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328)

“제가 라발 출신이라고 라발의 모든 귀족들을 알고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런 비루한 자와 저를 엮으시려는 시도 자체가 참으로 불쾌하기 짝이 없군요. 만일 아나클레토 추기경이 아니었다면 성직자 된 몸으로 감히 결투를 청했을 겁니다.”

클레멘스의 강경한 태도에 아나클레토는 작게 코웃음 쳤다.

“뭐, 아니시라면야. 좌우간 이제 전하께서 답을 주실 차례입니다.”

“무슨 답을.”

“전하께선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아나클레토의 시선이 음흉하게 그녀의 얼굴 위를 기었다. 페기는 일그러지려는 얼굴 근육을 간신히 지탱했다. 수치심에 배 속이 활활 끓어올랐다.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묻겠습니다. 듣기론 아나클레토 추기경을 따르는 추문이 한둘이 아니라던데, 사실인가요?”

또박또박 던지는 소리에 아나클레토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통 모르겠군요.”

“이름을 밝힐 순 없으나 교국에서도 손꼽히게 고매하신 분께서 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도대체 어떤 추문인가 싶어 직접 찾아보았지요. 그랬더니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더러운 말들이 나오더군요. 이를테면 비셀스하임 소년 합창단이라던가.”

“…….”

“이래도 모르시겠습니까? 기어이 내 입을 더럽히실 작정인가요?”

어느새 미소 가신 아나클레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페기를 노려보며 주먹을 파르르 떤 그가 잠긴 목소리로 천천히 을렀다.

“그러시는 전하께선 한낱 헛소문으로 기어이 제 명예를 더럽힐 작정입니까? 고작 천한 하녀들이나 옮기고 다니는 낭설 따위로!”

“그리 명예를 잘 아시는 분이 내게는 어찌 그러셨나요?”

페기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아나클레토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예, 내 친부모라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느냐 물으셨지요. 당연히 아닙니다. 아나클레토 추기경을 뒤따르는 더러운 추문들이 낭설인 것처럼요.”

아나클레토가 씨근덕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클레멘스가 진심으로 가슴 아프다는 듯 가슴에 손을 올리며 위로를 건넸다.

“전하께서 그 문제로 얼마나 고통스러워하셨는지 여기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전하의 실추된 명예를 다시 세울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하겠습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적인 일에 바쁘신 손을 빌릴 순 없지요. 내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글리체리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끼어들었다.

“하오나 전하, 그런 자들은 끝을 모르는 무저갱처럼 간악하고 탐욕스럽습니다. 행여 전하께서 마음을 다치실까, 저는 그것이 저어됩니다.”

오랫동안 누미디아의 추기경이었던 그녀는 페기의 험한 어린 시절을 두 눈으로 보았다. 페기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년 전 내 출신을 문제 삼는 이들이 많았을 때, 나는 내전으로 숨었습니다. 성하께서 대신 그들과 맞서 주셨지요. 그럼에도 그런 자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당사자인 내가 피하기 급급했기 때문이라 봅니다. 내가 우습게 보인 거겠죠.”

“…….”

“그래서 이번에 확실히 본을 보이려 합니다.”

좌중은 고요했다. 페기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팔라디아 추기경의 후임은 기한을 넉넉히 잡아 후보자를 추천받겠습니다. 오늘 원탁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회의장에서 나오던 페기는 문 앞에 초조하게 서 있는 모드벤나를 발견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처리하고 있어야 할 이가 왜 아직도 여기 있나. 하지만 의구심은 잠깐이었다.

“전하, 그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들이라면.”

설마설마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모드벤나가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페기는 아연함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벨렘 성에서 성도 오스피나까진 종일 마차를 타고도 나흘은 걸렸다. 엊그제 성도로 올라오란 파발을 보냈으니, 정상적이라면 넉넉잡아 사나흘 뒤에나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벨렘 성주도 함께 올라왔습니다. 먼저 성주를 만나 경위를 여쭈어보시지요.”

페기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클레멘스가 기척도 없이 툭 튀어나왔다.

“전하! 오, 모드벤나 수도사도 있었군요. 마침 잘되었습니다. 다그마르 산에서 귀하게 난 찻잎을 운 좋게 얻었는데 가서 차 한잔하시지요. 글리체리아 추기경과 솔란지아 추기경도 함께하실 거랍니다.”

“내, 내가 언제 간다고 했습니까!”

이미 클레멘스와 한바탕했는지 솔란지아가 시뻘게진 얼굴로 외쳤다. 그런데 클레멘스가 문득 눈썹을 찌푸리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전하, 안색이 영 좋지 않으시군요. 혹 미편한 곳이라도 있으신지요?”

“추기경 예하. 전하께선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십니다. 차는 다음으로 하시죠.”

“오…. 바쁘시다니 어쩔 수 없지요. 말씀하신 그 다음에는 모드벤나 수도사도 꼭 오시길 바랍니다. 이래 봬도 차 끓이는 솜씨는 있으니, 고향의 차향을 몸소 대접해 드리지요.”

모드벤나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페기는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는 것처럼 경황없이 복도를 떠났다.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클레멘스가 묘한 미소로 지켜보았다.

접견실에는 이미 벨렘 성주가 도착해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창가를 서성이던 성주가 페기를 보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발치에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저, 전하! 모두 소신의 잘못입니다! 부디 아랫것들은 책하지 말아 주십시오!”

“…일어나세요.”

깊은 한숨을 내쉰 페기가 비틀비틀 소파에 앉았다. 주춤거리는 성주에게 말없이 맞은편 자리를 손짓하자, 성주가 초조한 기색으로 살그머니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페기는 지그시 눈을 감고 뻐근하게 아파 오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모드벤나가 대신 엄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성주님, 어찌 전하의 명도 없이 그자들을 이끌고 성도로 오셨습니까? 제가 분명 전하와 논의한 뒤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 그것이 실은 닷새 전에 추기경 인장이 찍힌 서신을 받았습니다.”

성주가 기다렸다는 듯 넙죽 서신을 내밀었다. 모드벤나는 심각한 얼굴로 서신을 읽었다. 조르멘디 남작 일행을 데리고 조속히 성도로 올라오라는 명령서였다.

“추기경 인장은… 확실하군요. 필체는 적어도 원탁 추기경들의 것은 아닙니다. 원탁에 들지 못한 추기경의 자필이거나, 다른 이가 대필한 것이겠지요.”

페기의 눈이 스르르 뜨였다. 깊게 가라앉은 보랏빛 눈이 성주를 비스듬히 향했다.

“조르멘디 남작 일행이 누구인지 성주도 충분히 짐작하리라 생각합니다.”

“예….”

“그럼 내가 왜 하필 벨렘 성에 그들을 맡겼는지도 아시겠군요.”

성주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 제가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가신이기 때문입니다.”

교국 최남단에 위치한 벨렘 성은 여덟 개의 지방으로 쪼개진 교국에서 카타리나 지방에 속했다. 비록 대면한 적은 거의 없으나, 공식적으로 그는 카타리나 공작의 가신이었다.

“맞아요. 또한 라발과 단교한 지 오래되어 벨렘 성을 오가는 이가 적으니, 비밀을 숨기기도 적절한 곳이라 여겼고요. 이 또한 잘 알고 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예….”

“그런데 어찌하여 한낱 무기명의 추기경 명령서에 움직이셨나요? 진정 저것이 내 명령이라 여긴 건가요?”

성주는 조촐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에 페기는 더 질책할 의욕도 잃었다. 성도에 제대로 된 연줄 하나 없이 시골에서 소일거리나 즐기던 범부를 믿은 제 잘못이었다. 그는 외부의 유혹에 빠질 만한 인물도 아니지만, 정체 모를 추기경의 명령을 거부할 만한 배짱도 없는 이였다.

페기는 스무 살 생일부터 숨 가쁘게 달려온 나날을 되짚으며 한숨을 집어삼켰다. 시간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영지를 둘러볼 시간도,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카타리나 공작을 대신해 영지를 보살펴 온 가신들을 파악할 시간도. 밀려드는 일거리에 치여 영지는 늘 뒷전이었다.

“명령서를 보낸 추기경이 누구인지, 혹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전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분도 딱히 없고… 교국에 커다란 행사가 있을 때나 가끔 먼발치에서 뵈었을 뿐입니다.”

“그자들은요. 수상한 낌새는 없던가요?”

성주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딱히 수상하다고 할 만한 건 없었고… 조르멘디 남작이 유독 집으로 편지를 자주 보내긴 했습니다. 듣기로는 아내의 몸이 좋지 않다고 하더군요.”

“편지요?”

페기와 시선을 주고받은 모드벤나가 신속히 물었다.

“집으로 보낸 것이 확실합니까?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시고요?”

“아유, 남의 편지 내용을 어찌 압니까. 애지중지 데려온 전서구를 쉼 없이 혹사시키기에 넌지시 물어보았더니, 아픈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라 하더군요.”

모드벤나가 심각한 얼굴이 되어 작게 속삭였다.

“…전하, 조르멘디 남작은 전서구를 소유할 만한 여력이 못 됩니다.”

훈련이 잘된 전서구는 웬만한 시골집 한 채 값이었다. 생활고로 집 안의 가구들마저 경매에 붙이고 있는 남작가가 감당할 만한 액수가 아니었다. 군 복무 경력이 일절 없는 조르멘디 남작이 손수 야생 비둘기를 잡아다 훈련시켰을 리도 만무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페기가 물었다.

“전서구가 남쪽으로 날아가던가요?”

“예…. 어느 모로 보나 라발 쪽으로 날아가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요.”

페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좌우지간 성도까지 올라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많이 피곤하시겠지만 교국의 정세가 어지러우니 오늘 떠나는 편이 낫겠지요.”

“지, 징계는 내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성주가 불안하게 목소리를 떨었다.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페기가 옅은 미소를 지어 올렸다.

“어찌 성주만 탓하겠습니까. 더 치밀하지 못했던 내 잘못도 있는 것을요.”

페기의 눈짓에 모드벤나가 성주에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얼결에 주머니를 받아 든 성주가 그 묵직함에 지레 놀랐다.

“아이고, 이렇게 많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받아 두세요. 내 성의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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