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야누비타 1세는 대단히 강력한 권능을 타고난 사도였다고 하더구나.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의 현신이란 점까지 예후르가 꼭 닮았지. 만약 그 아이가 뱀을 물리치고 오거든, 이번엔 야누비타의 현신이란 말이 돌지도 모르겠구나.”
“태양신에 야누비타에, 예후르도 별명이 참 많아요.”
“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는 뜻이지. 참 다행인 일이야. 그만하면 내 편히 뒤를 맡기고 눈을 감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소리 하지 마요.”
“이런, 내가 또 혼났구나.”
레오폴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느긋하게 앞서 걸어갔다. 오래지 않아 두 번째 초상화가 나타났다.
“제피린 2세구나.”
금발에 눈 코 입만 알아볼 수 있었던 야누비타 1세의 초상화와 달리, 제피린 2세의 초상화는 한결 상태가 나았다. 풍성한 적갈색 머리에 풍만한 몸집을 가진 중년 여인이 한가롭게 소파에 기대어 앉은 모습이었다.
“보면 볼수록 우리 제피린의 이름을 참 잘 지어 준 것 같단 말이야. 페기 네 보기엔 어떠하느냐. 정말 닮지 않았느냐.”
“그러네요.”
사실 페기는 레오폴트가 기르는 열댓 마리 고양이를 거의 구분하지 못했다. 귀가 예민한 그녀에겐 고양이 울음소리조차 버거운 것이었다.
“하지만 요 아이는 제피린을 하나도 닮질 않았단 말이지. 그렇다고 다른 고양이들을 닮은 것도 아니고…. 대체 네 아비는 누구란 말이냐.”
레오폴트가 잠든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중얼중얼 투덜거렸다. 페기가 작게 웃었다.
“제피린 2세도 남성 편력으로 유명한 교황이었잖아요. 이름뿐만 아니라 그런 점도 닮은 모양이죠.”
“어허. 우리 제피린이 얼마나 정숙한 고양이인데 그런 말을 하느냐?”
“정숙한 고양이가 아비 없는 새끼를 낳아요?”
페기가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레오폴트의 품에 안긴 새끼 고양이를 훔쳐보았다. 확실히 이 고양이는 제피린 2세와는 하나도 닮질 않았다.
“페기…. 네 말하는 것이 하루가 다르게 예후르와 닮아 가는구나. 그 못된 녀석. 동생한테 나쁜 영향이나 주고 말이야.”
레오폴트가 또 투덜투덜하며 모퉁이를 돌았다. 페기가 그의 뒤를 졸졸 따라붙었다.
“예후르는 자기가 레오한테 많이 배웠다고 하던걸요.”
“허튼소리! 그 녀석은 다섯 살부터 되바라지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아, 고양이 깨겠다.”
레오폴트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고 고양이가 칭얼대며 몸부림을 쳤다. 레오폴트가 화들짝 놀라 콩알만 한 고양이를 어르고 달랬다. 그러는 사이 세 번째 초상화를 지나쳤다. 뒤따라가던 페기가 의아하게 물었다.
“레오. 초상화 지나갔어요.”
“어, 어? 잘 안 보이는구나. 누구 초상화지?”
레오폴트가 고개를 쭉 빼며 눈을 가늘게 떴다. 페기는 초상화 아래 적힌 이름을 그대로 읊었다.
“단텔리오 7세네요. 라발의 공주에게 속아 광산 보유권을 넘겨준 사람이 이 사람이던가요?”
“그 멍청이는 단텔리오 8세란다. 단텔리오 7세는 그런 재미난 이야깃거리도 없는 사람이지.”
“그래서 그냥 넘어간다고요?”
레오폴트는 팔랑팔랑하며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페기는 스쳐 지나가는 초상화들을 꼽으며 물어봤지만, 레오폴트는 관심도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아이와 하나도 안 닮았지 않느냐.”
그에 페기도 닦달하는 것을 그만두고 얌전히 그의 뒤만 따랐다. 레오폴트가 겸연쩍은 기색으로 웅얼거렸다.
“실은 나도 편지를 옛날에 읽어서 옛 선조들의 이야기가 잘 기억나지 않는구나. 내 생각엔 그냥 이렇게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고 이런 전통이 만들어진 게야. 이런 때가 아니면 내 언제 너희들과 단둘이 조용한 시간을 보내겠느냐.”
“알았으니까 앞 똑바로 보세요. 부딪히겠다.”
레오폴트가 아이쿠 소리를 내며 모퉁이를 돌았다. 한숨을 삼키며 그를 뒤따르던 페기는 문득 우두커니 멈추어 선 레오폴트를 발견했다. 그는 벽에 걸린 초상화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페기는 초상화 아래 쓰인 글씨를 읽었다.
제네로사 5세.
“…맞아. 이렇게 생겼었지.”
마치 신음하는 듯한 속삭임이었다. 가면의 입가를 감싸 쥔 레오폴트가 조금 울먹거리며 말했다.
“페기, 이 사람이 바로 제네로사란다. 내 유일한 가족이자 스승이던 사람이지. 참으로 선량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냐.”
페기는 머뭇거리며 레오폴트의 옆에 섰다. 큼직한 액자 속엔 흑단 같은 머리채를 길게 늘어트린 여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내리깔린 눈빛이 선하면서 가는 턱선이 다소 유약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아주 고독한 사람이었지.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부모 같던 사도를 잃어, 탐보프에서 날 데려오기 전까진 쭉 혼자였단다. 그 동안 얼마나 외로웠던지, 아직 갓난아기였던 내 수발을 직접 들었다고 했어. 교황이 갓난애 똥 기저귀나 가는 모습을 네 상상할 수나 있겠느냐.”
레오폴트가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다.
“내 너희에게 베푼 애정은 그녀에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녀에게 받은 것을 똑같이 너희에게 주겠다고 다짐했건만, 결국 말뿐인 다짐이 되었구나. 그래, 난 여전히 흠결투성이야.”
“레오. 당신은 우리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주었어요.”
“아니다. 내 부족한 점은 내가 가장 잘 알아. 하늘에서 날 지켜보고 있을 제네로사도 한숨만 여러 번 쉬었겠지. 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이제 와 후회되는 일이 많구나.”
은 가면의 그림자 아래로 얼핏 연옥색 눈에 맺힌 눈물방울이 보였다. 페기는 속상한 마음에 입 안 여린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레오폴트는 정말로 그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다. 그의 몸이 이렇게 상한 것도 모두 저희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너희들은 늙은이가 아직도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아직도 제네로사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던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단다. 그래, 내가 첫 번째로 후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야. 그때 제네로사가 주는 반지를 받으면 안 되었는데. 제네로사는 그리 죽을 사람이 아니었어.”
다소 경황없이 말을 내뱉던 레오폴트가 홱 페기를 돌아보았다.
“그 반지, 아직 잘 있느냐?”
“아, 그거… 지금 예후르한테 있는데….”
페기가 얼결에 내뱉은 대답에 레오폴트는 오래간 말이 없었다. 페기가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
“잠깐 빌려준 거예요. 위험한 데 가니까 다치지 말라고.”
“…그래. 너에게 준 것이니 어떻게 사용하든 네 맘이겠지.”
“레오.”
페기의 손이 그의 팔뚝에 닿기 무섭게, 레오폴트가 소스라치며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얼결에 내쳐진 페기가 손을 감싸 쥐며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경악한 것은 레오폴트도 마찬가지였다.
“내,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레오, 난 그저….”
“한 번도 아니야, 수백 번, 수천 번도 더 넘게 말했다! 어찌 이토록 내 말을 듣질 않아! 너는 내 몸에 손대도 되는 자가 아니다. 절대 안 돼!”
난생처음 겪는 레오폴트의 분노였다. 그가 화내는 모습을 많이 보았지만, 그 화가 제게로 쏟아진 적은 없었다. 페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목을 열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주체할 길이 없었다.
“미안, 미안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내가 잘못했어요.”
쏟아지던 분노가 뚝 멈추었다. 황망히 그녀를 응시하던 레오폴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연옥색 눈이 자괴감으로 일그러졌다.
“…그만 돌아가자꾸나.”
페기는 두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목구멍으로 신물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어느새 차가워진 손끝을 비비며 회랑을 나서려던 그녀는 별안간 풀썩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쓰러진 레오폴트의 몸 위로 하얀 천이 나풀거리며 내려앉고 있었다.
페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레오?”
내전 곳곳마다 횃불이 올랐다. 비번인 근위대까지 모조리 불려 나와 철통같은 방어선을 세우자, 쥐새끼 한 마리 드나들지 못했다. 횃불 일렁이는 그들의 얼굴에는 미처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돋아 있었다.
레오폴트의 침실은 가장 정신없는 곳이었다. 근위대 단장과 부단장이 침실 앞에 떡 버티고 선 가운데, 의사 여러 명이 눈썹 휘날리게 방을 들락거렸다. 모두가 갓 벼린 칼처럼 예민하게 날이 서 있었다.
주치의는 자정을 넘기고서야 초췌한 얼굴로 침실을 나왔다. 그때껏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방문 앞을 서성이던 페기가 당장에 그의 옷자락을 잡아 쥐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네?”
주치의는 무언가 켕기는 기색으로 자꾸만 시선을 피했다. 순간 보이는 게 없어진 페기가 왈칵 노성을 터트렸다.
“의사잖아요, 뭔가 말을 해 보라고요! 어제만 해도 별일 아니랬잖아요!”
“…별일 아닌 게 아니었습니다.”
주치의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페기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별일 아닌 게 아니었다니?”
“서, 성하께선 특히 전하께는 말씀드리지 말라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괜히 걱정하실 거라며….”
그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페기는 마른침을 삼키며 더듬더듬 물었다.
“그럼… 그럼 지금 상태가 어떤 건데요. 뭘 말하지 말라고 했던 거냐고요.”
“여기 있으실 몸 상태가 아닙니다. 실은 적어도 5년 전부터 조용한 곳에서 요양하셔야 했어요. 나병은 계속 악화되고 있고, 선천적으로 약하셨던 폐도 요즘은 제 기능을 못 합니다. 고통을 참기 위해 3년 전부터 꾸준히 약을 쓰고 계신데, 그 때문에 기억력 감퇴도 나타나고 있어요. 아시잖습니까. 원래 더 영민하고 날카로운 분이셨다는 걸.”
페기는 가만히 숨만 몰아쉬었다. 당연히 안다. 모를 리가 있나. 본디 레오폴트는 수십 년 전 일도 선명히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오래전이라 하나, 제네로사의 편지를 그리 송두리째 잊어 먹을 사람이 아니었다.
페기는 이를 악물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저 나이를 먹어서 그렇겠거니, 오랜 병 때문이겠거니 가벼이 넘겨짚었던 나날이 이제와 죽도록 후회되었다.
“…언제쯤 깨어날까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대로 깨어나지 않는 건 아니죠?”
주치의는 말없이 고개만 떨구었다. 멍하니 그를 응시하던 페기가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레오폴트는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보아온 사람들 중에 가장 강했다. 잿더미만 남은 교국을 재건한 것도, 혼자서 네 명의 사도를 불러들인 것도 그였다. 이렇게 바람처럼 갈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