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하듯 살짝 턱을 내렸던 티에리가 짧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럴듯한 말이로군요. 그 마귀 사태가 도대체 언제 진정될지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네, 두어 달 정도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내가 궁금한 건, 두어 달 뒤엔 정말로 아무런 문제 없이 공표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성하께선 합의안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페기의 입술이 조개처럼 다물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티에리가 거만한 시선을 쏘았다.
“솔직히 말하면 어처구니가 없군요. 교국은 원래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합니까? 성하께서 무능하신 건지, 엘피도 공작이 교만한 건지 도통 모르겠군요.”
“말조심하세요.”
“가장 궁금한 건 당신은 그 사이에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엘피도 공작의 편이라면 진작에 공표했을 테고, 교황 성하의 편이라면 다 끝난 일에 재를 뿌리려고 난리였을 테죠. 하지만 당신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니….”
“…….”
“내가 당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티에리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페기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교황 성하의 편, 엘피도 공작의 편. 교국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나 역시 누구 하나의 편을 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요. 다만 성하께서 편찮으시니 건강을 조금 회복하시거든 말씀드리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지금도 눈 못 뜨고 사경을 헤매고 계시니, 내 걱정을 헛된 변명이라 여기지는 않으시겠죠.”
“소식을 듣게 된 성하께서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반대하시겠죠.”
페기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이렇게 당연한 걸 묻는 저자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30년 전 참극이 당신에겐 오래전 조국이 저지른 한낱 실책일지 모르나, 성하께는 그분의 모든 것을 앗아 간 날입니다. 반대하시고 분노하실 거예요. 하지만 이미 효력을 지닌 합의안을 무시하실 재간은 없어요.”
“장담합니까?”
“네.”
“그토록 성하의 분노가 거센데 어찌 그리 쉽게 장담합니까?”
“내가 그분을 설득할 거니까요.”
페기는 레오폴트가 깨어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할 말이 아주 많았다. 실은 오래전에 해야 했던 말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성하께선 날 아끼세요. 내 말이라면 교황의 관도 내려 주실 분이죠. 그분의 해묵은 분노가 깊지만, 결국엔 내 말을 따라 주실 거예요.”
티에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이 그만한 열의를 들일 정도로 합의안을 반기는 것 같진 않은데요.”
“당연하죠. 내가 라발을 반길 이유가 뭐가 있다고.”
“…….”
“성하를 위한 일이에요. 나한텐 그거면 충분해요.”
티에리는 마치 희한한 생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관찰했다. 기우뚱 기울어진 얼굴에서 나지막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반평생 내전에 틀어박혀 있던 규수라기엔 생각보다 강단이 있는데.”
동시에 예고도 없이 그의 손이 뻗쳐 왔다. 페기는 눈앞에서 우뚝 멈춘 그의 손끝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무례를 지적하기 앞서 그가 이러는 이유를 몰랐다.
물음표가 떠오른 그녀의 표정을 보고 티에리가 헛웃음을 머금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또 그 말이 맞는 것도 같고.”
“…무슨 의미예요?”
티에리는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잘 알겠습니다. 합의안을 공표하기도 전에 엘피도 공작이 떠나 골머리를 앓았는데, 오늘 당신을 보니 교국이 입장을 뒤집을 것 같진 않군요. 부디 성하의 설득이 잘 이루어지길 바라겠습니다.”
집무실을 나가려던 티에리가 문득 그녀를 돌아보았다.
“나는 곧 떠납니다. 혹 이야기 상대가 필요하다면 그 전에 찾아와요.”
페기는 이번에야말로 인상을 구겼다. 힐끗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티에리는 비웃듯 조소를 남기고 사라졌다. 벽에 딱 달라붙어 살아 있는 장식장 행세를 하던 알틴이 입가를 가리며 수선을 떨었다.
“어머어머. 이게 웬일이람? 전하께 관심 있으신가 봐요.”
“…관심은 무슨.”
“저게 관심이지 그럼 뭐예요! 자고로 사내란 관심 없는 여자한텐 저런 말 안 한다고요!”
페기가 눈썹을 찡그리며 책상에 가 앉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황태자는 약혼한 사람이야.”
“약혼은 엘피도 공작 전하도 하셨잖아요.”
“여기서 예후르가 왜 나와?”
되묻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아차 싶어 입을 다문 알틴이 곧 배시시 웃으며 뒷걸음질했다.
“어머나, 벌써 저녁 기도 시간이네. 세숫물 가져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순식간에 혼자가 된 방 안에서 페기는 힘없이 의자에 늘어졌다. 멀찍이 비치는 거울 속 몰골이 참으로 초췌했다. 푹 꺼진 뺨과 거무튀튀한 눈 밑을 응시하던 그녀는 손등으로 눈가를 덮었다.
지쳤다. 쪽잠으로 버텨 온 몸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고, 머릿속에 커다란 바위가 들어앉은 것처럼 생각이 무뎌졌다. 레오폴트는 어떻게 이 짓을 30년이나 해 온 걸까? 그의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예후르는 어떻게 한 번도 힘든 내색 없이….
페기는 입술을 깨물며 신경질적으로 손을 치웠다. 조금만 생각의 고삐를 풀어놓으면 그에게로 이어졌다. 마치 모든 생각의 길이 그에게로 통하는 것처럼.
바보, 멍청이, 등신. 이럴 거면 차라리 몸은 힘들어도 정신없이 일에 파묻히는 게 나았다. 자존심도 없지, 어떻게 그런 말을 듣고도 변함없이 그에게 목맬 수 있을까. 왜 나란 사람은 이토록 하염없이 미련하여서.
“알아.”
또 이렇게 그의 마지막 목소리를 떠올리고 만다. 그녀는 자괴감에 휩싸여 어디 있는지도 모를 그의 옷자락에 매달리고 싶어졌다. 도대체 무얼 아느냐고.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냐고. 진정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똑같이 좋아한단 대답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녀가 바란 것은 딱 그가 잘 짓는 난처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면 이 오래된 마음을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완전히 제거하진 못하더라도, 다시는 수면 위로 나오지 못하게끔 가슴 속 깊숙이 숨겨 둘 수 있을 것 같았다.
너의 마음을 안다는 그런 기만적인 대답은 상상도 못 했다.
똑똑.
문득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페기는 고개를 돌렸다.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부리로 창문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페기가 느릿하게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창틀을 넘어온 비둘기가 그녀와 시선을 맞대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페기는 비둘기가 물고 있는 꽃을 조심스레 받아 들었다. 길게 늘어진 보랏빛 라벤더였다.
수고했단 의미로 비둘기에게 씨앗을 주어 날려 보낸 뒤, 자리에 앉아 가만히 꽃을 들여다보았다. 암호가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도 아닌 그저 신선하기만 한 꽃이었다. 하지만 이런 꽃들이 매일같이 새들에게 물려 온다면, 조금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럼에도 페기는 꽃들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으려 애썼다. 왜냐하면 정말로 특별하지 않으니까. 그가 베푸는 친절, 그가 전해 오는 애정, 그 모든 것들은 가족에게 베푸는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을 테고, 기대하지도 않을 테다. 멀리서도 저를 잊지 않고 매일 꺾은 꽃을 보내오는 그에게 감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 역시 감사를 바라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니까. 그저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누이동생에게 선사하는 하해와 같은 자비의 일환일 뿐이었다.
“그 꽃은 또 어디서 나셨어요?”
세숫물을 들고 들어오던 알틴이 물었다. 페기는 말없이 라벤더를 매만졌다. 꽃병을 돌아본 알틴이 허리에 손을 올렸다.
“벌써 꽃병이 다 찼네…. 시든 꽃은 버리고 여기 꽂아 드릴게요.”
“버리지 마.”
“네?”
“버리지 말라고.”
페기는 반쯤 시들고 반쯤 싱싱한 꽃들 사이로 라벤더를 손수 꽂았다. 그리고 종류가 다른 십여 송이 꽃들을 바라보았다.
예후르가 돌아올 때까지만이다. 특별한 의미도 없고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니니, 그가 돌아오는 날 모조리 버리겠다. 딱 그때까지만 간직할 것이었다.
그러니 빨리 돌아왔으면.
차마 입 밖으로 못 할 소리를 속으로만 되뇌며 지끈거리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속이 너무나도 어두웠다. 빛이 그리웠다.
***
조르멘디 남작에게 약속했던 사흘은 금방 지나갔다. 그동안 그를 감시했던 미란테는 매일 저녁마다 페기에게 보고를 했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우스웠다.
“식사를 나르는 하녀를 꾀어내려다 실패한 뒤론 제게 수작을 걸고 있습니다. 전하를 만나 뵙기만 하면 자신에게 수만금이 들어올 테니, 그중 일부를 떼어 주는 대가로 편지를 전해 달라 하더군요.”
미란테는 공손히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에는 도대체 언제 카타리나 공작을 만날 수 있느냐, 불안하니 직접 만나서 얘기할 순 없겠느냐는 구구절절한 부탁이 가득했다.
“누구에게 전달하라던가요?”
“동관 기도실 우측 세 번째 서랍에 넣어 두라 하더군요. 즉시 그곳에 보초를 세워 두었지만 아직까진 특별히 이상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페기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조르멘디 남작은 이미 끈 떨어진 인형 신세인지도 몰랐다. 그를 뒤에서 조종하던 자가 클레멘스 추기경이든 아니든, 이 이상 추문에 깊게 관여했다간 도리어 해를 입을 수 있음을 아는 것이었다.
모드벤나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조르멘디 남작은 그 존재만으로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추문은 이미 물밑에서 퍼졌고, 전하께서 이를 어떻게 처리하실지 지켜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일을 꾸미는 손길이 음흉한 게 클레멘스 추기경이 틀림없습니다.”
확실히 같은 라발 출신의 원탁 추기경인 글리체리아와 보나벤투라는 이런 흉계를 꾸밀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페기의 생각도 클레멘스에게로 기울었으나, 그가 뒤로 물러난 이상 당장 시급한 문제는 조르멘디 남작이었다.
“송구하지만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늘 정해진 보고 이외에는 말을 아끼던 미란테가 웬일로 그리 물어 왔다. 페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란테는 작게 헛기침한 뒤 말을 이었다.
“지난 사흘간 제가 지켜봐 온 조르멘디 남작은 생각이 깊지 않고 성질이 급한 사람입니다. 오늘만 해도 벌써 세 차례나 발광하더군요. 감히 라발의 귀족을 불법적으로 감금하고 있다고요. 본인 스스로 성질을 감당하지 못하는 듯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