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328)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곧 교황이 되실 분께서 왜 그런 험지에 가셔야 하나요! 전하가 아니고도 사도는 많잖아요!”

텅 빈 복도에 세도파의 절규가 쩌렁쩌렁 울렸다. 골이 울리는지 예후르는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이번 일에 나보다 더 적합한 사도는 없습니다. 누가 강요한 게 아니라 내 스스로 결정한 일이에요.”

“어떻게… 어떻게 절 두고 그러실 수가….”

세도파의 두 눈에 절망감이 어렸다. 예후르가 쓰게 웃으며 제 옷자락을 쥔 세도파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미리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합니다. 밖으로 유출되면 안 되는 이야기라 어쩔 수 없었어요.”

“돌아오실 거죠…?”

“물론입니다.”

예후르가 단정하게 웃었다. 멍하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세도파가 고개를 내렸다. 그의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돌아오시면 바로 저와 결혼하시겠다고.”

그의 얼굴에서 설핏 미소가 가셨다. 고집스럽게 정면을 응시한 채 세도파가 말을 이었다.

“저번에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생일이 지나면 우리 결혼을 논의해 보자고. 공작 전하의 생일이 지난 지 열흘이 넘었는데 저한텐 연락 한 번 없으셨죠.”

“일이 많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시종을 보내 안부 정도는 물으셨을 수도 있잖아요. 그날 저도 연회장에 있었어요. 제가 어디 다치진 않았는지, 무사한지, 걱정도 안 되시던가요? 전 전하의 약혼녀예요! 곧 결혼할 사람을 어찌 이런 식으로….”

예후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움찔한 세도파가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어슴푸레한 불빛이 그의 피로감을 깊숙하게 비추었다. 세도파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한테 실망하셨나요?”

“기대가 있어야 실망을 하죠.”

마치 남 일 얘기하듯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세도파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혀끝으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만약 결혼이 늦어져 초조한 거라면, 파혼하고 다른 약혼자를 찾아도 괜찮습니다.”

“네?!”

날카로운 반문이 귀청을 찢었다. 예후르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혹시 그런 걱정이 있다면 내 입장은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는 얘기에요. 영애라면 지금도 좋은 약혼자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전하께선 저와 파혼해도 괜찮다는 말씀이신가요?”

“약혼은 양자의 합의가 있어야 유지되는 관계죠. 내 사정으로 결혼이 미뤄지고 있고 영애는 지금 상황에 몹시 불만이 많은 것 같으니 선택권을 주는 겁니다.”

세도파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벙어리처럼 입술만 벙긋거리던 그녀가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전하께선 왜 저와 약혼하셨나요?”

오랫동안 묻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올 대답이 두려워 참고, 그가 다정하게 대해 줄 때면 헛된 의심이라 치부하며 또 참았다. 하지만 오래전 마음속에서 싹튼 의혹은 이미 곪아 터지고 있었다.

“절 사랑하지 않으시는 건 알아요. 그렇지만 사랑이 아니더라도 제게 어떤 감정은 있으실 거 아니에요. 그러니 그 많고 많던 후보자들 가운데 절 선택하신 거 아닌가요?”

그와 약혼한 지 벌써 6년째였다. 그동안 그는 변함없는 정중함과 예의로 저를 대해 주었다. 비록 사랑하는 연인을 향한 달콤한 밀어는 없었어도, 자신을 신뢰하는 파트너로 여기는 것 같아 기분은 좋았다. 성공적인 결혼에는 때로 사랑보다 신뢰가 중요한 법이었다.

예후르는 꼭 들으면 안 될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기묘한 얼굴이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응시하던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영애가 그랬죠. 당신과 약혼하면 탐보프의 지원을 얻음과 동시에 이런 지겨운 일을 두 번 겪지 않을 거라고.”

당시 예후르는 약혼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탐보프의 유력 귀족들은 사막인에게 자신의 귀한 딸을 내어 주길 꺼려 수양딸을 제안했고, 교국의 고위 관료들은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어떻게든 소모적인 논쟁을 끝내고 싶어 했던 예후르의 눈앞에 어느 날 세도파가 나타났다.

빌헬미나 3세의 등극을 도운 공신 가문 바도비체 후작가의 장녀이자, 탐보프의 공주였던 증조모의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아가씨. 확실히 그녀라면 빌헬미나 3세의 조력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는 약혼 문제로 시끄러울 일도 없을 터였다.

“그뿐인가요?”

세도파가 멍하니 물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뺨이 핼쑥했다. 예후르는 냉정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사이에 그 이상이 필요합니까?”

그녀의 엷은 벽안에서 빛이 꺼졌다. 말라붙은 입술 사이로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 저는 전하를 연모해요.”

오랫동안 키워 온 사랑이었다. 6년 전 그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한 번도 끊긴 적 없었다. 그래서 우려하시는 아버지를 설득해 그와 약혼했고, 차일피일 결혼을 미루는 그를 애타게 기다리기만 했다.

비록 그가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은 아닐지라도, 그보다 미지근하지만 오래가는 감정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었다.

“사랑해서 전하와 약혼한 거예요.”

그에 예후르의 눈이 살짝 찡그러졌다. 세도파는 그 모습 하나하나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인식되질 않았다.

“제 말을 믿지 않으시나요?”

“네.”

어째서? 그녀의 의문을 읽은 것처럼 예후르가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마냥 당신의 마음이 순수하다 믿기엔 약혼으로 영애가 얻어 간 것이 너무나 많군요. 바도비체 후작가가 받아 간 경제적 이권만도 통상적인 수준을 훨씬 상회하는 데다, 아나클레토 추기경은 후작가의 일원이라는 점에 높은 가산점을 받아 원탁으로 들어왔죠. 게다가 영애는 그동안 탐보프의 나팔수 역할에 아주 충실하지 않았던가요?”

“저, 저는….”

세도파가 희게 질린 얼굴로 어떻게든 반박하려 했다. 예후르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영애가 조국에 충실했던 것을 비난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제 와 내게 충실했다 말하는 것이 조금 의아하군요. 영애도 나와의 약혼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고 나 역시 그러한데, 피차 억울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

세도파의 시선에 추가 매달린 듯 서서히 고개가 아래로 가라앉았다. 깊은 절망감이 깃든 목소리로 그녀가 읊조렸다.

“…그래서 제게 늘 선을 그으셨던 건가요? 카타리나 공작 전하는 그리 대놓고 아끼시면서, 저만은 그렇게.”

“여기서 카타리나 공작이 왜 나오죠?”

예후르의 목소리가 묘하게 날카로웠다. 세도파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이것 보세요. 늘 그분만 감싸고도시잖아요. 약혼녀는 엄연히 전데, 전하의 시선과 애정은 늘 그분을 향해 있어요! 제가 모를 줄 알았나요? 아무리 피 안 섞인 가족이라지만, 함께 자란 남매를 어떻게!”

세도파가 흠칫 어깨를 퉁겼다. 어둠 속에 반쯤 파묻힌 그의 금안이 위험한 빛을 내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얼굴에 소름이 등골을 기었다.

예후르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만 돌아가세요.”

발밑에 깔리듯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원망하듯 그를 쏘아보던 세도파가 거칠게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반대쪽 복도로 빠르게 걸어갔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처럼 단정한 발소리가 서서히 적막에 묻혀 사라졌다.

예후르는 피로한 눈가를 문지르며 느릿느릿 발걸음을 뗐다. 그런데 집무실 문고리에 손을 대려는 순간, 안쪽에서 벌컥 문이 열렸다.

“이야, 이거 완전 걸작이네, 걸작!”

파안대소하며 그를 밀치고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안드레아였다. 뜻밖의 인물에 잠시 굳었던 예후르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문을 잠그기 전에 안드레아가 잽싸게 문틈으로 신발코를 들이밀었다.

“꼬리 말고 도망치는 걸 보니 창피한 건 아나 봐?”

안드레아가 새빨간 입술을 쭉 찢으며 이죽거렸다. 한심하단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예후르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적당히 하고 돌아가. 피곤하니까.”

“아, 마귀인지 뭔지를 잡으러 가신다고 그랬지? 벌써부터 피곤해 죽으면 어째?”

안드레아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예후르는 집무실 안쪽으로 쭉 들어가 의자에 잠기듯 앉았다. 고개를 뒤로 꺾고 두 눈을 감았다.

“야.”

“…….”

“대답 좀 하지?”

“…돌아가라고 했을 텐데.”

“잠깐만 시간 내. 오늘은 너 괴롭히러 온 거 아니니까.”

그녀답지 않게 진지한 목소리였다.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예후르가 고개를 뒤로 꺾은 채 눈만 굴려 안드레아를 보았다.

“페기가 원탁으로 들어갔다며. 너 없는 동안 네 역할을 대신할 거고.”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안드레아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 미쳤냐? 걔한테 그런 자리가 가당키나 해?”

“너보단 가당하겠지.”

“씨발, 얻다 대고 날 비교해? 원탁에 개새끼가 앉아도 나보단 나을 텐데.”

성질을 가라앉히려 후, 깊은 숨을 내쉰 안드레아가 폭포수 같은 적발을 쓸어 넘겼다.

“나중에 후회할 짓 하지 말고 그만 놔 줘라. 걔가 불쌍하지도 않아? 성궁 밖에 뭐가 있는지 하나도 모르는 애한테 평생 여기 갇혀 살란 거잖아, 너는!”

“페기가 원한 일이야.”

“당연히 걔가 원했겠지! 그 착해 빠진 애가 너 혼자 피똥 싸는 걸 보고만 있겠냐?!”

페기는 어릴 적부터 유독 예후르를 잘 따랐다. 안드레아는 그저 카니나에서 페기를 데려온 사람이 예후르기에 그런 줄 알았다. 만약 스무 살 먹어서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기를 써서라도 말렸을 것이다.

“걔한테도 두 가지 길이 있어. 나처럼 뛰쳐나오거나, 너처럼 여기 처박히거나. 그런데 평생 여기 갇혀 살았던 애가 다른 길을 선택할 수나 있었겠어? 적어도 바깥이 어떤 곳인지 둘러볼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니야! 넌 지금 마귀가 나타났단 핑계로 걔가 성급한 결정을 내리는 걸 방관하고 있잖아!”

레오폴트는 그럴 수 있다. 본인 몸 챙기기 급급한 데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슬하의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위험해지는 꼴을 못 보니까.

하지만 예후르는 그러면 안 되었다. 페기는 바깥세상이 온통 무법 지대라 착각하지만 그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페기가 소망하는 목가적인 삶은 성 밖 자연 속에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자연의 소리는 성궁에 틀어박힌다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봐. 넌 걔가 네 옆에 남을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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