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328)

“…….”

“그래서 제안 드리건대, 하루 이틀 더 두고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페기와 모드벤나가 시선을 교환했다. 원래 약속한 날짜는 오늘이었다.

“라발의 귀족이라 해 봤자 중앙 정계와는 멀어진 지방의 한량입니다. 전하께서 며칠 더 두고 보신다고 흠잡을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반면 조르멘디 남작은 미쳐 날뛸 지경이 될 테고요.”

“사람은 성급해지면 약점을 드러내기 마련이죠. 물론 조르멘디 남작은 이미 약점투성이입니다만… 무엇이든 확실히 해 두는 편이 좋으니까요.”

모드벤나가 들고 있던 서류를 손가락을 훑으며 이어 말했다. 페기는 미란테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이틀 뒤에 만나는 것으로 하죠.”

그렇게 지연된 이틀, 들리는 말로 미란테는 아주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전혀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으나, 모드벤나가 넌지시 들려주는 말로는 그랬다.

페기는 정신없이 몰아치는 일감을 해치우며 가끔씩 제 부모일지도 모를 사람들을 생각했다. 하지만 딱 그뿐이었다. 이제는 생각할 겨를 없이 바쁜 게 다행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지난 사흘이 순식간에 지나갔듯 그다음 이틀도 눈 깜짝할 새 홀라당 사라져 버렸다. 조르멘디 남작과 셀린느 모로와의 대면을 앞두고 페기는 불현듯 자신이 긴장했다는 걸 깨달았다.

“남작은 몹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뒷배와 연락이 닿지 않으니 이제야 자신의 신세를 깨달은 것이겠지요. 행여 전하의 앞에서도 발광할지 몰라 근위 기사들을 여럿 대동하기로 했습니다.”

모드벤나는 집무실 안까지 들어와 있는 몇몇 기사들을 눈짓하며 일렀다. 페기는 얼어붙은 얼굴로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성질이 불같은 사내라 꺼리실 줄은 압니다만, 웬만하면 남작 쪽을 공격하십시오. 클레멘스 추기경과 접촉한 것도 남작일 테니, 그쪽에 빈틈이 더 많을 겁니다.”

“여자는요?”

“셀린느 모로는….”

모드벤나가 잠시 머뭇거렸다. 페기의 눈길이 스르르 그녀에게로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여자에 대해서는 거의 듣지 못했다.

“남작과는 다른 부류인 듯합니다. 그에게 끌려다니는 것 같으면서도 전하를 꽤나 간절히 뵙고 싶어 하더군요. 제 눈에는 나이에 비해 순진해 보이는 인상이었습니다.”

때로는 순진한 사람이 더 어려운 법입니다. 모드벤나가 걱정스럽게 덧붙인 말을 페기는 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다. 무슨 뜻인지 잘 와닿지 않았다.

똑똑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하얀 제복을 반듯하게 갖춰 입은 미란테가 먼저 들어왔다. 페기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켜며 더듬더듬 모드벤나의 손을 찾아 쥐었다. 페기의 창백한 뺨을 본 모드벤나가 황급히 그녀의 손에 서류를 쥐여 주었다.

페기는 간절하게 속삭이는 듯한 모드벤나의 갈색 눈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곧장 서류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멀리서 불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손아귀 안에서 서류가 살짝 구겨졌다. 분명 한 번 읽었던 내용인데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까막눈이 된 것 같았다.

어중간한 곳에서 발소리가 멈추었다. 페기는 계속해 서류만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침묵이 감도는 사위가 펄떡펄떡 뛰는 제 심장 소리로 무진 시끄러웠다.

“…여긴 접견실이 아니잖소.”

종이를 쥔 손끝이 움찔 떨렸다.

“전하의 집무실입니다. 워낙 바쁘셔서 따로 여러분을 만날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고 하시더군요.”

“아니, 그럼 의자를 미리 준비해 놓던가…. 나는 어디 앉으라는 거요?”

“금방 끝날 겁니다.”

“당신이 그걸 어찌 알아!”

남작의 노성이 쩌렁쩌렁했다. 골이 울리는 느낌에 페기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곁에 꼿꼿이 서 있던 모드벤나가 눈매를 날카롭게 세웠다.

“이 무슨 무례란 말입니까! 어서 전하께 예를 갖추세요!”

“감히 수도사 따위가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때껏 쥐 죽은 듯 있던 여자가 남작의 소매를 쥐었다. 남작은 신경질적으로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곤 가슴 위로 손을 올리며 예를 갖추었다.

“불의 종, 불의 사자, 우리를 인도하시는 소명의 천사 예리엘의 현신께 인사드립니다.”

여자도 뒤에서 허둥지둥 인사를 올렸다. 모드벤나가 곁에서 전하, 하고 속삭였다. 페기는 이제 고개를 들어야 할 때라는 걸 알았다. 실에 매달린 정수리가 당겨 올라가는 것처럼 고개가 들렸다.

처음 본 것은 당당하게 선 낯선 사내였다. 듣던 대로 얼룩덜룩한 은발에 보랏빛 눈을 가진 남자였다. 저를 향해 멍청하게 입을 벌리는 남작을 보며 페기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맞았어! 내가 맞았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전하, 아니 내 딸아!”

갑자기 남작이 달려들기 전까진 말이다.

페기가 흠칫하며 고개를 뒤로 물린 것과 동시에 기사들이 남작의 팔을 잡아챘다. 남작은 미친 듯이 웃으며 찬송가를 부르고 하늘의 천사를 부르짖었다. 그러더니 돌연 뒤돌아 가 작게 옹송그리고 있는 여자를 끌고 왔다.

“이 여자의 얼굴을 좀 보시오! 눈 똑바로 달린 사람이라면 알겠지!”

남작은 몸부림치는 여자를 붙들어 고개를 들게 했다. 페기는 부지불식간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충격에 입매가 설핏 굳었다.

“하하! 하하하! 어때, 닮았잖아! 셀린느랑 똑같잖아! 이걸 보고도 감히 날 거짓말쟁이라 손가락질할 사람이 남았나? 어?!”

“자중하십시오, 남작!”

“어허, 거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눈이 멀었나? 저 모습을 보고도 그리 뻣뻣해?”

남작이 거들먹거리는 동안에도 두 명의 여자는 얼어붙어 움직일 생각을 못 했다. 누가 봐도 닮은 얼굴이었다. 자기 자신조차 그걸 알았다.

문득 여자의 눈에 핑그르르 눈물이 돌기 시작했다. 충격에 굳었던 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정면에서 그녀를 마주친 페기는 그 눈 속에서 솟구치는 환희를 목도했다. 주체할 수 없이 속에서 혐오가 들끓었다.

“그래서요.”

날카롭게 나간 목소리가 남작의 말을 뚝 끊었다. 페기는 예민하게 날 선 눈으로 남작을 쏘아보았다.

“닮아서, 그게 어쨌단 건데요.”

남작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페기가 헛웃음을 머금었다.

“이 여자와 닮았으니 내가 당신들 딸이란 건가요? 세상에 닮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식이면 내 부모만 열댓 명이겠군요.”

그녀의 부모라 주장하는 자들은 항상 그랬다. 눈 색이 같다고, 머리색이 같다고, 입매가 닮았다고, 귀가 똑같이 생겼다고.

남작이 허둥지둥 셀린느의 뒷머리를 잡아 들이밀었다.

“그냥 닮은 게 아니잖습니까! 다시 제대로 보십시오! 누가 봐도 전하를 낳은 어머니입니다! 당신의 머리색과 눈 색은 날 닮은 거고!”

“적당히 하세요, 조르멘디 남작. 더 이상 전하께 예를 갖추지 않는다면 끌어내겠습니다.”

모드벤나가 차갑게 을렀다. 살벌하게 그녀를 노려본 남작이 큼큼, 헛기침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얼굴만이 닮은 게 아닙니다. 증거가 있습니다.”

그는 서류 묶음을 내밀었다. 모드벤나가 대신 받아 훑어보았다.

“첫 장은 내가 20년 전 카니나에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아, 만취하여 행패를 부리다가 치안대에 잡히셨었군요.”

모드벤나가 한심하다는 듯 뇌까렸다. 주먹을 콱 쥔 남작이 부글부글 끓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다음은 여기 있는 셀린느가 20년 전 아이를 낳았다는 증거입니다. 태어난 지 3일 된 아이를 근처 교회의 신부님께 보이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그 신부님을 찾아 증언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거짓입니다. 카니나의 세례 성사 목록에서 조르멘디 남작과 셀린느 모로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급하게 받은 세례라 그렇소! 신부님께서 목록에 넣는 걸 깜빡하셨다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한단 말이오!”

“사정은 중요치 않습니다. 문제는 신뢰할 만한 물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지요.”

모드벤나의 반박에 남작이 부들부들 주먹을 떨었다.

“당시 셀린느의 아이를 받은 산파의 증언도 있습니다. 시간을 주신다면 당장이라도 산파를 데려올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뢰할 수 없는 증인입니다.”

“그 산파는 카니나에서만 30년을 일한 사람이오!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자라 이름 높으니 한번 찾아나 보시오!”

“성실함이 정직함을 갈음할 수는 없습니다.”

남작의 이가 까득 갈렸다. 그는 훌쩍이고 있는 셀린느의 팔뚝을 잡아 다시금 얼굴을 들이밀었다.

“신부님의 증언이 있고, 또 이렇게 닮은 얼굴이 있는데도 사실을 부정하실 수는 없습니다! 저를 부정하고, 카니나의 뒷골목을 위해 한평생 바치신 신부님을 거짓말쟁이라 매도하실 겁니까? 네?!”

“부정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께서 진실만을 말씀하고 계실지도 모르죠.”

페기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당신들이 낳은 그 아이가 나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얼굴이! 얼굴이 이렇게나 닮지 않았습니까!”

“닮은 얼굴은 아무것도 보장하지 못해요. 게다가 남작은 스무 해 전을 계속해 강조했지만, 내가 정말 스무 살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내 나이는 성하께서 어림잡아 정해 주신 것일 뿐, 나조차 내 진짜 나이를 몰라요.”

확실히 조르멘디 남작은 자신의 아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최대한 긁어모았다. 하지만 그걸로도 그들이 페기의 친부모란 사실을 확언할 순 없었다. 애당초 부모의 문제가 아니었다. 페기 본인이 출생부터 나이까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생각하고 보시니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부디 편견 없는 눈으로 보아 주십시오. 저희가 진정 전하의 가족이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조르멘디 남작이 어설프게 웃으며 다가왔다. 페기는 그들을 마주한 이래 처음으로 인상을 구겼다.

“유감스럽게도 내겐 이미 가족이 있습니다. 지엄하신 교황 성하께서 내 아버지시고, 수사의 예후르와 이멘바흐의 안드레아, 아뎃사의 차라가 내 자랑스러운 형제들입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안 계시지 않습니까! 전하를 배 아파 낳아 주신 어머니요!”

“난 어머니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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