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후르가 손을 들어 눈가에 얹었다.
“그러지 말고 페기를 불러와서 직접 묻지 그래.”
“뭐?”
“네 말은 지금 내가 원하는 쪽으로 그 애가 미래를 선택하길 유도했다는 거잖아. 한번 페기 앞에서도 그렇게 말해 봐. 페기가 무슨 말을 할지 보자고.”
안드레아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예후르가 피식 건조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 애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본 적도 없으면서 참 쉽게 말하는구나. 원탁에 앉은 건 온전한 페기의 선택이야. 그 애가 무슨 생각으로 거기에 앉았을지 너는 짐작도 안 되지.”
“…교묘하게 말을 돌리는데.”
팔짱을 낀 채 혀로 볼을 둥글게 부풀리던 안드레아가 건들거리며 말했다.
“그거 나한테 안 통해. 내가 그 수작에 얼마나 당했는 줄 아냐?”
“…….”
“그리고 내가 짜증 나는 건 페기가 네 옆에 있기로 결정한 탓이 아니야. 아, 물론 그것도 짜증 나긴 하는데 더 짜증 나는 게 있단 거지. 다르게 살아갈 길도 있다는 걸 네가 의도적으로 숨긴 거잖아.”
성큼성큼 다가온 안드레아가 양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예후르 쪽으로 낮게 몸을 기울였다.
“정상적인 사람이면 애가 바깥 좀 무서워한다고 평생 갇혀 살게는 안 해. 영감님이야 당한 게 있으니 그럴 만하다고 보지만, 새끼야, 너는 그러면 안 되지. 그러면서 너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쏙 빠지려 들어? 허?”
페기는 더 이상 성 밖이 무섭다며 훌쩍거리던 아홉 살 어린애가 아니었다. 아직도 성 밖이 두려워 질겁할 정도면 차라와 봄나들이는 꿈도 못 꿨을 것이다. 신뢰하는 누군가가 옆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고, 아름다운 곳을 골라 보여 주었으면 어린 시절의 막연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후르는 그러지 않았다. 페기의 마음을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는 이가 그것만은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페기가 너 이러는 거 아냐? 약혼녀한테 그따위로 말하는 건 알아? 모르겠지. 모르니까 아직도 널 졸졸 따라다니는 거겠지.”
안드레아가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예후르가 힘없이 질질 끌려왔다.
“그럼 이건 어때?”
그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안드레아가 입술을 쭉 찢어 웃었다.
“네가 마귀를 잡으러 간 동안 나는 페기를 데리고 이곳저곳 다녀오는 거야. 그다음에 페기한테 다시 결정하라고 하면….”
턱, 그녀의 손목이 잡혔다. 물끄러미 제 손목을 내려다보던 안드레아가 천천히 그의 멱살에서 손을 뗐다. 그럼에도 꽉 잡힌 손목은 그대로였다.
“…페기한테 허튼짓하지 마.”
예후르가 음산하게 속삭였다.
“페기는 너처럼 의무를 내팽개치는 방종한 사도가 아니야. 세상을 알려 준답시고 더러운 뒷골목 헤매고 다닐 꼴을 내가 용납하리라 생각해?”
안드레아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붉은 입술이 움찔거리며 열렸다.
“눈깔 돌아갔어, 새끼야.”
순간 예후르의 눈이 흔들렸다. 그 틈에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 안드레아가 뻐근한 손목을 문지르며 인상을 썼다.
“그래. 나야 뒷골목 하수구나 헤매고 다니는 년이니 페기한테 아무런 도움도 안 되겠지.”
“…….”
“그런데 넌 아니잖아.”
그녀는 거들떠도 안 보던 아름다운 숲속을 그는 보여 줄 수 있으리라. 시인들이 영감을 얻고 화가들이 환희를 느끼는 자연 그대로를 그라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걸 다 보고도 네 곁으로 돌아온다면, 지가 지 인생 꼬는 거니 내가 더 뭐라고 하겠냐. 그것참 대단한 순정이구나, 하고 비웃고 말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안드레아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니 한번 데리고 돌아다녀 봐. 혹시 알아? 그러고도 네 옆에 남을지.”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예후르가 마른세수를 하며 낮게 읊조렸다. 안드레아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넌 그 애가 가장 원하는 걸 주지 않을 거잖아.”
예후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발치만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안드레아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발걸음을 돌렸다.
“페기한테 너무 상처 주지 마라. 너 나중에 진짜 후회한다. 내가 페기를 좋아하는 것보다 널 싫어하는 게 큰데도 굳이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서 이런 말까지 해 주잖냐. 제발 좀 귀담아들어라.”
쿵, 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깊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대로 굳은 것처럼 발치만 내려다보던 예후르가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둠에 잠긴 금안이 텅 빈 듯 쓸쓸했다.
***
페기가 여섯 살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이다.
낳아 준 부모도 모른 채 시궁쥐처럼 쓰레기더미를 전전하던 그녀는 어느 날 텅 빈 골목에서 장중한 음악 소리를 들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듯, 땅에서 솟아오르듯 웅장한 소리에 겁을 집어먹은 그녀는 엉금엉금 쓰레기통 속으로 숨어들었다. 정체 모를 높으신 분의 분노가 빨리 지나가길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한낮 뙤약볕 아래의 쓰레기통은 참으로 견디기 고역인 곳이었다. 발아래선 끔찍한 악취가 올라오고, 머리 위에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열기가 쏟아졌다. 페기는 악취의 울렁거림과 열기의 현기증을 간신히 견디고 있었다. 오래간 굶어 쇠약해진 몸이 서서히 기울어졌다.
그때, 머리 위에서 한 줄기 빛이 스며들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빛 사이로 손이 내밀어졌다. 페기는 멍하니 그 손을 붙잡았다.
그것이 예후르와의 첫 만남이었다.
새로운 사도가 각성하거든 다른 사도가 예지를 받아 그를 데리러 가는 것이 관례라 했다. 레오폴트가 예후르와 안드레아를 데려왔듯, 그녀는 예후르가 데려온 것이었다.
그의 손을 잡고 카니나의 양지로, 성스러운 불의 도시 오스피나로. 갓 태어난 아기가 어미 뒤만 졸졸 따라다니듯 예후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예후르는 그런 그녀를 한 번도 내친 적이 없었다. 제 뒤만 졸졸 따라붙는 어린애가 귀찮을 법도 하건만, 늘 다정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 주고 무릎 위에 앉혀 글을 가르쳐 주었다.
누구에게도 받아 본 적 없는 그 다정함이 좋았다. 상냥한 눈길에, 매일같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부드러운 손길에 목이 멨다.
어쩌면 태어나 너무 오랫동안 외로웠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 온기에 목말랐던 그녀에게 예후르는 끝없는 애정의 바다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애정을 받아 마시며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고 성장을 느꼈다. 쓰레기더미를 헤집어 다니던 시궁쥐가 사람 꼴이 된 것은 모두 그의 덕이었다.
그러니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닐까. 나를 살아가게 하고, 나를 숨 쉴 수 있게 하는 건 모두 그의 곁에 있으니.
바람에 휘청거리는 들풀을 손끝으로 느끼던 페기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어느덧 서쪽에서 노을이 몰려오는 때였다.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미끄러지듯 시선을 내렸다. 언제부터 보고 있던 것인지, 예후르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짙은 호박색 눈이 매끄럽게 휘어진다. 페기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잘 모르겠다. 어쩌면 울상이 되었는지도.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고 있어.”
예후르가 느긋하게 말을 붙여 왔다. 페기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붉은 노을 아래 명암이 뚜렷한 얼굴은 어느덧 완연한 성인의 모습이었다. 조금 전까지 떠올렸던 여린 소년 시절의 얼굴이 그 위로 흐릿하게 겹쳐졌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서.”
예상치 못한 듯 눈썹을 올린 그가 풀어지듯 웃었다.
“벌써 오래전 일이구나…. 그때 넌 굉장히 작았는데.”
어린 시절의 키를 가늠하듯 명치 아래를 재 보던 예후르가 불현듯 페기의 머리 위로 손을 턱 올렸다.
“아직도 작네.”
“하, 하지 마.”
페기는 뒷걸음질로 얼른 그의 손아래서 빠져나왔다.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는데, 때마침 불어온 바람으로 죄 무용지물이 되었다. 예후르의 맑은 웃음소리가 바람결에 실렸다.
바람이 멈춘 사위는 다시 적요해졌다. 페기의 입가에 간신히 걸려 있던 미소도 흔적 없이 허물어졌다. 페기는 떨리는 눈으로 그의 발치를 응시했다.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했다. 숨을 들이쉬는 게 힘겨웠다.
“…걱정돼.”
예후르는 살짝 입술을 벌렸다. 그가 빠르게 대답했다.
“모드벤나와 고드릭에게 말을 전해 뒀어. 어렵지 않게 널 옆에서 보필해 줄 거야. 급한 일은 내가 다 마무리 짓고 가는 거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페기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든 절 달래려 애쓰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네가 걱정돼, 예후르.”
웃음은 어느새 울음으로 변했다. 우는 듯 웃는 듯 이상한 표정으로 페기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게끔 의연한 모습을 보여 주려 했는데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뱀인걸. 한 번도 실패한 적 없고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그지만, 상대는 옛 신화 속 존재인데. 성궁을 떠날 때면 언제까지 돌아오겠다 늘 약속하던 그가 이번만은 그런 말이 없었다. 허튼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니 본인조차 돌아올 날을 기약하지 못하는 여정이리라.
피가 배어 나올 만치 입술을 짓씹던 페기가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곤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손을 들어 반지를 쥐여 주었다. 반지를 확인한 예후르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가운데 자수정이 박힌 모양새가 눈에 익었다. 페기가 늘 끼고 다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유래가 남다르기도 했다. 용병대의 칼날에 목이 잘려 죽은 선대 교황, 제네로사 5세의 유품이었기 때문이다.
듣기론 제네로사 역시 그 전대 교황에게 물려받아 소중히 간직하던 것이었다. 그러다 라발의 용병대가 앙겔리카 성궁을 짓밟고 들어온 순간 어린 레오폴트에게 주었다. 이것은 수호의 반지란다, 너를 지켜 줄 거야, 하고 속삭이며.
그 말대로 레오폴트는 죽지 않았다. 죽은 것은 반지를 물려준 제네로사 5세였다. 눈앞에서 죽은 그녀를 아직도 그리워하듯 레오폴트는 그녀의 유품인 반지도 몹시 아꼈는데, 악몽으로 잠 못 이루던 어린 페기에게 어느 날 선물로 주었다.
“난 괜찮아. 이제 악몽도 잘 꾸지 않으니까.”
그의 손을 부여잡고 페기가 느릿느릿 속삭였다.
“내가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 가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