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의 손에 질질 끌려 나오던 셀린느가 충격으로 굳었다. 그 모습을 보자 페기는 또다시 심사가 뒤틀렸다. 그녀는 어머니를 몰랐다. 한 번도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재판에서도 인정되지 못할 증거들입니다. 더 이상의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다면 이만 돌아가세요. 내가 당신들을 부모라 인정할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
페기가 싸늘하게 말했다. 모드벤나는 훑어본 서류들을 돌려주었다. 멍하니 서류를 받아 든 조르멘디 남작이 갑자기 날카롭게 웃었다.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 불편한 듯, 성마른 손길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예, 이만 돌아가지요. 그런데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이보세요, 조르멘디 남작.”
“참, 그래! 클레멘스 추기경은 어떻습니까? 교황 성하와 앙숙이시라던데!”
페기의 표정이 굳었다. 그 모습이 즐거워 남작은 신나게 웃었다.
“아니면 아나클레토 추기경도 괜찮겠군요. 어디든 좋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야!”
“남작, 도대체 전하 앞에서 무슨 망언을 하시는 겁니까!”
“전하의 얼굴을 아는 추기경들을 만날 거란 말입니다! 그럼 추기경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오, 저 사내는 카타리나 공작 전하와 머리와 눈 색이 똑같구나. 맙소사, 저 여인은 공작 전하와 너무나도 닮았어! 생각만으로도 즐거워 온몸에 소름이 다 돋는군!”
남작이 미친 듯이 팔뚝을 벅벅 긁었다. 그를 일갈하던 모드벤나는 아연함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말은 독수리보다 빨리 퍼질 겁니다. 소문이 성도를 넘을 즈음엔 전하께서 친부모를 차갑게 내치셨다는 말로 변하겠지요. 오, 그런 얼굴 하지 마십시오. 이 아비의 마음이 아프잖습니까?”
남작이 광인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페기는 슬쩍 다가오려는 미란테를 눈짓으로 말렸다.
“그게 당신에게 무슨 이득입니까? 사람들의 입으로 희롱당하는 건 나뿐만이 아닙니다. 조르멘디 남작,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는데 희롱 좀 당하는 게 대숩니까? 난 완전히 빈털터리예요! 뒤늦게 찾은 딸 하나 믿고 가산 탈탈 털어 여기까지 왔는데, 뭐? 어머니가 없어?”
사납게 일그러졌던 남작의 얼굴이 문득 부드럽게 풀렸다.
“그러지 마시고, 전하, 이 불쌍한 부모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저희 생활만 좀 윤택해진다면 추기경들 앞에서 광대 노릇 할 생각이나 들겠습니까? 이게 다 못 먹고 못 입어 그런 겁니다. 이토록 부유하게 지내시는 전하께선 모르세요. 사람을 돌보는 예리엘의 현신이신데 어찌 부모도 몰라주십니까?”
페기는 지그시 이를 깨물었다. 세상에 그녀만큼 가난을 뼈저리게 겪은 사람도 없었다.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악취 속에 살아가던 시궁쥐가 바로 그녀였다.
그때, 울먹이는 여자의 목소리가 남작의 말을 끊었다.
“제발 그만하세요, 남작님! 네? 전하께서 난처해하시잖아요. 제발 그만….”
바닥에 무릎 꿇은 셀린느가 하늘에 기도하듯 등을 둥글게 말며 울었다. 그녀는 무릎걸음으로 책상에 다가와 매달리듯 흐느꼈다.
“전하, 방금 남작님의 불경한 말씀은 부디 잊어 주세요. 힘드셔서 그런 거예요. 저는 그런 걸 바라지 않아요. 돈, 명예, 이런 걸 무지렁이인 제가 어디에 쓰겠어요.”
페기와 꼭 닮은 모양의 눈에 눈물이 넘실거렸다. 순간 페기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저를 어머니라 인정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네, 그러셔야죠. 전하는 고귀한 분이신걸요. 전하의 깊은 뜻을 감히 제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요?”
“셀린느, 이게 뭐라는 거야!”
“조용히 하세요, 남작님! 전 당신처럼 탐욕스럽게 전하를 갉아먹고 싶지 않다고요! 전, 저는 그저 제가 배 아파 낳은 딸이 보고파 온 거예요!”
찢어진 가슴의 상처에 얼음이 맺혔다.
“전하, 제가 전하를 낳았어요. 아홉 달 품어 죽을 둥 살 둥 힘들게 전하를 낳았어요. 비록 헤어지긴 했어도 제가 전하를 낳았단 사실은 변치 않아요. 하늘의 천사님들도 아실 거예요. 제가 전하의 어머니란 걸. 전하가 제 딸이란 걸.”
가슴이 얼어붙었다.
“저는, 저느은 그저 외로웠어요. 남작님께 내쳐지고 나니 더 이상 제 곁에 아무도 없더라고요. 다른 여자들은 남편이 없어도 자식에게 의지하며 살곤 하던데, 전하를 잃어버린 전 아무 데도 기댈 곳이 없었어요. 죽을 것처럼 외로웠지만 이젠 괜찮아요. 전하를 만났으니까. 다른 엄마랑 딸들처럼 오순도순 얘기도 나누고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페기는 정처 없이 흔들리던 눈을 다잡았다. 어지럽던 머릿속이 명료해졌다. 무감한 시선이 절박하게 책상에 매달려 있는 여자에게로 떨어졌다.
“셀린느 모로. 자비로 당신을 거두어 준 수도원에 감히 외부인을 들여 정숙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죠.”
“…네?”
셀린느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수도원장은 자애롭게도 당신을 용서했지만, 당신은 몇 번이고 같은 잘못을 반복했고요.”
“외, 외로워서 그랬어요! 이젠 안 그래요! 전하가 제 곁에 있어만 주신다면!”
“이년이 감히 누구랑 놀아나? 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남작이 짐승처럼 셀린느의 머리채를 휘감았다. 셀린느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기사들이 달려와 남작의 사지를 옭아맸다.
“조르멘디 남작, 당신의 죄는 더욱 큽니다.”
“뭐, 뭐야?!”
“헌금 착복, 교회에 불법 청탁, 성직자에게 건넨 뇌물… 더럽지만 넘어간다면 넘어갈 수 있는 죄입니다. 하지만 이건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군요.”
“…….”
“8년 전, 소테라 수습 수도사를 기억합니까?”
남작의 얼굴이 일순 허옇게 질렸다.
“그, 그년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내게 거짓된 죄를 덮어씌웠어요!”
“글쎄요. 증거와 증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군요.”
“전하!”
“그때는 피아제 백작이 당신의 죄를 덮어 주었죠. 그 일대를 지배하는 명문가의 수장이 나섰으니, 한낱 수습 수도사를 범한 죄는 순식간에 묻혔겠죠. 백작에게 얼마를 주었습니까? 적은 액수가 아니었을 텐데. 혹 갑자기 생활이 어려워진 건 그때의 뇌물 때문이 아닌가요?”
남작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면서도 입은 꾹 다물고 열지 않았다.
“…좋습니다. 하나만 알고 계세요. 피아제 백작은 글리체리아 추기경의 큰언니. 당신이 입을 열든 열지 않든, 그녀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겁니다. 당신은 당신의 죄를 짊어져야겠지만.”
“교회는 날 처벌할 수 없습니다. 난 라발의 귀족이에요. 감히 교회가 날 어떻게….”
눈앞이 캄캄해진 남작이 중얼중얼 물색없이 말을 내뱉었다. 페기는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남작과 셀린느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번엔 당하고만 있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끝을 보아야 했다.
“교회가 강간죄로 당신을 기소할 순 없겠죠.”
“…….”
“그렇다면 신성 모독죄는 어떻습니까?”
남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하얗게 질린 입술이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그게, 그게 대체 무슨….”
“죄목은 이러합니다. 감히 사도를 모욕한 죄. 감히 사도를 능멸한 죄. 감히 사도를 겁박한 죄.”
신성 모독은 교회법이 가르치는 최악의 죄였다. 대륙의 국가 원수들이 모두 동의한 나르잘레 협약에 따라, 신성 모독을 저지른 죄인은 국적에 관계없이 교회가 처벌할 수 있었다.
“조르멘디 남작. 당신은 파문입니다.”
페기가 엄중하게 선언했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남작이 기사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비명처럼 터져 나오는 욕설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 결정이 부당하다고 느낀다면 종교 재판소로 가세요. 재판을 열어 줄 겁니다.”
그리고 파문에 만족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되겠죠. 페기는 마지막 말을 삼키며 셀린느를 돌아보았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네?”
셀린느가 백치처럼 말간 얼굴로 되물었다. 페기는 대꾸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작의 비명과 고성에 질려 귀가 아파 오고 있었다. 그런데 나가려는 그녀의 옷자락을 셀린느가 붙잡고 늘어졌다.
“저, 전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저도 마찬가지라니?”
“…셀린느 모로. 당신도 파문이란 뜻입니다.”
모드벤나가 불편한 얼굴로 대신 말해 주었다. 셀린느가 커다란 눈을 더욱 커다랗게 떴다.
“파문…? 제가 왜요?”
“사도를 모욕하고 능멸했으니까요.”
“제가 전하를 모욕하고 능멸했다고요? 제가 언제요? 전 그런 적이 없어요. 전 그저 엄마로서 딸이 그리웠을 뿐인데, 엄마가 딸을 사랑하는 마음도 죄인가요?”
겨우 그쳤던 눈물이 셀린느의 눈에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페기는 충동적으로 쪼그려 앉아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날 생각했어요? 진짜?”
셀린느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격한 고갯짓에 눈물이 허공으로 날렸다.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던 페기가 문득 자그맣게 웃었다.
“진정 날 생각했으면 내 앞에 나타나질 말았어야죠.”
셀린느의 고갯짓이 우뚝 멈췄다. 눈물도 그쳤다. 망치로 얻어맞은 듯 멍한 얼굴이었다.
페기는 미련 없이 일어났다. 집무실을 나오자 남작의 괴물 같은 고성도 멀어졌다.
“전하, 저들에게 파문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습니다.”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붙은 모드벤나가 책망하듯 말했다. 페기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파문이 무의미한 건 교회의 보호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극소수의 지배층뿐입니다. 하지만 저들은 아니잖습니까. 신도로서의 자격과 권리를 박탈당하고, 모든 사회적 관계를 잃을 겁니다. 당장 저들을 약탈하고 폭행한대도 제대로 처벌할 사람이 없어요.”
특히나 저들이 사는 소규모 지방은 더하리라. 교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지방 공동체에서 파문당한 사람은 저 사막의 피부 검은 이민족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저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가산을 약탈해도 누구 하나 말리는 자가 없을 것이었다.
“조르멘디 남작은 그나마 사정이 낫겠지요. 일단은 무늬나마 귀족이니. 더 이상 귀족 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할 테지만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셀린느 모로는 아니에요. 파문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돌팔매질 당해 죽을 것이 빤해요.”
페기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게 내가 내릴 수 있는 가장 치욕적인 처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