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328)

그제야 페기는 용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코른헤르트, 줄여서 코리. 200년 전 교황권이 정점에 올랐던 시기의 교황으로, 말 못 하는 짐승에게 이런 신성 모독적인 이름을 붙여 줄 만한 인물은 레오폴트밖에 없었다.

“나랑 한 약속 기억하지?”

코리의 콧등에 이마를 맞댄 예후르가 작게 속삭였다. 코리는 조용히 고갯짓했다. 칭찬하듯 코리의 뺨을 쓸어 준 예후르가 페기를 돌아보았다.

“페기, 이리 와.”

페기가 주춤했다. 괜찮다는 듯 예후르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망설이던 페기가 그의 손을 잡고 용에게로 다가갔다. 예후르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코리의 콧등 위로 살며시 올려놓았다.

“시원하지?”

페기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 아래서 서늘하게 약동하는 용의 체온이 못내 생경했다. 낯설지만 기분 좋은 신비로움이었다.

“소리는 어때?”

예후르의 물음에 페기는 더듬더듬 귀를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용들이 조용했다. 그 흔한 그르렁거림조차 없었다.

“코리가 나랑 약속했어. 널 만나면 조용히 하겠다고.”

사도는 짐승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사람이 하는 말처럼 선명하게 들리는 것은 아니나, 간단한 의사 표현 정도는 이해했다.

그것이 오히려 페기에겐 독이었다. 타고나길 청력이 예민한 그녀는 본능에 가까운 짐승들의 아우성을 못 견뎌 했다. 그녀가 오래간 아름다운 음악에만 빠져 산 것도 날것의 소리가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기는 제 손 아래 얌전히 엎드려 있는 용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홍채가 길게 찢어진 붉은 눈이 그녀를 요모조모 탐색하고 있었다. 페기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용의 콧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전하!”

별안간 쾌활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군복을 풀어헤친 젊은 남자가 손을 흔들며 느긋하게 다가왔다.

“와. 저희 고생할 동안 전하는 예쁜 애인이나 만들고 계셨던 거예요? 너무하시네.”

“카타리나 공작이다.”

“네?”

눈을 휘둥그레 뜬 남자가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어버버했다.

“그, 그럼 저분이 바로 그 유명한….”

“경의 무례함은 나로 만족하도록 해.”

예후르가 웃으며 그의 손가락을 잡아 내렸다. 헙, 하고 숨을 들이켠 남자가 페기를 향해 허리를 직각으로 접었다.

“죄송합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페기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괜찮다고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한 남자가 예? 하고 되물으려는데, 예후르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보고는 저쪽에서 듣지.”

“거참, 전 소개도 안 해 주십니까?”

남자는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예후르를 따라갔다. 페기는 그제야 고개를 살짝 들었다. 용의 커다란 붉은 눈이 아직도 깜박깜박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페기가 배시시 웃었다.

“코리.”

작게 이름을 불러 주자, 코리가 말없이 주둥이를 머리에 비벼 왔다. 용의 가벼운 몸짓에 두어 발짝 밀려난 페기가 간지럽다는 듯 웃으며 용의 머리를 꼭 안아 주었다.

“내전에 네가 착륙할 만한 곳이 없다는 게 아쉽다. 그랬으면 너랑 더 일찍 친해질 수 있었을 텐데.”

페기는 저 멀리서 심각한 얼굴로 보고를 듣는 예후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도 성궁엔 용의 날개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는 수도사들이 많아 용들이 무리 지어 입궁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용 기병대가 이렇게 급하게 날아들었다면,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전에 연회장에서 보았던 마귀를 기억하지?”

코리는 얌전히 눈을 깜박였다. 페기는 쓴웃음을 지으며 용의 주둥이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넌 이제 그 마귀들을 잡으러 갈 거야.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넌 ‘신을 죽이는 자’니까.”

사막에선 용을 그리 부른다 했다. 많은 신을 모시는 사막 인들에게 오랫동안 용이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 그들의 신화에서 용은 신의 날개를 꺾어 죽이는 악신이요, 하늘을 찢고 날아오르는 괴물이었다.

그러니 용이 마귀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할퀸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신도 죽이던 자가 고작 마귀 따위에 거꾸러질까.

페기는 용의 콧잔등에 이마를 대며 슬프게 눈을 내리감았다.

“난 예후르가 걱정돼.”

흔히들 예후르를 두고 말하길, 완벽한 천사의 현신.

그러나 그를 가장 가까이서 보았던 페기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에게 인간을 초월한 강력한 권능이 깃든 것은 맞지만, 그것이 그의 무결점을 증명하진 못했다. 그에게도 분명 결점이 있었다. 다른 우수한 능력들에 가려 교묘히 숨어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겉으로 드러난 결점이었으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이 무력해질 때가 있다는 걸 알기에.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매 순간 완벽할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알지만, 살면서 실패란 걸 겪지 못했던 예후르는 그걸 몰랐다. 자만하지 않을지언정 겸손하지도 않다.

불현듯 닥칠지 모르는 무력한 상황에 그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전혀 짐작도 안 되었다. 너무 강한 사람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페기는 그것이 못내 두려웠다.

“부탁이야. 예후르를 지켜 줘.”

아무리 그가 불세출의 권능을 타고난 사도라 하더라도 적은 오랫동안 교회의 주적이었던 뱀이다. 여덟 사도가 건재했던 시절에도 악명을 떨치던 존재이니, 분명 그 질김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녀도 꿰뚫어 본 그의 약점을 사특한 뱀이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하지만 강한 네가 함께라면 괜찮지 않을까.

용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핥아 주었다. 페기는 흐리게 웃었다. 제발 괜한 걱정이길 바라는 우울한 생각들이 그녀의 마음 언저리를 둥둥 떠다녔다.

***

용 기병대가 들고 온 소식은 짐작대로 마귀에 대한 것이었다. 보고에 따르면, 교국 서쪽에서 발견된 마귀의 흔적이 마치 성도 오스피나를 감싸듯 둥글게 퍼지고 있었다.

“전하를 꾀어내려는 것 같아 아무래도 예감이 좋질 않습니다.”

용 기병대 단원의 걱정에도 예후르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일 출발하도록 하지.”

“전하.”

“지금으로선 별다른 수가 없지 않나. 교국의 땅을 활보하는 마귀들을 저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예후르는 용 기병대에게 긴 여행을 준비하라 명한 뒤, 가족들에게 내일 떠나게 되었다는 말을 전했다. 페기는 그저 침묵했다. 전혀 짐작도 못 했던 차라만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아무 말 없는 페기를 보고 갑갑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레오폴트였다.

“그래….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그리해야지.”

레오폴트가 결사반대하고 나설 줄 알았던 예후르는 조금 놀랐다. 페기야 이미 원탁에서 들었다지만, 레오폴트에겐 일말의 언질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오폴트는 연옥색 눈을 둥글게 휘었다.

“왜. 네 멋대로 결정했다고 화라도 낼 줄 알았더냐?”

“…부정하진 않을게요. 무슨 심경의 변화에요?”

“그저 네가 장성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을 뿐이란다.”

레오폴트가 따뜻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작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컸을까.”

그리움에 묻힌 목소리를 들으며 예후르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레오폴트와 처음 만난 날을 그 역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모래의 도시. 재앙의 상징이던 어린 사내애를 찾아와 이름을 묻던, 아주 이상한 남자.

“조심하려무나. 너는 누구보다 뛰어난 사도지만, 적은 여덟 사도들이 융성하던 시절에도 쉬이 물리칠 수 없었던 우리의 숙적이다. 뱀은 간악한 도둑이요, 사특한 모리배라. 너의 약한 마음을 노릴 것이니,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말고 그의 말에 현혹되지 마라.”

“유념할게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예후르가 작게 웃어 보였다. 멍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레오폴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라면 잘 해낼 거다. 네가 언제 틀린 적이라도 있었더냐.”

레오폴트는 준비하느라 바쁠 테니 내일은 오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사실상 이것으로 작별이었다. 예후르는 크게 의미 없는 몇 마디 말을 더 건넨 뒤 그의 침실을 나왔다. 안절부절못하며 문 앞에 서 있던 고드릭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따라붙었다.

“전하. 이대로 가시면 성궁은 어떡합니까.”

“원탁 추기경들이 모두 남아 있고, 또 페기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도 물론 훌륭한 사도시지만, 경험이 부족하시지 않습니까. 아직 성하의 건강이 온전치 못한데 행여 무리를 하실까 저어됩니다.”

하기야 레오폴트는 몸이 좀 안 좋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페기에게 만사 맡겨 둘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급한 일은 내가 마무리 지었어요. 페기도 그동안 내 옆에서 많이 배웠으니 충분히 제 몫을 할 테고요. 내가 돌아올 때까지 모드벤나와 당신이 수고 좀 해 줘요.”

예후르가 고드릭의 어깨를 잡으며 부탁했다. 웬만한 신뢰가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말임을 알아 고드릭도 더는 하소연할 수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고드릭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늘 전하의 안전을 기도하겠습니다. 부디 빠른 시일 안에 돌아와 주십시오.”

예후르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곤 발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집무실에서 라발과의 합의안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면 페기를 찾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저녁 식사 때 보았던 페기의 표정이 좋지 않아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창밖으론 짙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촛불이 드문드문 밝히는 복도를 걸어가던 예후르가 문득 발을 멈추었다. 그의 집무실 앞에서 누군가 서성이고 있었다. 촛불 아래 드러나는 얼굴이 낯익었다.

“…세도파 양?”

금발을 길게 늘어트린 세도파가 흠칫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드레스 자락을 잡고 달려왔다.

“전하! 내일 떠나신다고 들었어요! 아니지요? 네? 마귀를 잡으러 가신다니, 어찌해 전하께서 그런 위험한 일을 떠맡으신 건가요!”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어둠 쪽으로 고개를 돌린 예후르가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다시 불빛 쪽으로 돌아온 그의 얼굴엔 차분함이 가면처럼 쓰여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직 근위대에도 알리지 않은 기밀인데 어떻게 아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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