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328)

“대사가 이르길 빌헬미나 3세가 직접 친필 서한을 보낼 것이라 합니다. 미에투넨에서 아무리 빨리 달려도 두어 달은 걸리니 시급한 내용은 아닐 겁니다.”

“적당히 예의는 차리면서 은근히 압박하는 내용이겠지. 내 충분히 짐작한다.”

레오폴트가 둥글게 싸매어진 손을 힘없이 흔들었다.

“그보다 페기가 들으면 아니 되는 내용이 무엇이지? 그 아이도 이제 웬만한 업무에는 적응이 되었을 텐데.”

적막이 이어졌다.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던 모드벤나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실은 며칠 전에 투서가 한 장 들어왔습니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친부모라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다고….”

“뭐?”

살얼음 끼얹는 듯한 발언이었다. 페기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친부라 주장하는 자는 라발의 지방 귀족입니다.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중앙 정계와는 멀어진 지 오래된 남작 가문 출신으로, 대대로 물려받은 농장을 경영하며 귀족으로서의 생활을 근근이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친모라 주장하는 자는….”

“계속 말하시오.”

“…카니나 태생의 노예라 합니다.”

레오폴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교회는 오랫동안 노예제를 금하고 있었다. 천계율에서 엄금하는 사항인 만큼 발각되면 파문을 당할 수도 있는 중죄이나, 카니나만은 예외였다. 온 나라의 귀족들이 향락을 즐기러 떠나는 저 남쪽의 무법 도시에선 공공연히 노예를 사고팔았다.

“또 몸을 파는 여자라 하던가.”

레오폴트의 목소리엔 지친 기색이 다분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근 몇 년 잠잠했을 뿐, 페기의 친모라 주장하던 카니나의 창녀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지금껏 그 거짓된 폭로자들을 상대한 건 레오폴트였다.

“사창가에서 창녀의 시중을 들던 여자라 합니다. 그러다 카니나를 방문한 남작의 눈에 띄어 정부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허, 도대체가 늘 뻔한 이야기로군. 그런 사특한 거짓말쟁이에게 놀아날 여유는 없다. 한 번만 더 카타리나 공작의 명예를 더럽힌다면, 내 판결의 천사 발레론의 이름을 걸고 절대 용서치 않으리라 전하라.”

“하오나 성하. 제가 그자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모드벤나가 항변했다.

“만약 그들이 터무니없는 자들이었으면 제 선에서 끊어 냈겠지요.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그 자들의 얼굴이 꼭 카타리나 공작 전하와.”

“그만.”

레오폴트가 손을 들어 모드벤나의 말을 끊어 냈다. 그는 가면을 짚은 채 오래도록 침묵했다. 더디게 흘러가는 적막 사이사이로 끔찍한 고뇌의 흔적이 남았다.

“힘겹구나. 또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것이.”

“…….”

“페기는 외로움이 많은 아이지. 나도 열심히 노력했지만 부족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그 애가 착해서 말을 안 했을 뿐이지, 속으로 친부모를 그리워할 줄 누가 알겠어. 당연히 제 뿌리가 궁금하기도 하겠지.”

“성하….”

“자네가 보기엔 어떠하던가. 믿을 만한 자들이던가?”

레오폴트가 힘없이 물었다.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거리던 모드벤나가 제자리서 무릎을 꿇었다.

“제가 비록 다그마르 산맥 촌구석 출신이지만 사람을 가릴 줄은 압니다. 그자들은 결단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가 이토록 불안한 때 찾아온 것만 보아도 그들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멍하니 그녀를 내려다보던 레오폴트가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그래…. 또 일이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모두 내 탓이다. 내가 부족하여 내 사랑하는 아이에게 자꾸만 이런 일이 터지는 게지….”

“성하,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악인들의 행보가 어찌 성하의 탓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고드릭이 만류하는 말에도 레오폴트는 맥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위로는 되었다. 그보다 그자들의 신상을 파악해 보고를 올리도록, 쿨럭! 쿨럭!”

갑자기 레오폴트가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토할 듯이 기침했다. 고드릭이 놀라 사색이 된 얼굴로 의사를 불렀다. 난데없는 소란이 일었다.

페기는 그 모든 광경을 문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레오폴트가 괜찮은지 나가 봐 확인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도무지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격렬한 분노가 사지를 옥죄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에 손끝이 덜덜 떨렸다.

또다. 또 나를 걸고넘어지려 한다.

절 끌어내리려던 무수한 손길들을 피해 내전으로 숨어들었던 지난 날을 기억한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던 레오폴트의 한숨이 꼭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녀는 이미 카니나의 뒷골목을 벗어나 이곳에 있는데, 아직도 걸핏하면 카니나의 악취에 발목이 잡혔다.

지금까진 제 탓인 줄만 알았다. 카니나에서 났으니 카니나의 악취가 따라붙는 건 자연한 이치라고.

그러나 이제 알겠다. 카니나의 악취는 아직도 그 구렁텅이에 있는 자들에게서 나는 것이었다. 홀로 카니나를 벗어난 내가 밉고 증오스러워, 날 그곳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이다.

페기는 이를 까득 갈았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무서워 내전으로 숨어들었던 어린애는 이제 없다. 이번엔 결코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

다행히 레오폴트는 별일 아니었다. 몇 년 사이 폐가 약해져 잔기침이 늘어난 상태였다. 주치의는 앞으로도 조심해야 한다며 수없이 휴식을 권했다.

레오폴트가 기사에게 거의 업히다시피 하여 돌아가자, 페기는 모드벤나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나한테도 줘요. 그 사람들의 신상 내역.”

“…들으셨습니까?”

모드벤나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페기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내 일이에요. 나도 알아야 하잖아요.”

“전하께서 개입하시면 모양새가 나빠집니다.”

“지금까지 모양새 좋게 해결된 적이나 있나요? 그런 사람들, 나도 지겹도록 겪었어요.”

“하지만….”

“성하께서 아프시잖아요.”

그 말에 모드벤나가 착잡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로 한 발짝 다가간 페기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도 이제 마냥 어린애는 아니에요. 성하의 짐을 덜어 드리고 싶어요. 당신도 이게 옳은 방향이라는 걸 알잖아요.”

예후르도 자리를 비운 상황에 레오폴트마저 다시 쓰러지거든 교국의 진정한 위기였다. 성궁에 모여 있는 원탁 추기경들부터가 임자 없는 권력을 잡겠답시고 난동을 부릴 것이었다. 갓 성인이 된 카타리나 공작 따위는 그들의 안중에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작성이 완성되는 대로 보내드리지요.”

“성하께는 보내지 마요.”

페기가 단호하게 말했다. 탐탁지 않은 듯 망설이던 모드벤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실려 나가는 레오폴트를 두 눈으로 목격하니 그녀도 생각이 많아지는 듯했다.

모드벤나와 헤어진 뒤, 페기는 계획대로 식당에 갔다. 차라는 거대한 식탁을 홀로 지키며 무언가 열심히 끼적거리고 있었다.

“뭐하니?”

“신학 선생님이 천계율 이백 번째 장까지 다 베껴 오라고 해서…. 어라, 레오는?”

“몸이 안 좋아서 먼저 들어갔어.”

페기는 차라의 맞은편에 앉아 시종에게 이만 식사를 들이라고 명했다. 차라가 조용히 깃펜을 내려놓았다.

“…많이 안 좋아?”

“응?”

페기는 차라의 얼굴을 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차라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웠다.

그러고 보면 차라는 레오폴트가 병환으로 앓아누울 때마다 안절부절못했다. 주변에서 만류하는데도 굳이 잠든 레오폴트 옆에 앉아 코 밑에 손을 대 보곤 했다. 건강한 부모 밑에서 평범하게 살아온 열다섯 소년에겐 아직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괜찮아. 안드레아도 그랬는걸. 레오는 자기 어릴 때부터 골골댔다고. 저러면서 100살까지 살 거야.”

“왜 하필 그 망나니 말이야.”

차라는 투덜대면서도 한 시름 놓은 기색이었다. 샐러드를 푹 찍어 먹은 그가 흘끗 눈을 들어 페기를 보았다.

“있잖아. 이번엔 내가 레오를 간호해도 돼?”

“…….”

“아니, 요즘 너도 바쁘고 하니까….”

“물론 되지. 굳이 나한테 물어보지 않아도 돼.”

“하지만….”

포크로 샐러드를 뒤집어 놓은 차라가 좌우를 살피곤 소리 죽여 물었다.

“혹시 내가 옆에서 알짱거리면 레오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레오가?”

“나 있을 땐 아무리 몸이 안 좋아도 가면을 안 벗는단 말이야. 얼마나 불편하겠어.”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페기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차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차라. 나도 레오의 맨얼굴은 본 적이 없어.”

“뭐? 진짜?”

“내 앞에서도 가면을 벗지 않으니까…. 안드레아도 못 봤댔어. 예후르는 잘 모르겠지만.”

고양이처럼 삐죽 솟은 눈을 끔벅끔벅한 차라가 샐러드를 한 움큼 집어 먹었다. 왜인지 아까보다 기운찬 손놀림이었다.

“흐음, 그럼 내가 간호해도 되는 거지? 오늘부터 바쁠 예정이니까 신학 수업은 모조리 취소해야겠다.”

차라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딱하기도 했다. 페기는 하녀를 시켜 차라의 잔에 물을 따라 주었다. 하녀의 얼굴을 확인한 차라가 의아하게 물었다.

“오늘은 걔가 아니네? 너한테 알랑방귀 잘 뀌는 애. 맨날 옆에 끼고 다녔잖아.”

“…알틴 말하는 거야?”

페기가 의아한 눈으로 하녀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알틴은 어디 있니? 아까부터 보이지 않던데.”

“오늘 몸이 안 좋아서 하루 쉰다고 했어요. 어제 전하께 따로 허락을 구했다고 하던걸요.”

“뭐야. 거짓말한 거야?”

차라의 가시 돋친 말에 페기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들었던 것 같아.”

“어제 일도 그렇게 깜빡깜빡 잊으면 어떡해.”

“요새 바빠서 그런가 봐. 식사하렴. 시금치 빼먹지 말고.”

페기의 지적에 차라가 얼굴을 구기며 싫증을 냈다. 페기는 물을 마시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틴이 나쁜 마음으로 거짓말할 아이는 아니다. 아마 정말로 몸이 안 좋은 모양이니, 약이라도 보내 주어야겠다.

태양이 하늘 높이 오른 정오에도 알틴의 방은 어슴푸레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닥에 널린 쓰레기들과 정리되지 않은 물건은 솜씨 좋게 어둠에 가려져 있다. 방 안을 맴도는 건 어젯밤 정사의 비릿한 냄새와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뿐이었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실처럼 드리워지는 햇빛에 알틴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결에 고개를 흔들던 그녀는 창가에서 돌아눕자 겨우 편안해졌다. 그러나 설핏 깨어났던 정신이 다시 까무룩 잠들려던 걸 방해하는 손길이 있었다.

시작은 이불이 흘러내려 맨살이 그대로 드러난 어깨였다. 간질이듯 닿을락 말락 한 접촉이 팔뚝으로 서서히 내려갔다. 알틴이 신경질적으로 팔을 끌어당기자 손길은 더욱 대범해졌다. 군살 없는 허리로 미끄러진 손끝이 점점 더 은밀한 곳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 진짜! 하지 말라니까!”

“이제 일어나야지. 하녀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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