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와중에 탐보프의 말단 귀족이 걸려들었으니, 나로선 행운이 굴러들어 온 격이지.”
탐보프의 대사도 당분간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으리라. 그의 최우선적인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떠나기까지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대사의 발이 묶이는 것.
이제야 그의 진짜 목적을 간파한 페기가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너 정말 라발과 손을 잡을 생각이구나.”
마귀의 대한 정보는 모든 나라가 갈구한다. 그러나 라발과의 국교가 정상화될지도 모른단 정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나라는 탐보프였다. 양국의 화해를 어떻게든 방해하려 들 나라 역시 탐보프다.
“라발의 황태자가 네 생일 연회에 나타난 순간부터 빌헬미나 3세는 예견하고 있었을 거야. 그래도 곧 때가 오리라 짐작하는 것과 세세한 합의안의 내용을 아는 건 다른 문제지. 양국의 합의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합의안의 내용은 유출되면 안 돼. 탐보프의 방해 공작까지 풀기에 나한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그는 마귀를 잡으러 떠나기 전에 이 문제만은 매듭짓고 싶은 모양이었다. 페기는 조금 답답한 심정이 되었다.
“레오는 이 사실을 알아?”
예후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페기는 이제 정말로 답답해졌다.
“어떻게 이런 중요한 문제를 레오한테 한마디 상의도 않고 진행할 수 있어? 도대체 언제 말할 생각이었는데? 나중에 합의 다 끝나면 그때 말하려고?”
“레오는 내가 설득할 수 있어.”
예후르가 단언했다. 멀거니 그를 바라보던 페기가 피로한 기색으로 눈을 짚었다.
그에겐 언제나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탐보프에게서 벗어나 라발과 손을 잡으려는 이유도 대강 짐작은 되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합리와 이성만으로 움직이진 않는다는 걸, 저 똑똑한 이가 왜 모르는지 이해가 안 됐다.
“레오한텐 내가 말할게.”
페기는 반박하려는 예후르에게서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의 외면에 멈칫한 예후르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 올렸다. 수심에 찬 얼굴이 울적해 보였다.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전에 레오한테 미안하다고 했다가 혼났거든.”
“하나도 미안하지 않으면서 미안하다고 하니까 그렇지.”
“그럼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그냥 솔직하게 말해.”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던 예후르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고마워, 페기.”
페기가 쓰게 웃었다. 그제야 울적함이 조금 가신 듯 예후르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난 네가 내전으로 돌아갈 줄 알았어. 종교 재판도, 라발과의 화해도 네가 좋아할 만한 건 아니니까.”
“언제까지 좋아하는 것만 보고 들으며 살 순 없잖아.”
“네가 바란다면, 너는 그래도 돼.”
“그럼 내가 이젠 그런 걸 바라지 않나 봐.”
페기는 쓴웃음을 머금고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원탁에 앉을 때부터 결심했던 일이다. 그를 돕기 위해서라면 제 손쯤은 더러워져도 괜찮다고. 그래서 예후르가 레오폴트처럼 힘들게 살지 않는다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그것도 고마워.”
“…….”
“그리고 미안해. 이건 진심이야.”
고개를 들어 바라본 예후르의 금빛 눈은 슬픔으로 이지러져 있었다. 페기는 말없이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언젠가 훗날에는 고맙다는 말만 듣고 싶었다.
예후르의 집무실에서 지내며 페기가 가장 놀란 것은 그가 정신없이 바쁘단 점이었다. 꼭두새벽부터 자정까지. 그가 바쁘단 사실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바쁠 줄은 몰랐다.
“원래 이 정도는 아니십니다. 요새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나름대로 그의 변호를 해 주던 모드벤나도 그럼 평소에는 식사를 잘 챙기느냐는 질문엔 침묵으로 일관했다. 페기는 그녀를 탓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녀가 간곡히 청해도 들어먹지 않았을 예후르의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교황 성하와 전하, 차라 도련님이 함께하는 식사가 아니면 보통 식사 생각을 잘 안 하십니다. 지금도 전하가 계시니 끼니를 전부 챙겨 드시는 거지, 만약 혼자 계셨으면 식사 시간에도 관료들을 불러 모아 회의할 분이세요.”
이참에 모두 털어놓자는 듯 모드벤나는 수년간 쌓아 온 걱정거리를 줄줄이 얘기했다. 덩달아 페기의 표정도 점점 심각해졌다.
“앞으론 나도 옆에서 거들게요. 그러다 예후르까지 쓰러지면 큰일이니까.”
그들의 비밀 협약은 당일부터 시작되었다.
점심을 먹고 노곤한 기분으로 보고서를 읽던 페기의 눈앞으로 불쑥 찻잔이 들이밀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모드벤나였다.
“고마워요.”
페기는 엷게 웃으며 차향을 즐겼다. 그런데 모드벤나가 특유의 꼿꼿한 자세로 여전히 앞에 서 있었다. 의아한 눈길을 보내자, 모드벤나가 갈색 눈을 굴리며 보란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전하. 차도 드시면서 하십시오.”
“네.”
예후르는 보고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성의 없이 대꾸했다. 그제야 제 역할을 떠올린 페기가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가렸다. 난데없이 시야가 가려진 예후르가 당혹한 기색으로 물었다.
“페기?”
그의 고개가 제 쪽으로 돌려지자, 페기는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곤 옅게 웃었다.
“차 마시면서 해.”
“이왕이면 다과도요.”
모드벤나가 잽싸게 끼어들어 다과 접시를 올려놓았다. 멀뚱히 둘을 쳐다보던 예후르가 순순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찻잔에 입술을 붙이려는 순간,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후르가 찻잔을 도로 내려놓고 말했다.
“들어와요.”
“전하!”
시종이 시퍼레진 얼굴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바, 밖에 용이!”
꺄악!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페기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여러 마리의 용들이 춤추듯 날갯짓하며 서관 앞에 착륙하고 있었다.
“용 기병대군요.”
모드벤나가 눈썹을 까딱이며 말했다. 예후르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나가 봐야겠어요.”
그는 바람처럼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입 한 번 대지 않은 찻잔을 보며 모드벤나가 깊은 한숨을 삼켰다. 예후르를 쫓던 페기가 그 모습을 보곤 쓴웃음을 지었다.
중앙관에서 오가는 관리들로 늘 붐비던 서관은 1층 로비부터 텅 비어 있었다. 다들 용을 보고 숨은 듯했다.
“예후르. 용 기병대는 네 직속 부대지?”
“응.”
페기는 용 기병대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들을 곰곰이 떠올렸다.
본디 용은 사막에서 서식하는 동물이었다. 흉포한 성질로 오랫동안 악명 높았는데, 어느 사막 부족이 용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길들인 용을 타고 중무장한 군대는 100년 전 성전에서 처음 선을 보였다.
사막을 공격한답시고 기껏해야 낙타 정도를 준비했던 교회군은 용에게 재갈을 두르고 나타난 적군을 보고 기함했다. 화살이 닿지 않는 저 높은 하늘에서 무작위로 쏟아지는 창살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성전 초반, 교회군이 속수무책으로 밀렸던 것은 난생처음 보는 용 기병대를 대적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라발 해군이 사용하던 대포를 가져와 용 기병을 쏘아 맞히기 시작하며 전선은 라발 이남 에놀라 사막에서 교착되었다. 그렇지만 대응책을 찾았다고 용 기병의 효용성이 다한 건 아니었다. 공중에선 독수리보다 빠르며 지상에선 사자보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위협하는 용은 분명 탐나는 무기였다.
행운은 종전 후 교국으로 찾아들었다. 사막의 권력 다툼에서 밀린 이스파갈족이 교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 라발의 침공으로 경비대를 잃은 교국에겐 이스파갈족의 무력이 꼭 필요했다. 그러나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칼날을 들이대고 싸우던 이들과 동고동락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였다.
그때 레오폴트의 마음을 돌린 것이 바로 용이었다. 사막은 용을 길들이는 방법을 기밀로 붙이고 용의 반출을 엄금하였는데, 당시 이스파갈족이 용의 알 다섯 개와 길들이는 방법을 제공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렇게 교국은 사막 이북에서 유일하게 용 기병대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이스파갈족이 데려온 수십 마리의 용은 경비대에서 자신의 몫을 톡톡히 했고, 그들이 내어 준 다섯 개의 알은 어느덧 열댓 마리의 성체가 되어 교황 직속 용 기병대를 구성했다. 그리고 레오폴트는 예후르가 성인이 되자마자 용 기병대의 전권을 위임했다.
기실 용 기병대는 기틀부터 예후르가 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맹금류를 비롯한 맹수 조련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용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덩치 큰 기사들도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용을 그는 어릴 때부터 곧잘 타고 놀았다. 그가 푹 빠져서 매진하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였다.
각지의 수도원을 돌며 용을 타기 적합한 소년 소녀들을 선발한 것도 그였다. 그들은 이스파갈족 교관의 혹독한 가르침을 받아 어엿한 용 기병대의 단원으로 자리매김했다. 경비대가 교국에 충성하고 근위대가 교황에게 충성한다면, 용 기병대는 오로지 예후르에게만 충성했다.
그러나 예후르와 늘 가까이 지냈던 것 치고 페기는 용 기병대와 제대로 만난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그의 용조차 가까이서 본 적이 없다. 그녀가 말 못 하는 짐승들을 꺼려 했기 때문이다.
“괜찮겠니?”
그것을 모르지 않는 예후르가 자못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페기는 미소로 화답했다. 이만 알을 깨고 나오고 싶었다. 지금껏 그러했듯 좋아하는 것에만 둘러싸여 살아갈 수는 없으니, 조금 무섭고 꺼림칙한 것에도 익숙해지고 싶었다.
로비의 문을 열자, 용들로 가득한 앞뜰이 보였다. 시커먼 비늘을 두른 용들이 몸을 유연하게 꺾으며 지상을 거닐고 있었다. 조금 긴장된 얼굴로 예후르의 뒤를 따르던 페기는 문득 머리 위로 지는 그림자를 느끼고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다.
역광을 진 용 한 마리가 우아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부드러운 날갯짓에 바람이 쏟아져 내렸다. 예후르가 페기의 허리를 끌어안아 바람을 막아 주었다. 페기는 가까스로 실눈을 떴다.
하얗고 하얀 용이었다. 마치 대리석을 깎아 만든 것처럼 비늘에 투명한 윤기가 흘렀다. 검은 용들 가운데 고고하게 앉은 순백의 용은 고개를 내려 예후르의 어깨에 주둥이를 문질렀다.
“그만해, 코리.”
예후르가 간지럽다는 듯 웃으며 용의 주둥이를 밀어냈다. 그래도 용은 개의치 않으며 혓바닥으로 예후르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붉은 눈 한가득 애정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