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328)

그 외에도 문제들은 산적했다. 밀실에서 작성된 라발과의 합의안도 아직 세세한 부분은 조율이 끝나지 않았고, 냄새를 맡고 기어드는 타국의 간자들도 유념해야 했다.

게다가 그의 영지인 엘피도는 하필 양잠업이 융성한 지역이었다. 늦봄부터 초여름은 누에에게 먹일 뽕잎을 따느라 가장 분주할 시기이므로, 그에 대한 보고도 매일같이 올라왔다.

마귀 사태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예후르는 틈틈이 영지의 일을 챙겼다. 그의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여기 숫자가 잘못됐어.”

페기는 조금씩 그의 업무를 돕기 시작했다. 처음 하루 이틀은 뒷자리에 앉아 그가 일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를 어려워하던 실무진들도 곧 경황없이 바쁜 일과에 매몰되어 그녀를 한낱 의자쯤으로 여기게 됐다. 그러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맥을 잡을 수 있었다.

전체적인 윤곽이 머릿속에 들어가자 예후르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가 보고 넘긴 서류들을 자세히 살펴봤다. 쥐뿔도 모르는 일에 괜한 말을 얹는 것보단 실수를 바로잡는 게 더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셈이 안 맞아. 여기서 이걸 곱하면 8208이니까….”

바쁜 와중에도 예후르는 페기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 주었다.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고, 그녀의 지적이 틀리면 왜 틀렸는지도 알려 줬다. 지적이 맞으면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러네.”

빠르게 숫자를 훑은 예후르가 깃펜을 움직여 숫자를 고쳐 썼다. 페기는 서류를 한 장 넘겨 중간 부분을 짚었다.

“그리고 이 건은 관계자들을 다시 불러서 증언을 대조해 보는 건 어떨까? 얼핏 보면 관계자들의 증언이 일치하는 것 같은데, 세세히 따져 보면 어긋나는 부분이 많아. 예를 들어 문지기는 볼가 경의 마차가 해 질 녘 성문을 통과했다고 증언했는데, 중앙관의 하녀는 저녁 기도를 드린 뒤 볼가 경을 목격했다고 했어. 엊그제 일몰은 저녁 기도 전이었으니, 두 사람의 증언은 일치하지 않아.”

엊그제 벌어진 뇌물 사건이었다. 탐보프 측 대사인 퓌슬러 백작의 호위 기사 볼가 경이 늦은 밤 중앙 부처 수도사에게 은밀히 뇌물을 건네다가 시종에게 발각된 것이다. 현장에서 검거된 수도사는 볼가 경에게 지속적으로 뇌물을 받았음을 자백했으나, 근위대가 도착하기 전에 달아난 볼가 경은 모든 혐의를 부정하고 있었다.

“볼가 경은 문지기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해 질 녘 성궁에서 나왔다고 진술했어. 하녀가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보고서에 따르면 자신의 수호천사를 걸고 맹세했다고 해. 만약 목격자를 더 찾을 수만 있다면 볼가 경의 진술을 무너트릴 수 있을 거야.”

“문지기의 증언은? 실제로 서문 출입 기록에는 볼가 경의 마차가 해 질 녘 통과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빈 마차였을 수도 있잖아.”

페기의 말에 예후르가 빙긋 웃었다.

“해 질 녘은 퇴청하는 사람들로 성문에 사람들이 몰리는 시간이지. 눈에 익은 마차는 제대로 안을 확인하지 않고 내보냈을 거야.”

“…….”

“잘했어, 페기.”

예후르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페기가 뺨을 붉히며 조금 쑥스럽게 웃었다.

“내가 왜 이 건을 중요하게 다루는지 알겠어?”

예후르가 보고서 앞장에 붙여진 보라색 색종이를 눈짓했다.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중요한 서류란 뜻이었다. 페기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무리 행정적인 업무를 관할하는 중앙 부처 관리라 해도 그 본질은 성직자야. 탐욕을 멀리하고 재물을 경시해야 마땅할 수도사가 뇌물을 받았으니 중대한 문제지.”

“페기. 그건 종교 재판에서나 통하는 말이야. 말했잖아. 정치인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페기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정치에서 중요한 건 세력이다. 클레멘스 추기경이 라발을 대변하듯, 모두들 각자의 세력을 위해 톱니바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이걸로 대사를 옭아맬 생각이구나.”

볼가 경은 탐보프 대사의 호위 기사. 그가 대사의 명령으로 움직일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예후르가 페기의 빈 찻잔에 뜨거운 차를 따라 주었다.

“뇌물 수수 혐의에 볼가 경의 이름이 오르내릴 때부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탐보프의 술책이 잡혔다고 생각했을 거야. 돈으로 기밀을 사는 건 흔한 일이니까. …우리도 하고 있고.”

비밀이라는 듯 예후르가 미소 띤 입술에 검지를 붙이며 속삭였다.

“모든 나라가 하는 흔한 일이지만 꼬리가 잡히면 곤란해. 부도덕한 일임엔 분명하니까. 그러니 이런 일을 꾸밀 땐 정보를 주는 사람을 잘 선택해야 돼. 만에 하나 들켜도 끝까지 발뺌할 사람이어야 좋겠지.”

“그러고 보니 엊그제 잡힌 수도사도 뇌물을 받은 대가로 성직자만 드나들 수 있는 기도실을 열어 줬다고 했어.”

“말도 안 되는 진술이야. 기도실이 탐났으면 기도실을 관리하는 하인을 매수하는 것이 더 그럴듯하지 않니?”

“과연 수도사가 기밀을 팔았다고 자백할까?”

페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예후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안 될 거야. 탐보프 대사인 퓌슬러 백작은 치밀한 사람이니까. 수도사의 약점 정도는 쥐고 있겠지.”

“약점?”

“수도사는 탐보프 출신이야. 놀랍게도 퓌슬러 백작의 영지에 가족들이 살고 있지. 자세한 건 후속 보고가 올라와 봐야 알겠지만 대충 그림이 그려지지 않니?”

예후르가 뻐근한 몸을 늘리며 기지개를 폈다.

“수도사와 접촉을 시작했을 때부터 만에 하나 들켰을 시의 각본은 다 짜여 있었을 거야. 일개 수도사와 호위 기사의 일탈 정도로 마무리하려 들겠지. 실제로도 그렇게 될 거고.”

볼가 경은 공을 세워 작위를 받은 준남작이었다. 오등작에도 들지 못하는 한미한 작위니 꼬리 자르기도 수월할 터였다.

“그럼 처벌은 어떻게 되는 거야?”

“수도사는 교국에서 처벌할 수 있어. 반면 볼가 경은 탐보프 대사의 사람이라 우리가 직접 처벌하긴 곤란하지. 아까 네가 말한 것처럼 퇴청 시간 이후로도 성궁에 있던 것이 증명된다면, 그 건에 대해 경미한 처벌을 요청할 순 있을 거야.”

“뇌물 수수 건은?”

“만약 일이 잘 풀리면 거기까지도 처벌할 수 있겠지. 하지만 기밀을 빼내려 한 죄로 처벌을 요구하진 못해. 수도사가 자백하지 않는 한.”

페기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수그렸다.

“결국 대사의 뜻대로 되는 거구나.”

“볼가 경에 한해선 그렇겠지.”

예후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페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이야?”

“볼가 경은 처벌할 근거가 빈약해. 설사 증거가 나와도 우리 손으로 처벌하긴 힘들겠지. 그런데 수도사는 아니잖아. 현장에서 검거되어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가 확실하고, 교회의 뜻대로 처벌할 수도 있어.”

“…….”

“난 그자를 종교 재판에 넘길 생각이야.”

페기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종교 재판은 세속의 법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교리에 따라 죄를 갈랐다. 교회가 강세했던 시절에는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도 열렸지만, 레오폴트는 직권으로 종교 재판의 대상을 성직자로만 국한시켰다. 죄를 판가름하는 기준과 처벌 수위가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종교 재판이 열렸던 건 7년 전이잖아. 고작 이런 일로 열릴 수 있는 거야?”

“고작이라니? 탐욕을 멀리하고 재물을 경시해야 마땅할 수도사가 뇌물을 받은 중대한 문제라고 네가 그랬잖아.”

“예후르.”

“네가 왜 종교 재판을 꺼리는지 알아. 하지만 필요해.”

7년 전, 귀부인과 사통한 죄로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던 한 주교는 다신 걷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끔찍한 악행 대부분이 종교 재판을 통해 행해진 것이었다. 애당초 종교 재판은 이단을 가린단 명목으로 반대파를 숙청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 수도사는 어떤 벌을 받게 될까?”

“글쎄. 교회의 비밀을 팔아넘겼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니 무거운 벌을 피하기 힘들겠지.”

페기의 해끄무레한 낯이 깊게 가라앉았다. 물끄러미 그 얼굴을 들여다보던 예후르가 조용히 일렀다.

“…내키지 않으면 돌아가도 돼.”

또다시 갈림길이 그녀의 눈앞으로 펼쳐졌다. 하나는 레오폴트와 예후르를 따라 정치인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태껏 그러했듯 안온한 내전에서 음악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페기는 후자의 삶이 좋았다. 지금까지 바라 왔던 삶의 모습이 그러했다.

그렇지만.

“내가 돌아가면, 너 없는 교국은 누가 돌봐?”

레오폴트는 아프다. 안드레아는 의지가 없다. 차라는 아직 어렸다. 마음을 다잡듯 페기는 손을 꼭 쥐었다.

“믿을 만한 추기경에게 부탁하면 돼. 서열상 사도가 아닌 추기경이 클레멘스를 완전히 통제하긴 힘들겠지만, 여차할 땐 레오가 나서면 되니까.”

지금은 그렇게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훗날 예후르가 교황이 되었는데 옆에서 도와주는 가족 하나 없다면, 홑몸으로 어린 사도들을 건사하기 위해 온갖 역경을 겪었던 레오폴트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레오폴트가 홀로 풍파를 견디는 모습을 보며 많이 울었다. 예후르는 그렇게 두고 싶지 않았다.

“네가 종교 재판을 결심했다면 마땅한 이유가 있겠지.”

“…….”

“말해 줘.”

날 설득해 줘.

페기가 고개를 들어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다.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던 예후르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기밀을 팔아넘기는 사람은 그 수도사 한 명만이 아닐 거야. 이번에 탐보프가 운이 나빠 걸렸을 뿐 다른 나라들도 비슷비슷하겠지. 탐보프의 대사도 그걸 알아. 또 양국의 관계가 있으니 이 문제를 조용히 덮으리라 예상할 거야.”

어찌 되었든 탐보프는 교국의 최고 우방국이었다. 조금 머쓱한 상황이 벌어졌을 뿐 큰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할 것이 빤했다.

“하지만 뇌물을 받은 수도사를 종교 재판에 회부해 벌을 받게 한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이건 경고야. 교국의 땅에서 이리 공공연한 짓을 저지르지 말라는 경고. 그리고 비슷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여러 성직자들에게 전하는 경고.”

지금은 아주 예민한 때였다. 천 년 만에 뱀이 부활한 데 이어, 20년간 교착 상태였던 국제 관계가 조금씩 어긋나려 하고 있었다. 타국의 대사들은 어떻게든 기밀 한 줌 더 얻어 내려 혈안이 된 상태였고, 교국은 어떻게든 정보를 지키고자 아등바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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