였다. 독수리가 날카로운 부리를 그의 손등에 비비며 애교를 떨었다.
이윽고 독수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니체타는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란 걸 알면서도 충동적으로 입을 놀렸다.
“왜 다른 여자랑 약혼하신 거예요?”
예후르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늘에 든 호박색 눈이 유독 어둡게 보였다. 니체타는 그가 대답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필요하니까.”
“그럼 카타리나 공작 전하는 필요하지 않으세요?”
아니면 덜 필요한 건가. 니체타는 한 줌 남은 인내심으로 마지막 말을 삼켰다. 어쩌면 사도를 능멸했다는 죄로 지하 감옥에 끌려갈지도 모르겠다. 그의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하지만 불쾌한 기색 없이 발치를 내려다보던 예후르는 문득 고개를 돌려 깊은 숲속을 바라보았다. 사라졌던 빛줄기가 다시 드리워져 있었다. 노란 햇빛을 받은 나뭇잎이 금빛으로 변하고,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는 하얀 안개처럼 변모했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젠 필요할지도 모르겠네.”
***
레오폴트의 침실로 들어서던 페기가 멈칫했다. 독한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아, 전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끝납니다.”
침대맡에서 잔뜩 숙이고 있던 고드릭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페기는 말없이 침대로 다가갔다. 고드릭이 당혹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전하?”
“내가 할게요. 고드릭은 그만 들어가 쉬어요.”
“하, 하지만….”
고드릭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망설였다. 그러나 바위처럼 버티고 선 페기를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기가 꺾인 고드릭이 머뭇머뭇 일어나 인사하고 나갔다.
페기는 천천히 고드릭이 있었던 자리로 가 앉았다. 촛불 두어 개가 지키는 침대맡엔 잠든 듯 미동 없는 레오폴트의 가면이 있었다. 그리고 하얀 천을 벗겨 내어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그의 왼손.
페기는 가만히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노란 진물이 흐르고 붉은 핏물이 비치고 검게 썩어 들어가는 손이었다. 사람 손이 저럴 수도 있었다.
그녀는 고드릭이 두고 간 무명천에 소독약을 묻히고 조심스레 그의 손을 닦기 시작했다. 노란 진물이 닦인 곳에 벌건 진피가 드러나며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피가 비치는 곳엔 고약을 발랐다. 상처에 약이 닿을 때마다 그의 손끝이 움찔움찔 떨렸다.
“…고드릭?”
문득 가면 속에서 쉰 소리가 흘러나왔다. 페기는 열중하던 손을 멈추고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가면의 틈새로 껌벅껌벅 여닫히는 연옥색 눈동자가 보였다.
“내가 또 얼마나 잔 것이냐…? 사방이 어두운 것을 보니 시간이 적잖이 흐른 듯한데….”
“더 주무세요. 아직 자정 전이에요.”
“페기? 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힘겹게 내려오던 그의 눈이 우뚝 멈추었다. 드러난 손과 그녀에게 들린 무명천을 담은 시선이 마구 흔들렸다.
별안간 레오폴트가 이불을 확 끌어당기며 돌아누웠다. 얼결에 손이 내쳐진 페기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레오?”
“…….”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레오폴트의 등은 미동도 없었다. 페기가 허망한 얼굴로 얕은 숨을 내뱉었다.
“빨리 손 줘요. 아직 붕대도 안 감았는데 상처 덧나면 어쩌려고.”
“…….”
“레오.”
페기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 없는 등이 야속했다. 속에만 꾹꾹 눌러 담았던 말들이 끓어 넘치려 했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건데요.”
한 번도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한때 피아노를 연주했다는 손가락이 얼마나 길고 가는지, 색이 옅어 없는 것 같다던 눈썹은 도대체 어떤 모양인지, 그녀는 몰랐다.
“의사도 감염되는 병은 아니라고 했잖아요. 오랫동안 당신 수발들어 온 고드릭도 멀쩡한데 고작 한 번 보고 만졌다고 나한테 옮겠어요? 도대체 왜 그래요.”
무명천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북받치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아니면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요?”
예후르는 그의 맨얼굴을 안다. 몰랐으면 저도 모른다며 말을 해 줬을 위인이다. 레오폴트가 제 앞에선 가면을 벗지 않는다고 한탄했을 때, 예후르는 그의 맨얼굴을 알기에 침묵했다. 예후르를 믿기에 가면을 벗은 것이었다.
“그런 거예요? 날 믿지 못해서? 지켜 줄 만큼은 아끼지만, 치부를 드러낼 만큼은 믿지 못하겠다?”
“…….”
“내가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른다지만, 설마하니 당신을 배신하겠어요? 맨얼굴 좀 본다고 당신을 끔찍하게 여기기라도 하겠냐고요. 나 어린애 아니에요. 성 밖에서 도는 말들이 무섭다고 무작정 당신 뒤에 숨기만 하는 어린애 아니라고요, 이제.”
돌아누운 등은 여전히 고요했다. 뚫어져라 그 등을 노려보던 페기가 벌떡 일어나 그의 어깨를 당겼다. 레오폴트가 몸부림치며 소리 질렀다.
“이거 놔!”
“나 좀 보라고요!”
“네가 이걸 왜 봐야 하는데!”
레오폴트가 일갈했다.
“내 몸이야! 내가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네 눈에 이딴 걸 보이고 싶지 않단 말이다!”
“이제 내가 돌볼 건데 봐야죠!”
온몸을 버둥거리던 레오폴트가 돌연 멈추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연옥색 눈동자가 찌그러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돌보다니….”
페기는 피가 배어 나올 만치 입술을 짓씹었다. 말해야 했다. 실은 지금도 너무 늦었다는 걸 그가 쓰러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제 그만해요.”
“…….”
“교황 같은 거 그만두고, 제발 편히 쉬어요.”
가면 속 연옥색 눈동자가 서서히 확장되었다. 페기는 울음을 참으며 더듬더듬 그의 손을 찾아 쥐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의사가 그랬다면서요.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 쉬어야 한다고. 더 늦기 전에 그렇게 해요. 내가 같이 갈게요.”
한때는 그가 영원히 살 것 같았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당연한 명제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언제까지고 살아 성좌를 지키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아는 레오폴트는 처음부터 교황이었기에. 그가 아닌 다른 교황은 상상조차 힘들었다.
그러나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레오폴트는 그게 당장 내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예후르는…. 내가 어찌 그 애를 혼자 두고….”
레오폴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순간 페기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알아서 잘하겠죠! 사지 멀쩡하니 건강한데 뭘 못하겠어요!”
“아니다, 아니야, 페기. 넌 몰라. 네 말대로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모르는 건 당신이에요. 예후르는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도 제네로사가 아니라고요!”
레오폴트가 급히 숨을 들이켰다. 페기는 이를 깨물었다.
“갑자기 사라지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당신은 이미 할 만큼 했어요. 잿더미에서 시작해 교국을 재건했고, 교황과 사도의 자리를 안전한 곳으로 올렸어요. 이제는 예후르의 몫이에요. 당신은 이만 쉬어야죠.”
고작 열셋에 잿더미의 왕이 되었다. 성좌는 그의 골수를 빨아 옛날의 위용을 되찾았고, 교국은 그의 뼈를 쪼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럼에도 행여 다음 교황이 자신처럼 힘들까, 떠나질 못하고 있었다.
몸부림을 멈춘 레오폴트의 몸이 힘없이 침대에 늘어졌다. 죄 포기한 것처럼 연옥색 눈이 멀거니 뜨였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런데 어찌 너도 같이 가겠다는 말을 하는 게야. 아직 새파랗게 젊은 애가 늙은이 간호나 하며 허송세월하겠다니….”
“…….”
“너는 이곳에 남아 있어야지. 예후르를 많이 아끼지 않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