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기.”
예후르는 심란한 표정으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장신구를 잘 착용하지 않는 페기가 매일같이 끼고 다니던 것이었다. 습관적으로 반지를 매만지던 그녀의 모습을, 아닌 척 넌지시 반지를 보며 그리움에 잠기던 레오폴트의 모습을 그도 다 알고 있었다.
“빌려주는 거야. 나중에 돌려주면 되잖아.”
다소 성급하게 말을 내뱉은 페기가 입 안의 여린 살을 콱 깨물었다. 목구멍이 덜덜 떨렸다. 눈가가 홧홧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다치지 마.”
“…….”
“제발 무사히 돌아와 줘.”
아직도 눈을 감으면 마귀에게 먹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졸도한 레오폴트에게 다가가던 마귀를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제 눈앞에서 벌어지던 마귀의 끔찍한 아가리가 예후르를 향할 생각을 하니, 차라리 자신이 마귀와 대적하고 싶어졌다.
문득, 예후르가 그녀에게 잡힌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엔 반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반지에 입술을 깊게 눌렀다.
“약속할게.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고.”
고요히 내리깔린 금안 위로 풍성한 속눈썹이 그늘을 그렸다.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던 페기는 불현듯 제 눈가에 와 닿는 그의 손길을 느꼈다. 흠칫 놀라는 그녀에게 예후르는 착잡한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 울지 마. 네가 울면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조심스레 와 닿았던 것처럼 그의 손길은 기척 없이 떠나갔다. 페기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오도카니 바라보았다. 저 멀리로 붉은 노을빛 머금은 백룡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가 떠나고 있었다.
그 뒷모습에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그를 배웅하는 건 이번에 처음이 아님에도. 예전에는 그가 돌아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면, 이제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며 하루하루 눈물로 지새울 것이었다. 지금은 무사할까. 돌아올 수 있을까. 돌아오긴 할까.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또 던지며.
하지만 눈물로 절망하는 이유는 그가 제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에겐 세도파가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진 않아도 그녀는 약속된 그의 동반자였다. 평생토록 그의 옆은 세도파가 지킬 것이고, 저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그들의 뒤만 따를 것이다. 제게 허락된 선은 거기까지였다. 행여 구렁텅이로 내쳐질까 페기는 그 선을 넘을 용기도 없었다.
왜냐하면, 제겐 그밖에 없으니까.
레오폴트는 오래 살지 못한다. 안드레아는 이미 이곳을 떠났다. 차라는 성궁을 떠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달리 성 밖을 모르고 성 밖이 두려운 그녀는 성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안에는 영원히 이곳을 떠나지 않을 예후르가 있었다.
그가 애틋하다. 하지만 애틋하기 이전에 그가 필요했다. 다시는 외톨이로 남기 싫어 구질구질해져도 그의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 그녀가 아는 세상은 악취 나는 카니나의 뒷골목과 여기뿐이었으니.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카니나를 제하면 결국은 여기뿐이지 않나.
그러나 너는 돌아와도 나를 떠날 것이고, 나는 떠나는 너를 붙잡지 못할 것이다. 점점 멀어지는 너의 그림자만 졸졸 따라다니며, 적선하듯 내어 주는 너의 애정으로 갈증을 채우고 구차하게 삶을 이어 갈 것이다. 쓰레기더미를 뒤지고 다니던 시궁쥐는 뒷골목을 벗어나서도 결국은 시궁쥐인 것처럼.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지겹도록 따라붙는 카니나의 굴레에서 이만 해방되고 싶었다. 지금껏 사랑으로 충만했던 둥지가 꼭 변해야 하는 이유는 없지 않나. 꼭 그렇게 나 혼자만 남겨져야 하는 이유도.
만약 예후르가 내게로 돌아온다면, 지금처럼 행복하지 않을까.
페기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떼었다. 서서히 달음박질했다. 어느새 용에 올라탄 예후르가 고삐를 죄고 있었다. 달려오는 그녀를 발견한 예후르가 날갯짓하던 용을 달래며 다시 땅으로 내려앉았다. 휘몰아치는 바람 속으로 페기가 뛰어들었다.
용의 등에 올라탄 예후르가 허리를 굽혀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페기는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날 데려왔잖아.
“예후르.”
나에겐 너뿐인데.
“좋아해.”
날 버리지 마.
역광이 드리워진 그의 표정을 알아볼 수가 없다. 눈썹이 움직인 것도 같고, 입술이 달싹인 것도 같았다. 잠잠한 침묵만이 분명했다.
불현듯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러곤 고개를 내려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알아.”
바람이 일어났다. 부질없이 떠나간 그의 손길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페기는 하늘 저 높은 곳으로 날아가는 용의 뒷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노을이 지나간 자리에 어둠이 내리고 밤이 시작되었다.
***
예후르가 떠난 뒤 불안감에 휩싸였던 성궁은 곧 안정을 되찾았다. 연회장에서 졸도한 이후 칩거하던 레오폴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덕분이다.
“뭐가 걱정이에요. 성궁엔 사도가 셋이나 계신 데다, 마귀도 불태우는 성화가 버젓이 타오르고 있는데.”
그 말대로 한 차례 마귀를 완전히 퇴치한 성궁은 도리어 마귀로부터 가장 안전한 지역이 되었다. 사도와 성화의 힘을 의심하던 사람들도 원탁 추기경들이 교구로 돌아가지 않고 성궁에 눌러앉자 의심을 거두었다.
게다가 완벽한 천사의 현신이라 추앙받는 수사의 예후르가 마귀를 무찌르러 떠났으니, 평화의 시대가 머지않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페기는 그들의 지나친 낙관에 회의적이었다. 간간히 예후르가 보내오는 편지에는 위급함도 없지만 희망을 가질 만한 요소도 없었다. 뱀은 여전히 행적이 묘연했고, 마귀의 피해는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에겐 뱀의 꼬리가 잡혔다고 알려야 했다.
천계율 스물두 번째 장. 말과 행동과 마음을 일치시켜라.
언젠가 클레멘스를 비판할 때 인용했던 말을 떠올리며 페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은 저도 이렇게 되었다. 천계율에 비추어 한 점 부끄러움 없었던 두어 달 전의 자신이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페기는 집무실에서 나와 레오폴트의 침실로 향했다. 간간히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곤 있으나 레오폴트는 여전히 휴식이 시급한 환자였다. 그녀를 안심시키겠답시고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매일 올라오는 주치의의 보고는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페기가 문 앞에 서자 시종이 목청을 높였다.
“성하.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뭐? 벌써? 들라 하여라.”
서서히 문이 열렸다. 무심하게 고개를 들던 페기가 문틈으로 보이는 광경에 멈칫했다. 문가를 등지고 앉은 레오폴트에게 고드릭이 조심스레 가면을 씌워 주고 있었다. 문이 활짝 열렸음에도 페기는 미동하지 않았다.
먼저 그녀를 발견한 고드릭이 허리를 숙여 무어라 속삭였다. 가면이 불편한지 이리저리 매만지던 레오폴트가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은 가면을 보고 페기가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레오.”
“오, 페기. 어서 들어오려무나.”
레오폴트가 두 팔 벌려 환영했다. 페기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행히 오늘은 그의 상태가 나쁘지 않은 듯했다.
“어젯밤 잠은 잘 잤어요?”
“그럼. 백일 지난 아기처럼 잘 잤지. 너는 오늘 기분이 어떠하느냐?”
“저야 늘 좋죠.”
둘은 평범한 아침 인사를 더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드릭이 익숙하게 레오폴트를 부축하자, 페기는 그의 느린 속도에 맞추어 옆에서 걸었다. 목적지는 교황의 성좌가 있는 심판의 방이었다.
연회장처럼 넓은 심판의 방에는 모드벤나 혼자 오도카니 서 있었다. 특유의 꼿꼿한 자세로 벽에 걸린 종교화를 감상하던 그녀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교황 성하와 카타리나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그만 일어나시오.”
레오폴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단을 올라 성좌에 앉았다. 돌을 깎아 만든 성좌에 마치 흰 이불이 너저분하게 걸린 듯했다. 그의 숨이 가라앉을 때까지 모두가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레오폴트가 느릿느릿 물었다.
“그래. 오늘은 중요하게 들어야 하는 일이 있는가?”
“통상적인 보고입니다.”
“다행이군. 시작하게.”
“저, 그것이….”
모드벤나가 난처한 기색으로 페기를 힐끗거렸다. 그녀의 눈길을 알아챈 레오폴트가 여상한 체 페기에게 말을 걸었다.
“먼저 차라와 식사하고 있겠느냐? 그 아이, 또 우리가 늦게 와서 배가 많이 고프다고 칭얼거릴 것 같구나.”
“…곁방에서 책을 읽고 있을게요. 하루 한 번, 식사는 꼭 같이 하기로 했잖아요.”
페기가 당혹감을 감추며 그린 듯이 웃었다. 레오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드릭과 하녀들에게 그녀를 챙겨 주라 일렀다.
성좌 뒤편, 붉은 융단으로 가려진 벽에는 비밀리에 마련된 곁방이 하나 있었다. 하녀에게 건네받은 책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고드릭이 문을 닫았다. 뒤이어 융단을 다시 드리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페기는 책을 내려놓고 살금살금 문가로 걸어갔다. 문을 살짝 열자, 드리워진 융단 사이로 성좌의 뒷모습이 보였다. 보고를 올리는 모드벤나의 목소리가 실낱같이 들려왔다.
“성직자들의 동요는 잦아들고 있습니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몸소 출전하신 데에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안도하는 이들도 적잖습니다. 성궁에 남아 계신 원탁 추기경들께서 동요를 막는 데 큰 몫을 해 주고 계시고요.”
“외교 서한은 문제없이 잘 전달했나?”
“네. 원래부터 마귀 사태를 알고 있던 라발이야 문제 될 소지가 없고, 세잔은 라발과 한 몸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리누스 도시 연합의 군소 국가들도 큰 반발 없이 방위를 강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답했습니다. 문제는….”
“탐보프겠지.”
레오폴트의 목소리에 피곤함이 역력했다.
“아나클레토나 솔란지아는 별말이 없던가? 우리가 라발과 은밀히 공조했다는 걸 알고 가만있을 작자들이 아닌데.”
“이미 지나간 파도입니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적당히 눌러 두고 가셨으니 괘념치 마십시오.”
“그나마 다행이군. 탐보프 대사는 뭐라고 하던가?”
“과히 좋아 보이는 기색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쪽은 잠잠할 테니 염려 놓으십시오. 대사의 호위 기사가 중앙 부처 수도사에게 뇌물을 건넸다는 정황이 발각되어 당분간 몸을 사릴 겁니다.”
“허… 내 칩거해 있는 동안 별 해괴한 일이 다 있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