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보통 귀족들은 남의 하녀가 마음에 들면 대가를 지불하는데, 조르멘디 남작은 수중에 그만한 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페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드벤나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렇게 열다섯에 남작의 정부로 들어가 15년을 그의 곁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말이 정부지, 그리 부유하지 않은 남작가의 사정상 남작의 시중을 드는 하녀 역할도 겸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다가 5년 전, 남작가의 생계가 어려워지자 다른 하녀들과 함께 쫓겨나 인근 수녀원에서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 두 사람 다 내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을 텐데, 어떻게 나를 자기들의 딸이라 확신하는 거죠?”
페기가 대중들에게 맨얼굴을 보인 것은 아홉 살 생일이 마지막이었다. 지난 생일 연회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었지만, 난데없이 마귀가 난입하여 모두 없던 일이 되었다. 다 자란 그녀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내전의 하인 하녀들, 고위 성직자들과 근위대뿐이었다.
모드벤나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전하. 혹시 사피르란 음악 선생을 기억하시는지요?”
페기는 순간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설마….”
“내보낸 뒤로도 남작은 종종 외롭다며 셀린느를 불러들였다고 합니다. 개인 시중을 들던 사람이니 어디 외출할 때마다 데려가기도 했겠지요. 남작의 농장과 가까운 곳에 피아제 백작가의 본가가 있는데, 남작은 궁해질 때면 백작가에 사정해서 조금씩 돈을 빌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피르가 피아제 백작가에서 막내 따님을 가르치고 있던 것이고요.”
페기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웃음밖에 안 나오는 얘기였다. 하필이면 사피르가 거기 있던 것도, 하필 남작이 그날에 셀린느를 대동한 것도.
“혹시 몰라 사피르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도 조사 중입니다.”
“…그 사람은 내가 잘 알아요. 누군가를 해코지할 만한 사람이 못 돼요. 사도라면 특히나 더.”
순박한 붉은 머리 선생을 떠올리며 페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신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셀린느에게 절 닮았다 말해 준 것도 순수한 놀라움과 나름대로의 칭찬이었을 것이다.
“한 가지만 더 물을게요.”
“…….”
“나는 왜 버렸대요?”
모드벤나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예상한 질문이라는 듯 대답은 지체 없이 나왔다.
“저는 그 당시의 정황밖에 알지 못합니다. 카니나에서 남작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셀린느는 임신한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임신한 사실을 들키면 포주에게 맞아 죽을 테니 남작의 도움을 받아 몸을 숨겼고, 산달이 채 되지 않아 아기를 낳았다고 하더군요. 그녀의 말론 카니나에서 야반도주할 때 아기를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버린 게 아니라 잃어버렸다고.”
페기는 웃지 않았다. 웃음을 짓기엔 속이 너무나도 쓰렸다. 발에 채일 만큼 흔하면 버린 것이 되고, 고귀한 천사의 현신이면 잃어버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지금 어디 있죠?”
“벨렘 성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송구하오나 빨리 처리하셔야 합니다. 벌써 클레멘스 추기경과 아나클레토 추기경은 냄새를 맡은 듯하더군요.”
“그렇겠죠. 두 사람 다 눈과 귀가 밝으니.”
무표정한 얼굴로 고심하던 페기가 재차 입을 열었다.
“전서구를 보내 오스피나로 올라오라 하세요.”
“네.”
“모드벤나 수도사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그 둘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지금 이 시기를 노려 비밀리에 우리와 접촉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교국 정세에 능통한 사람의 솜씨에요. 라발 측 인사니 아무래도 클레멘스 추기경일 확률이 높겠지만 확실히 해 두는 편이 좋겠죠.”
고작 시골의 하급 귀족과 그의 정부였다. 정상적이라면 일찌감치 라발에서부터 소문이 퍼져 교국으로 전해지는 것이 맞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빗발치던 자칭 그녀의 친모들은 그러했다.
하지만 이자들은 아니었다. 일단 시기부터가 그랬다. 교국이 위태로운 때는 반대로 그들에겐 호기였다. 마귀에 더해 위험 부담을 늘릴 수 없는 교국으로선 최대한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그저 교국의 높은 분들을 만나게 해 달라 점잖게 요청할 뿐이었다. 이 치밀함을 보건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시 폭로할 방법도 다 짜여 있을 것이다. 이 모두를 계획하고 부리는 자가 있었다.
“그들이 오스피나에 당도하면 누구와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철저하게 감시하세요. 더 이상 휘둘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명심하겠습니다.”
모드벤나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페기는 애써 보고서에서 시선을 돌렸다.
카니나의 악취가 따라붙는 모든 것은 그녀의 약점이다. 그녀의 목을 죌 뿐만 아니라 레오폴트까지 힘들게 만들었다. 제게로 쏟아지는 손가락질이 무서워 마냥 레오폴트의 뒤에 숨었던 어린 시절은 지나갔다. 레오폴트는 쇠약해졌다. 더는 남의 몫까지 받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여기서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 약점은 지워 내야 마땅했다. 그것이 설령 친부모라 할지라도.
***
그날 밤, 고드릭이 시퍼레진 안색으로 그녀를 찾아왔다.
“전하! 성하를 좀 말려 주십시오!”
밤늦은 시간까지 서류를 일독하던 페기는 갑자기 제 발밑에 엎드리는 고드릭을 보고 당황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페기가 고드릭의 양손을 잡고 일으켜 주었다.
“고드릭. 대체 무슨 일이에요?”
“성하께서 지금 시간의 회랑에 계십니다! 저마저 시끄럽다며 쫓아내시곤 아무도 들이지 않고 계세요! 밤공기가 찬데 이러다 더 크게 앓으실까 두렵습니다. 부디 전하께서 성하를 설득해 주십시오!”
고드릭이 거의 흐느낄 기세로 간청했다. 페기는 알틴이 입혀 주는 외투에 팔을 꿰곤 내전으로 달려갔다.
시간의 회랑 앞에도 차마 들어가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근위대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급하게 소식을 듣고 달려왔는지, 미란테가 후줄근한 차림으로 회랑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전하.”
“미란테 경.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성하께서 시간의 회랑은 갑자기 왜….”
시간의 회랑은 역대 교황들의 초상화를 걸어 둔 곳이다. 미술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곳이었지만, 30년 전 라발의 침공으로 수백 점의 초상화가 모두 불타 사라졌다. 현재 회랑에 걸린 그림들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몇몇 교황들의 초상화를 한자리에 모아 둔 것에 불과했다.
“성하께서 기르시는 고양이 한 마리가 새끼들을 낳았다고 하더군요. 무슨 연유에선지 죄 죽고 하나만 살아남았는데, 그 새끼 고양이의 이름을 지어 주셔야 한다며 회랑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미란테의 담담한 설명에 페기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만약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안드레아였다면 쌍욕을 터트리며 길길이 날뛰었으리라.
“들어가 보시지요.”
미란테가 정중히 안내했다. 페기가 살짝 휘청거리며 회랑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이 닫히자, 드문드문 길을 밝히는 촛불만이 눈에 어른거렸다.
“…레오?”
가느다란 목소리가 정적 속으로 스며들었다. 오래지 않아 저 먼 곳에서 레오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기, 이리 오려무나.”
그제야 안심이 된 페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외투를 여미며 촛불을 따라 걸었다. 벽에는 오래전 교황들의 이름만 적혀 있을 뿐 초상화는 걸려 있지 않았다. 30년 전 불타 사라진 그림 말고는 남은 초상화가 없는 이들이었다.
그렇게 두어 번 모퉁이를 꺾자, 처음으로 걸린 초상화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레오폴트가 있었다. 그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페기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레오! 뭐하는 거예요, 여기서!”
“쉿, 쉿.”
레오폴트가 허둥지둥 검지를 가면에 붙였다. 그러곤 그의 품에서 잠든 새끼 고양이를 눈짓했다.
“막 잠들었단다. 깨우지 말렴.”
“도대체….”
망연히 그를 바라보던 페기가 소리 죽여 따지듯 쏘아붙였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어제도 기침 때문에 몸져누웠으면서 이 시간에 나돌아다니면 어떡해요. 다들 얼마나 걱정하는데…! 고드릭은 울었어요. 나만 해도 얼마나 놀랐는데요!”
점점 높아지는 노성에 레오폴트가 어쩔 줄 몰라 했다. 뒤척이는 새끼 고양이를 어르고 달래며 다급히 대꾸했다.
“미안하구나. 아주 중요한 일이라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단다.”
“고양이 이름은 나중에 지어 줘도 되잖아요. 왜 하필 오늘인데요!”
“고양이 때문이 아니야. 네게 들려줄 말이 있어서 그런 게지.”
페기의 입이 다물렸다. 노여움 가득하던 보랏빛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나한테 들려줄 말이라니요?”
“옛날에 제네로사가 해 준 말이 있단다. 사도가 어른이 되면, 더 나이든 자가 시간의 회랑을 돌며 옛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말이야. 제네로사는 어릴 적 혼자가 되어 그 이야기를 긴 유언으로만 들었지. 나 역시 제네로사를 너무 빨리 잃었단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제네로사가 서한으로 남긴 것을 훗날에 발견하여 읽었어.”
레오폴트는 연옥색 눈을 껌벅이며 느릿느릿 읊조렸다.
“나는 너희들이 혼자 되어 글로 전해 읽길 원하지 않았단다. 다행히 내 너희 셋이 다 클 때까진 살아남았지. 예후르와 안드레아에게도 해 준 일인데, 페기 네게도 당연히 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던 분노는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잦아들었다. 페기는 조금 아연해진 얼굴로 쭈뼛쭈뼛 사과했다.
“미안해요. 난 그런 줄도 모르고….”
“하는 김에 제피린의 딸에게 이름도 지어 주고 말이야.”
“레오.”
레오폴트가 웃음소리를 흘리며 첫 번째 초상화를 고갯짓했다. 못 말린다는 듯 따라 웃으며 페기는 그 옆으로 섰다.
“너도 잘 아는 야누비타 1세란다. 천 년 전, 뱀을 봉인한 사도지. 네 보기엔 어떠하느냐?”
페기는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회화는 교양 수준으로 배웠지만, 미술 애호가인 예후르 덕분에 대가들의 작품은 여럿 감상했다. 보는 눈은 나쁘지 않았다.
“천 년 전 그림이라기엔 보존이 잘됐네요.”
“네 눈이 정확하구나. 이건 모조품이란다. 진품은 30년 전에 불타 사라지고 말았지.”
레오폴트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차분했지만, 페기는 속으로 지레 찔렸다.
예후르가 남기고 간 라발과의 합의안은 아직도 그녀의 집무실 서랍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이미 예후르가 대리로 교황 인장을 찍은 상황이라 아무리 레오폴트여도 무르진 못할 테지만, 그 분노는 본인조차 감당하지 못할 것이었다. 알거든 이번에 또 쓰러질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