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328)

“압니다. 못 배우고 염치없는 여자지요. 하지만 그토록 비참하게 죽는다면 도리어 전하의 명성에 누가 갑니다. 남작을 파문한 것만으로도 세상 사람들은 전하의 단호함을 알 것이니, 앞으로 더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

“정말로 셀레나 모로가 죽는다면, 전하께서도 마음 아파하실 게 아닙니까.”

모드벤나가 간곡하게 청했다. 그녀가 지켜봐 온 페기는 엘피도 공작과는 달랐다. 후회하고 슬퍼하며 종국엔 스스로를 탓할 것이었다.

페기가 우뚝 멈추어 섰다. 그녀를 뒤따르던 모드벤나와 하녀들도 차례로 멈추었다. 미동 없는 그녀의 뒷모습에선 감정을 읽어 낼 수 없었다. 모드벤나는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꾹 사리물었다.

“…모드벤나, 당신의 고향이 다그마르 산맥에 있다고 했죠?”

“네, 다그마르 산맥에서도 가장 깊고 궁벽한 협곡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에 있는 아주 오래된 수도원이 제가 수도사로서 첫 서원한 곳입니다.”

“그런 곳이라면 세상 사람들 눈을 피하기도 좋겠네요.”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은 모드벤나가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모드벤나는 뒤돌아 뛸 듯이 걸어갔다. 멀어지는 그녀의 발소리를 들으며 페기는 다시 발걸음을 뗐다. 지친 발이 향하는 곳은 레오폴트의 침실이었다.

침실 앞은 근위대가 엄중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녀를 알아본 주치의가 고개를 숙였다. 페기는 눈짓으로 인사하곤 침실 문턱을 넘었다. 부드러운 향을 피운 침실 안은 고요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페기는 촛대를 내려놓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요즘 레오폴트의 간호에 아주 열심이라던 차라는 맞은편 침대맡에 엎드려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페기는 쓰게 웃으며 차라의 뻗친 잿빛 머리칼을 만져 주었다. 으응, 잠꼬대한 차라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페기의 시선은 이제 송장처럼 침대에 누운 레오폴트를 향했다. 얼굴을 감싼 가면 탓에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니 정말로 죽은 듯 보였다. 조심스레 가면의 코 아래 손끝을 대 본 페기는 미약한 날숨을 느끼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많이 쇠하셨습니다.”

매일같이 보고를 올리는 주치의는 앵무새처럼 그 말만을 반복했다. 오래된 지병, 오래된 피로, 오래된 쇠약함. 큰 병으로 쓰러진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쓰러진 것이라 했다. 페기는 며칠씩이나 깊게 잠들어야 살 수 있는 몸이 어떤 상태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었으면 말을 하지. 말 안 하면 모르는 이 바보 같은 자식들에게 호통을 치지. 미련하게 혼자서만 끌어안고 살다가 이런 꼴 나면 원망밖에 더 듣나. 적어도 극진히 그를 간호하던 차라는 레오폴트가 깨어날 날만을 이 벅벅 갈며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페기는 이불 속에 숨겨진 그의 손을 찾아 쥐었다. 두꺼운 천에 싸매어졌음에도 미약하게 전해지는 온기가 눈가를 홧홧하게 했다.

“…오늘 내 부모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났어요.”

확실히 지금껏 그녀의 부모라 주장하던 사람들 중엔 가장 그럴듯했다. 부모 양측 다 그녀와 닮은 점이 있었고, 어쨌거나 아이를 증명할 만한 서류도 있었다. 그들 앞에서는 강경했으나 페기는 아직도 그들이 제 부모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왜 내 부모라는 사람들은 다들 하나같이 미련하고 몰염치한 건지. 카니나의 사람들은 다 그런 걸까요? 그래서 나도 아직 이 모양 이 꼴인가.”

늘 레오폴트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예후르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올바르고 정의로운 그들처럼 존재만으로도 빛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빛이 되긴커녕 아직도 카니나의 악취 따위에 빌빌대고 있었다.

“그게 너무 지겨워서… 가장 잔인한 판결을 내렸어요. 그들은 본보기가 될 테죠. 그들의 비참한 말로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줄 거예요. 그러니 당신도 이제 나 때문에 고생하지 않아도 돼요.”

그는 그녀의 방파제였다. 그녀를 덮치려는 거센 물결을 늘 온몸으로 막아 주었다. 그가 이토록 지쳐 망가진 데는 분명 그녀의 몫도 있었다.

“알아요. 이런 일에 내 손을 더럽히길 바라지 않았다는 거.”

레오폴트는 늘 두려워했다. 혹 정말로 그녀의 부모가 나타난 것은 아닌지. 그들을 잔인하게 처벌했다가 훗날 그녀의 원망을 듣는 것은 아닌지. 온전한 부모가 되어 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염치를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늘 작아졌다.

실은 그게 아닌데. 당신은 언제나 나의 부모였는데.

“…당신이 이렇게 아픈 줄 알았으면 진작 내가 할 걸 그랬어.”

페기는 불덩이가 들어앉은 듯 뜨거운 목구멍을 애써 내리눌렀다. 음악만 알던 시절이 후회스러웠다. 가족들만 보면서 산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저만 보고 살던 이기적인 세월이었다.

“당신이 깨어나면 이런 말도 안 할게요. 당신이 그랬듯 정말 힘든 건 입 밖에도 내지 않을래요. 당신은 곧 일어날 테니 오늘이 마지막이야. 오늘이.”

“…….”

“그러니까 제발….”

누구든 깨어났으면.

누구든 돌아왔으면.

혼자서 덜컥 짊어진 짐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누구라도 곁에 있어 주길 바랐다. 늘 곁에서 보살펴 주던 사람들이 떠나자, 카니나의 뒷골목을 헤매고 다니던 시절처럼 외로워졌다. 페기는 레오폴트의 손등 위로 이마를 올리며 서러운 눈물을 참고 참았다.

불현듯 그의 손끝이 경련했다.

페기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레오폴트는 여전히 송장처럼 미동 없이 누워 있었다. 하지만 두툼한 천에 가려진 손가락이 꿈틀꿈틀 움직인다.

발작하듯 일어난 페기가 침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의사! 의사! 날카로운 외침에 여기저기서 발소리가 쏟아지고, 깊게 잠들었던 차라는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덮여 있던 가면 속 눈꺼풀이 걷히며 연옥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

니체타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휙 날아간 돌멩이가 물웅덩이에 풍덩 빠졌다.

“하…. 지겹다.”

그는 쭈그리고 앉아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밤하늘을 이불 삼고 이끼 덮인 바위를 베개 삼아 잠든 지도 벌써 열흘이 훌쩍 넘었다. 그는 지푸라기를 채운 소박한 침대와 밤이면 삐걱대는 소리로 잠 못 이루던 오두막이 점점 그리워졌다.

그의 곁에 드러누운 검은 용도 입을 쫙 벌리며 하품했다. 니체타는 피식 웃으며 용의 콧등을 세게 긁었다.

“왜, 너도 지겹냐?”

크르릉.

“그래, 너도 지겹겠지. 종일 날아도 보이는 건 나무, 나무, 나무뿐인데. 마귀는 도대체 어디 숨은 거야?”

마지막으로 마귀를 본 것이 사흘 전이던가, 나흘 전이던가. 처음에 마귀를 목도하고 오줌을 지릴 뻔했던 그는 이제 마귀를 그리워할 정도로 좀이 쑤셨다. 용을 타고 쏜살같이 산을 넘나드는 용 기병대에게 지루함은 아멘크라체스의 독약만큼이나 치명적이었다.

무당벌레를 손등에 올려놓고 놀던 니체타는 문득 저만치에 서 있는 상관을 발견했다. 참으로 신출귀몰하기도 하시지. 용 기병대를 놀려 두고 시시때때로 사라졌다 나타나는 뒷모습이 조금 얄미웠다. 심사가 뒤틀린 니체타는 그의 휴식인지 명상인지 모를 시간을 방해하기로 맘먹었다.

그런데 일부러 이끼 덮인 땅을 퉁퉁 밟으며 다가가는데도 그의 뒷모습은 미동조차 없었다. 니체타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쭉 뺐다. 얼핏 보이는 그의 호박색 눈이 정면 어딘가에 꽂혀 있었다.

“전하?”

“조용히.”

예후르가 낮게 읊조렸다. 가끔 간이 배 밖으로 나오긴 해도 대체로 순종적인 부하인 니체타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무엇이 저 고명하신 분의 시선을 사로잡았나 싶어 울창한 숲속을 훑기 시작했다.

아, 저기구나.

한눈에 알아봤다.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숲속으로 길게 뻗어 온 한 줄기 빛, 그 광원 속에서 여유로이 풀을 뜯어 먹는 노루 한 마리.

다른 때 보았으면 저걸 어떻게 요리해야 맛있게 먹었다는 소문이 날까, 하는 고민에 빠졌겠지만, 이런 분위기라면 조금 달랐다. 밤샘 비행에 지친 단원들이 모두 잠든 사위는 아주 고요했고, 숲속에 정체된 습기가 적막을 더욱 무겁게 내리눌렀다. 뜨듯한 고깃국도 지금은 숲의 요정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감수성이 제 상관에게도 있었나. 니체타는 조금 불경한 시선으로 예후르를 힐끔거렸다. 그가 아는 엘피도 공작은 위대한 조각가 겔랑수스의 작품을 보고도 정확한 황금 비율과 뚜렷한 양감에 감탄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정말 살아 있는 것 같잖아!’ 하고 경악할 때 말이다.

어쩌면 너무 많이 알아서 그런지도 모르지. 평소 예후르가 하는 말의 절반밖에 알아듣지 못하는 니체타는 그렇게 생각했다. 평생 책이라곤 경전 한 권밖에 읽어 보지 못한 그의 눈에 엘피도 공작은 끝을 알 수 없는 지식과 교양의 금자탑이나 다름없었다.

멀리서 새가 퍼드덕거리며 날아오르자, 그 소리에 퍼뜩 놀란 노루가 달아났다. 니체타는 아쉬운 마음을 접으며 느릿느릿 배를 문질렀다.

“도망가기 전에 잡을걸.”

장작에 구운 노루 고기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던 그는 여전히 숲속을 응시하는 예후르의 눈치를 봤다.

“저기, 전하. 뭘 보시는 거예요? 노루도 떠났는데.”

“…페기가 보면 좋아했을 것 같아서.”

“페기요?”

맹하니 되묻던 니체타가 황급히 제 주둥이를 때렸다.

“아이고, 이 입이 방정이지. 감히 높으신 분의 성함을… 죄송합니다아.”

예후르는 허리를 반으로 접는 니체타를 본 척도 안 했다. 노루가 떠난 빈자리를 비추던 빛줄기마저 서서히 잦아들자, 그는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밤새 날아서 피곤할 텐데 왜 벌써 일어났지?”

“그거야 전하도 마찬가지이신데요, 뭘. 그보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선 노루를 좋아하세요?”

“아니.”

“그럼요?”

병영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예후르가 말없이 허리를 숙여 이끼 사이로 피어난 들꽃을 꺾었다. 무심코 꽃을 밟을 뻔한 니체타가 황급히 발을 물렸다.

“도대체 그 꽃은 매일 꺾어서 누구한테 보내시는 거예요? 진짜 애인이라도 생기신 거 아녜요?”

“페기한테 보내는 건데 무슨 소리야.”

꽃잎의 벌레 먹은 자국을 발견한 예후르가 미련 없이 꽃을 버렸다. 니체타는 슬그머니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사적인 질문을 무시하지 않는 걸 보니 그는 기분이 꽤 좋은 게 분명했다.

“전하는 카타리나 공작 전하를 유독 아끼시는 것 같아요. 따로 이유라도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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