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328)

“…….”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이번 일은.”

페기는 말끝을 죽이며 조용히 입술에 검지를 붙였다. 거북이가 등껍질 아래로 옹송그리듯 성주는 고개를 잔뜩 움츠렸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무덤까지 갖고 가겠습니다.”

성주는 줄행랑치듯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모드벤나가 조급히 말문을 열었다.

“라발이라면 정황상 클레멘스 추기경일 가능성이 높겠습니다.”

페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짐작건대 전서구는 조르멘디 남작의 영지가 아닌 라발의 국경 어딘가로 날아갔으리라. 그곳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람이 전서구의 편지를 다시 직통으로 클레멘스에게 보낸 것이다. 얄팍한 눈속임이지만 성주의 의심을 피하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저는 선뜻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지금 이 상황에서 클레멘스 추기경이 전하를 공격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공식적인 발표만 없을 뿐 교국은 라발과 화해한 것이나 마찬가지고, 특히 엘피도 공작 전하께선 라발과 손잡고 탐보프를 견제하려 하시는데요.”

클레멘스처럼 똑똑한 사람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일을 벌였을 리 없다. 지난 20년을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해 가며 교국이 하는 일마다 어깃장을 놓았듯, 이번에도 그 나름대로 명확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페기는 조금 전 원탁에서 보았던 클레멘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늘 명랑하던 가면이 벗겨진 틈으로 살짝 엿보였던 냉담한 시선이 유독 뇌리에 깊게 남았다.

“…클레멘스 추기경은 개인적인 권력을 원하는 듯해요. 아까 원탁에서도 본인이 성하의 빈자리를 대신하겠다는 욕심을 내비치더군요.”

“조르멘디 남작을 불러들여 전하의 위신을 깎아내리고 원탁을 차지하려는 속셈이었을까요?”

“그렇다기엔 날짜가 맞지 않아요. 벨렘 성주가 서신을 받은 것은 닷새 전이고, 성하께서 쓰러지신 건 불과 어젯밤이니까요. 원탁의 의장 자리가 공석이 된 것은 그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겠죠.”

“하지만 그 비슷한 추측은 가능합니다. 성하께선 쓰러지기 전에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계셨습니다. 성하를 대신해 업무를 처리하던 분이 바로 전하시죠. 만약 조르멘디 남작을 조종하는 이가 클레멘스 추기경이라면, 추문을 퍼트려 전하를 뒤로 물러나시게 한 뒤 본인이 정국을 주도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페기는 참담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클레멘스 추기경을 잘 몰랐다. 그 역시 자신을 잘 모를 것이다. 은혜든 원한이든 주고받은 적이 없는데, 이런 의심을 해야 하는 상황이 못내 서글펐다.

“요앙 오귀스트의 명령일까요?”

들려오길, 클레멘스 추기경은 라발의 개. 요앙 오귀스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른다고 하였으니, 이 역시 황제의 명령인지도 몰랐다.

“라발의 황제는 영리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교국에 힘을 실어 줄 때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테죠. 만약 클레멘스 추기경의 짓이라면 그의 독단이라 보는 것이 옳습니다.”

“이해가 되질 않네요. 모드벤나 수도사의 말대로라면, 클레멘스 추기경은 지금 요앙 오귀스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가요?”

“클레멘스 추기경은 그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교황 성하조차 그 속이 천 길 물속 같다 하시는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기경을 두고 라발의 개라 욕하지만 단순히 그뿐이라면 성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미욱한 제 사견이나, 클레멘스 추기경에겐 요앙 오귀스트의 명령보다 더 중한 신념이 있는 듯합니다.”

페기가 쓰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산딜라 추기경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부디 그 신념이 좋은 것이어야 할 텐데요.”

차라리 그러면 덜 억울하기라도 할 테니까. 부모 없는 사도란 이유만으로 온갖 데서 돌팔매질 당하는 제 꼴이 이제는 억울하다 못해 지긋지긋했다.

“그 사람들은 무어라 하던가요?”

“전하를 만나 뵙게 해 달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조르멘디 남작은 확실히 뒷배가 있는 듯하더군요. 이상하리만치 당당해 보였습니다.”

“요구 사항은 여전히 없고요.”

“전하를 직접 뵙고 말씀드릴 요량인 듯합니다.”

“내가 우스운 거겠죠.”

페기는 건조하게 시선을 돌렸다. 평생을 내전에서 피아노만 치던 사도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갓 스물 된 여자애니, 제 뜻대로 놀아나리라 여겼을 것이다.

모드벤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 만나 보시겠습니까?”

“굳이 그 사람들 속도에 맞춰 줄 필요는 없겠죠. 예정대로 사흘 뒤에 만나는 것으로 해요.”

페기는 제 눈앞에서마저 조르멘디 남작의 여유로운 낯짝을 보고 싶진 않았다. 그는 앞으로 사흘간 안달복달하다 못해 간담이 녹아내려야 했다. 조바심에 경솔해진 언행에서 그의 빈틈이 엿보일 것이었다.

시종이 문을 두드려 왔다.

“전하, 미란테 경이 알현을 청하십니다.”

“드시라 해라.”

평소와 다름없이 하얀 근위대 정복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미란테가 접견실로 들어와 인사를 했다. 페기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창 바쁠 때 부른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염려 놓으십시오. 전하의 부름이야말로 가장 먼저 받들어야 할 명령입니다.”

자리에 앉으라는 권유도 물린 채 미란테는 지팡이를 짚고 꼿꼿하게 섰다. 잠시 고요한 찻잔을 내려다보던 페기가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오늘 벨렘 성주와 함께 입궁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라발의 조르멘디 남작이지요. 개인 시중을 드는 하녀 하나만을 가솔로 데려왔다고 들었습니다.”

“내 아버지라 주장하는 사람이에요.”

“…….”

“그 하녀가 나를 낳아 준 어머니라 하고.”

순간 미란테가 눈을 부릅떴다. 지팡이를 꽉 움켜쥐는 주름진 손을 페기는 그저 관망하듯 응시했다.

“요사이 벌어진 일들로 근위대가 정신없이 바쁜 줄은 알지만, 그자들을 철저히 감시해 줬으면 좋겠어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누구와도 접촉하지 못하도록.”

낮게 가라앉은 보랏빛 눈이 미란테의 시선과 맞닿았다. 미란테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명을 다시 내려 주십시오. 저희 장미 기사단은 사도를 지키고 사도를 따르는 존재. 감히 사도의 부탁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자그맣던 미란테의 몸집이 일순 엄숙하게 커진 듯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페기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자들을 철저히 감시하세요.”

“명 받잡겠습니다.”

미란테가 즉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모드벤나가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얹었다.

“미란테 경. 잘 아시겠지만 입이 무겁고 신뢰할 만한 기사들을 붙여 주셔야 합니다. 전하께선 이 일을 조용히 처리할 생각이십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제가 직접 맡을 것이니.”

“네?”

모드벤나의 당혹한 목소리가 튀었다. 페기 역시 아연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란테는 쓰러진 레오폴트의 경호를 감독하고 있었다. 아무리 이 일이 중하다 해도, 레오폴트의 안위보다 중할 리 없었다.

그들의 생각을 짐작한다는 듯 미란테가 가늘게 웃었다.

“제 나이 벌써 일흔입니다. 이제 검술로는 기사단에 갓 들어온 신참보다도 못하지요. 제게 남은 것은 오랜 세월 쌓아 온 연륜과 눈치 정도인데, 지금 성하께 필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저보단 왈테르 경의 무력과 짐승 같은 감이 더 도움 될 것입니다.”

“…….”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비록 성하를 해하려 드는 자객을 막을 순 없지만, 한낱 소인배의 음흉한 속내를 간파하는 것엔 누구보다 자신 있으니까요.”

페기는 한숨처럼 웃었다. 예후르가 떠난 뒤 처음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미소였다.

“경이 있어 다행이에요.”

미란테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더욱 깊숙하게 숙였다.

페기는 쓴맛이 묻어나는 미소를 서서히 거두었다. 허공에 비스듬히 걸려 있던 시선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이르게 도착한 불청객들을 미루어 두었음에도, 그녀를 찾는 불청객은 끊이질 않았다.

“또?”

되묻는 페기의 목소리엔 드물게도 짜증이 역력했다. 알틴이 죽상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안 계시다고 말씀드렸는데도 조금 전 이곳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을 봤다며…. 도무지 제 말은 들어 먹질 않으세요. 지금도 문 앞에서 버티고 계시는걸요.”

페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르멘디 남작이라면 안 보이는 곳에 처박아 둘 수라도 있지만, 이자는 그럴 수도 없었다. 그녀는 지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모시렴.”

알틴이 반색하며 문밖으로 나갔다. 오래지 않아 티에리 장 오귀스트가 느긋한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안 계시다 들었는데.”

“…….”

“오늘도, 어제도, 엊그제도.”

페기는 말없이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티에리가 풍성한 옷자락을 간수하며 고상하게 착석하자, 알틴이 그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그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지나가듯 읊조렸다.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에 비해 찻잔은 너무나 작고 연약해 보였다. 페기가 가만히 피로한 시선만 보내오자, 그는 피식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나랑은 말도 섞기 싫다 이겁니까?”

“…왜 만나자고 하셨나요?”

실은 페기도 그의 용건을 알고 있었다. 십중팔구 그녀의 책상 속에 잠들어 있는 라발과의 합의안일 것이다. 그게 아니면 라발의 황태자가 절 이토록 끈질기게 만나려 들 리 없었다.

그러나 페기는 요 며칠 정말로 바빴다. 눈코 뜰 새 없이 일거리가 쏟아져 들어오는데, 대부분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겨우겨우 모드벤나와 실무진들을 붙들고 장님처럼 더듬더듬 초행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티에리는 도도하게 팔짱을 꼈다.

“엘피도 공작이 떠난 지 벌써 열흘이 넘어갑니다. 양국의 합의안에 도장이 찍힌 지도 그만큼이 되었단 소리죠. 도대체 언제 공표할 생각입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이 있죠. 마귀 사태가 진정된 이후 공표하는 것이 새로운 정국을 이끌어 나가기에 더 수월하리라 여겼을 뿐입니다. 게다가 보상안을 준비하려면 라발도 시간이 필요하지 않던가요?”

페기는 예후르가 떠난 뒤 라발과의 합의안을 읽어 보았다. 레오폴트의 동의 없이 진행한 일이라 개운치는 않았지만, 확실히 혹할 만한 것들이 있었다. 특히 몇몇 경제적 보상안은 라발로서도 선뜻 내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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