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가 멀뚱히 약병을 내려다보았다. 페기는 침대 옆 서랍장에서 빨대를 꺼내 약병에 꽂아 주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레오폴트가 가면 입술 사이로 작게 뚫린 구멍에 빨대를 집어넣었다.
그 모습이 생소한지 차라는 묘한 얼굴을 했다. 젖어서 풀어지는 갈대 빨대를 예후르가 새로 갈아 주자, 그만 되었다는 듯 레오폴트가 손짓했다.
“그보다 마귀는 어찌 되었느냐?”
“레오.”
페기의 엄한 질책에 레오폴트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시국에 어찌 계속 누워 있을 수만 있겠느냐. 어차피 내 쓰러져 있는 동안 중요한 일은 예후르가 다 처리했을 테니, 보고나 듣자는 게지.”
“걱정하지 마. 짧게 할게.”
예후르가 페기의 어깨를 짚으며 싱긋 웃었다. 페기는 못마땅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일단 연회장에 나타났던 마귀들은 그날 밤 모두 전소됐어요. 성화의 효력이 여전하다는 걸 알았으니 뱀도 더 이상은 성도에서 마귀를 불러내진 못하겠죠.”
“사상자는 얼마나 되느냐?”
“아홉이요.”
레오폴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면 사이로 얼핏 비치는 연옥색 눈동자에 우울감이 짙게 서렸다.
“장례는 끝났느냐?”
“거의 마무리 단계에요. 죽은 근위대원들은 가르기타 성당 지하 성묘에 묻힐 예정이고, 타국의 귀족들은 관을 밀봉하여 고향으로 보내기로 했어요.”
“사특한 마귀의 손에 명을 다했으니 그들은 순교자나 다름없다. 그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내가 배웅해 주고 싶구나.”
멈칫한 예후르가 곧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어 보였다.
“가르기타 성당은 본디 정결한 장미 기사단의 단원들이 묻히는 곳이죠. 당신이 왕림한다면 필시 죽은 이들도 감복할 겁니다.”
레오폴트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의 모습이 안타까워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페기는 문득 문가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주치의를 발견했다. 언제부턴가 예후르도 문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차라가 들뜬 목소리로 레오폴트의 집중을 끌었다.
“있잖아요. 내가 어제 신학 수업하다가 궁금한 게 생겼는데 글쎄, 선생님이 그런 걸 왜 궁금해하냐고 화내는 거 있죠.”
“뭐? 파우스타 수도사가 말이냐? 그럴 사람이 아닌데….”
“아이참,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겠어요?”
레오폴트가 차라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페기와 예후르는 조용히 복도로 나갔다. 둥근 안경을 쓴 주치의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허리를 푹 숙였다.
“소, 송구합니다! 성하께서 이렇게 오래 일어나지 못하실 줄은 저도 미처 짐작하지 못했….”
“됐으니 지금 성하의 상태가 어떤지 상세하게 얘기해 봐요.”
예후르가 딱 잘라 말했다. 안경을 추킨 주치의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건강이 많이 쇠하셨습니다. 원래도 피로가 누적되어 위태로운 상태셨는데, 연회장에서 받으신 충격으로 체내 균형이 깨지셨어요. 몸을 완전히 회복하시기 전까진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예후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눈치를 보던 주치의는 그만 가 봐도 좋다는 페기의 속삭임을 듣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턱을 매만지며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예후르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페기. 레오가 샤미소 백작 부인의 장례식에 참여하는 건 어떻게든 막아야 해.”
페기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봤다. 예후르의 표정이 드물게 심각했다.
“샤미소 백작 부인의 아들딸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장례식장에서 공공연히 레오의 탓을 하고 있어. 그가 저주받았다나 뭐라나….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라 레오를 보면 무슨 헛소리를 할지 몰라.”
예후르는 그 외에도 가르기타 성당의 주임 신부가 어떤 사람인지, 유족들의 보상은 어느 선이 적정한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페기는 그 말 하나하나 귀담아 들으면서도 머릿속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예후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물었다.
“마귀가 나타났대?”
“…….”
“그래서 곧 떠나는 거야?”
그는 한 번도 이런 걸 말해 준 적이 없었다. 그녀를 소외시키려던 게 아니라 그녀 스스로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제게 이런 걸 설명하고 있는 예후르가 생경했다. 그걸 가만히 듣고 있는 저 자신도 이상했다. 그들을 둘러싼 세상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페기.”
예후르가 한 발짝 다가서기 무섭게 페기가 뒷걸음질했다. 거리를 유지한 채로 페기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원망하는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의연하지 못한 저 자신이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네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예후르가 떠나면 레오폴트를 도울 사람은 저 하나밖에 남질 않는다. 휴식이 필요한 레오폴트는 정사를 돌볼 여력이 되질 않는다. 늘 그렇듯 안드레아는 행방이 묘연했다. 교국의 무게가 덜컹 그녀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오랫동안 레오폴트가 견디고 예후르가 뒷받침하던 무게를 그녀 홀로 견뎌야 했다.
차라리 기약이라도 있으면 나았을까.
돌아올 날짜를 알고 보내는 여행이었으면, 이토록 마음이 불안하진 않았을까.
예후르는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귀를 잡는 일에 기약이 있을 리 없었고, 꼭 돌아오겠단 약속을 하기에도 불확실함이 컸다. 어쩌면 그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지금이 그를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지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당연한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별안간 머릿속에 불이 붙었다. 모르지 않았던 사실이다. 알고 있었기에 원탁에서도 그리 고집을 피웠었다. 그러나 ‘죽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사실이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현실로 엄습하자 덜컥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는 나를 카니나의 뒷골목에서 구원해 준 사람.
그가 없다면 세상은 다시금 악취 풍기는 쓰레기 더미로 되돌아가리라. 뙤약볕이 아프게 쏟아지고 들쥐가 구더기처럼 들끓던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마저 사라진 세상에 또 누가 나를 구원하러 올까.
페기는 화끈거리는 눈가를 가렸다. 그녀는 아직 그를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안타까운 듯이 그녀를 응시하던 예후르가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페기가 황급히 뒷걸음질했지만 그의 가슴팍이 어느덧 코앞이었다. 눈 깜짝할 새 다가온 그가 천천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주 소중한 것을 품듯, 조심스럽게.
“…아니야. 아직 마귀는 나타나지 않았어.”
그에 막혔던 숨통이 확 풀렸다. 기나긴 숨을 내쉰 페기가 어지럼증을 버티며 더듬더듬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곧 떠나게 될 것 같아서.”
“…….”
“요새 자꾸 그런 예감이 들어. 널 오랫동안 보지 못할 것 같은, 그런 기분.”
페기는 말없이 그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경직된 그녀의 몸을 달래듯 예후르가 부드럽게 뒷목을 쓸어 주었다.
“예감이 예감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알잖아. 내 감은 잘 들어맞는 거.”
“…차라리 내가 가고 싶어.”
“그 말을 들으니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어지는걸.”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은 예후르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페기가 성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장난하는 건 줄 알아? 만약 나도 너처럼 마귀를 베어 죽일 수 있었으면, 원탁에서 내가 가겠다고 자청했을 거야.”
“알아. 넌 용감한 아이니까.”
페기를 꼭 끌어안은 채로 예후르는 그녀의 짧은 곱슬머리를 매만졌다.
“그저 내 마음도 너와 같을 뿐이야. 네가 날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너만은 보내고 싶지 않은 거지.”
“…말이나 못 하면.”
“아무렴, 내가 제일 잘하는 건데.”
키득거리며 페기의 귓바퀴에 짧게 입을 맞춘 예후르가 속삭였다.
“그리고 너도 할 줄 알아.”
“뭘?”
“마귀를 베어 죽이는 거.”
두어 번 눈을 깜빡인 페기가 홱 고개를 들었다. 엷은 미소가 올라온 그의 얼굴은 역시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나도 할 수 있다고?”
“너도 사도잖아. 너뿐만이 아니야. 레오도, 차라도, 하다못해 안드레아도 할 수 있어.”
“하지만….”
페기가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연회장에서 예후르의 모습을 본 뒤로 매일 밤마다 권능을 불러일으키는 연습을 했다. 그러나 성검을 만들긴커녕 손끝에서 불을 일으키는 것조차 버거웠다.
30년 전 오스피나 참극으로 수천 년을 쌓아온 사도들의 기록도 죄 불타 사라진 터라, 다른 데서 조언을 얻기도 힘들었다.
“연습으로 되는 게 아니야. 본능으로 하는 거지. 너도 언젠가 알게 될 거야.”
페기의 눈빛에 의심이 서렸다. 예후르가 작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 위로 턱을 얹었다.
“페기. 내일 내 집무실로 올래?”
“…집무실?”
“응. 너라면 금방 보고 배울 거야.”
페기는 예후르가 하는 일들을 곰곰이 떠올렸다. 교황 대리 업무에 지금은 마귀에 대한 일까지 더해졌을 것이다. 당연히 금방 보고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빈자리를 제가 채워야 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배울 수 있는 건 배워야 했다. 페기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위로 예후르가 웃는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목 부근이 간지러웠지만 온몸이 그에게 포박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
교국의 2인자인 엘피도 공작의 공식적인 일과는 아침 7시 30분부터 시작된다.
“말씀하신 대로 대성당의 성화를 더욱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순례자들의 광장 방문을 일시적으로 금지시켰습니다. 그리고 샤미소 가문의 영애께서 진상 조사에 본인도 넣어 달라 청하셨는데, 이는 법률부처의 자세한 보고를 들으시면 될 겁니다.”
모드벤나의 간략한 보고가 끝나면 8시경부터 중앙 부처의 보고가 시작된다. 대부분 신실한 수도사들이나, 때때로 자신의 공과를 부풀리거나 축소하려는 시도가 있기 마련이다. 보고를 들으며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고 각 부처 실무진들의 약은 눈속임을 간파하는 것은 총결정권자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만일 그날의 보고에서 그가 개입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 부처의 실무진과 함께 기나긴 회의를 가진다.
요즘 같은 때는 당연히 마귀 사태에 대한 일이었다. 각국 대사들이 보내는 외교 서한에 어떤 식으로 답장해야 하는지 혹은 유족들에게 보낼 보상안은 어느 선이 적정한지. 상세한 집필은 실무진들이 하겠지만, 밑그림은 예후르가 짚고 넘어가야 했다.